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64화 (64/195)

64화 Chapter 17. 방해물을 치우다 (4)

“감형…… 이라고요?”

조동규는 결국 원하던 진단서를 얻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런데도 감형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동거녀가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고요.”

강현욱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유진이 찾아낸 피 묻은 옷가지와 피해자로부터 뺏은 귀중품들.

전리품인 양 고이 간직해둔 것들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유진 씨가 결국 옳은 선택을 했어.’

조동규가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 때, 그와의 면담 내용을 이유진에게 들려줬었다.

그녀로서는 같이 살고 있던 조동규를 신고하기 망설였으나 시현의 설득으로 결국 용기를 냈다.

“그렇다면 범죄를 입증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텐데요.”

“맞습니다. 증거는 충분했으니까요. 문제는 조동규 측 변호인단에서 사람을 죽인 게 조현병 때문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강현욱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변호인…… 단이요?”

“네, 나쁜 놈이 돈은 많은지 변호팀은 아주 제대로 꾸렸더라고요. 살해 동기는 지시하는 환청 때문이고 자기는 그 내용에 저항하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조동규는 개인 변호사 대신 유명 법무 법인을, 그것도 법무 법인 두 곳에서 총 4명으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선임했다고 했다.

“후우. 그 자식, 아무리 봐도 범죄자지 환자는 아니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강현욱이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쳤다.

“물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환자보다는 범죄자에 가깝죠.”

“어떤 면이 그렇던가요?”

그 말에 강현욱이 관심을 보였다.

“그건…….”

시현이 머뭇거렸다. 그가 미래에 저지를 범죄들을 더 알고 있어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일단 그동안 봐온 환자와 달랐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가 아닌데 심리검사를 미루는 것도 의아했고요.”

“검사를…… 미뤘다고요?”

“네, 심리검사에는 증상을 과장하거나 축소해서 보고하는지를 확인하는 척도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타당도 척도.

임상에서 널리 쓰이는 MMPI(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만 보더라도 증상을 허위로 만들어내는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

처음 검사를 거부했을 때는 의도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증상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함인듯했다.

“오, 그렇군요. 또 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까?”

“입원하는 동안 약을 먹지 않은 것도 상식적이지 않았습니다.”

조동규의 입원 형태는 자의(自意) 입원.

스스로 불편한 점이 있어 입원했다는 것인데, 기껏 입원해놓고 몰래 약을 버리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런 내용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 자식이 삼아대병원 의무 기록을 제출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제출해봐야 좋을 게 없을 테니까요.”

혈액검사에서 치료제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과 일반적인 환자들과 완연하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것.

그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증거들이었다.

“네. 대신 이 병원에 오기 전에 치료받았던 기록은 빠짐없이 제출했는데, 거기 나온 내용들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조현병 환자라는 겁니다.”

‘다른 병원이라.’

조동규는 삼아대병원에 오기 한참 전부터 준비해왔던 모양이었다.

범행이 들통나더라도 형량을 최소화할 방법을.

“그리고 변호인단도 보통이 아닙니다. 참고인으로 다른 병원 정신과 교수까지 섭외했을 정도니까요. 그분 의견으로는 의무 기록을 검토한 결과 조현병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더군요.”

법적인 문제가 얽혀있으면 의견 내는 것을 조심하기 마련. 어떻게 단기간에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가 궁금했다.

“교수님 성함이 혹시?”

“한국대병원 김상진 교수라고 하던데요.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그 이름에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얼마 전 PGR에서 만났던 한국대 교수였다.

“환청이 심하고 현실 검증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하던가요?”

“맞습니다! 딱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권위 있는 교수의 소견이니 재판부에서도 쉽게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만만치 않네요.”

평소 잘난 척이 심해 밉상이긴 했어도 명색이 국내 1, 2위를 다투는 한국대병원의 교수. 그보다 더 공신력 있는 참고인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실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혹시 천시현 선생님께서 저희 쪽 증인으로 출석해 주실 수 있는가 해서요.”

“제가요?”

“네. 자기에게 불리한 의무 기록은 제출을 거부할 수 있어도 담당이었던 선생님이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가 환자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현이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법정에 나가 증언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그 부분은 담당 교수였던 이광섭 교수님께도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병동 담당의는 저지만 주치의는 과장님이시니까요.”

“그렇…… 습니까?”

강현욱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상대방이 교수를 참고인으로 불렀다면 이쪽에서도 최소한 교수급이 나오는 게 맞을 겁니다.”

“실은 교수님을 뵙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걱정했는데 역시나 거절하시더군요. 아무래도 환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꺼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광섭 교수님이요? 그럴 리가…….”

시현의 보고를 통해 조동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광섭이었다. 일반적인 환자가 아니라는 것도 진단서를 목적으로 입원한 것도 모두 파악하고 있을 텐데 어째서?

“제가 설득해 봤지만, 교수님이 완고하게 거절하시더군요. 그래서 부득이 천시현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 부분은 교수님께 여쭤보고 답변드리겠습니다.”

이광섭이 거절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의중을 모른 채로 덜컥 수락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공판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강현욱은 다시 한번 자신의 명함을 건넨 뒤 면담실을 떠났다.

* * *

다음 날 병동.

“김민숙 환자 좀 어때요?”

“음…… 별다른 행동문제 없었어요. 어제 잠도 잘 잤고 아침밥도 다 드셨어요.”

시현은 병동에 올라가자마자 김민숙의 상태부터 챙겼다.

‘나쁘지 않은데.’

수액 라인을 달고 침상에 걸터앉은 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썩 편안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주위를 극도로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길수에게 두들겨 맞고 극도로 불안해하던 과거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수액 들어가는 부위는 불편하지 않으세요?”

“…….”

“당분간은 면회가 어려울 수도 있는데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전달해드릴게요.”

“…….”

그렇다고 면담이 잘 되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병실에 들어가 말을 붙였으나 멍한 표정의 환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집에서 그림만 그렸다고 했던가.’

어제 면담에서 보호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과거 입원에는 하도 정신이 없어 놓쳤단 부분.

마침 환자복 안에 따로 입은 티셔츠에 그려진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귀여운 표정으로 떡꼬치를 오물거리는.

인기 웹툰 ‘작가의 뇌세포들’의 주요 캐릭터였다.

“드로잉 좋아하세요? 면회 오실 때 스케치북하고 연필 준비해달라고 할까요?”

“…….”

김민숙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지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아침 회진 끝나고 첫 시간에 면담하시죠. 정신과 이야기 말고 웹툰 이야기도 괜찮습니다. 저도 ‘야식 세포’를 제일 좋아합니다.”

“네…….”

입원 후 처음 듣는 환자의 목소리였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김민숙은 병실을 나가는 시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어제 입원한 901호 김민숙 환자는 치료 계획이 어떻게 되나?”

회진을 모두 돌고 난 후 이광섭 교수가 물었다.

“팔리페리돈 6mg으로 약물치료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 외래에서 리스페리돈으로 치료하지 않았나? 효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괜찮겠나?”

이광섭 교수가 반문했다.

팔리페리돈은 리스페리돈의 활성 대사물.

장을 통해 흡수된 리스페리돈이 간을 거치면 팔리페리돈으로 활성화된다.

약리학적 특성이 리스페리돈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그 정도로 변화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네. 평소 약물 복용을 불규칙하게 해서 효과가 부족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꾸준히 복용할 수만 있다면 팔리페리돈도 괜찮…….”

“리스페리돈이나 팔리페리돈이나 그게 그거 아닐까? 특별히 이점이 없을 것 같은데. 미세하게 용량 조절하기에는 오히려 리스페리돈이 나을 수도 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지훈이 불쑥 끼어들었다.

평소답지 않게 친절한 말투. 이광섭 교수 앞에서 담당 1년차를 챙기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약리적인 특성은 비슷할지 몰라도 팔리페리돈이 LAI로 처방하기에 더 유리합니다.”

LAI.

장기지속형 주사제(Long-Acting Injection).

한 번의 주사로 약물 효과가 수 주에서 수개월까지 지속되는 제형. 약을 매일 챙겨 먹지 않아도 균일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과거 김민숙은 임의로 약을 끊고 재입원하기를 반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환자 본인과 보호자들의 약에 대한 거부감이 한몫했다.

정길수와 같은 사기꾼은 그런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정신과 약은 해롭고 치료 병력이 주홍 글씨가 될 수도 있으니 자신만의 ‘종교 요법’으로 치료해보자고.

보호자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일종의 ‘공포 마케팅’이었다.

다행히 장기지속형주사제로 바꾼 뒤로 환자는 오랫동안 입원하지 않고 잘 지냈고 보호자의 만족도도 상당히 높았다.

“환자분께서 경구 약물 복용에 거부감이 상당합니다. 일단 월 1회 요법으로 시작하고 향후 3개월에 1번 주사로 유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거 많은 시행착오 끝에 정착한 방법.

시현이 자신감 있게 말했다.

“장기지속형주사제 지속 기간은 1개월이 최대야. 3개월에 1번? 그건 무슨 근거야?”

시현의 설명에 최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아차.’

한 번 주사로 약효가 3개월 동안 유지되는 제품은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다.

“공부를 많이 한 것 같구먼.”

시현이 머뭇거리는 사이 이광섭 교수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최지훈이 이광섭 교수의 말에 한껏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천 선생 말이야. 아직은 1개월 지속이 최대지만 내년에 출시하려고 하는 제형이 3개월에 1번 주사할 수 있도록 나온다고 해. 제약회사 학술팀에 문의한 건가?”

이광섭 교수가 흐뭇하게 웃으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래. Dosing Schedule(약물 투여일정)은 어떻게 되나?”

“이번 주에 경구약으로 내약성을 확인하고, 1주일 간격으로 156mg와 117mg을 각각 로딩한 뒤 한 달 간격으로 주사할 계획입니다. 입원 중에는 부작용 여부를 살펴보면서 면담과 보호자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한 듯한 대답.

이번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진행하도록 합시다.”

딩동!

[system : 김민숙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11/100 -> 38/100]

[퇴원까지 17일 3시간 25분 37초]

이광섭의 허락과 동시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치프는 다른 전달사항 있나?”

“없습니다. 과장님!”

“그럼 오늘 회진은 이만 마칩시다.”

레지던트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시현이 말했다.

“과장님, 추가로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추가 보고? 김민숙 환자는 방금 말한 대로 하면 될 것 같은…….”

“이미 퇴원한 다른 환자 문제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미 퇴원한… 그 이야기라면 따로 듣지. 따라오게.”

시현은 이광섭을 따라 병동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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