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67화 (67/195)

67화 chapter 18. 증언(3)

* * *

다음날 회진.

“어제 입원한 88세 남자 환자분으로…….”

시현은 진철영에게 왕백운 환자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그래, 천 선생은 어떻게 보고 있나?”

“아직은 평가가 더 필요합니다.”

회귀 후 처음으로 해보는 말.

평가가 더 필요하다는 건 결국 아직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다른 선생님들 의견도 들어보고 싶은데.”

시현의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진철영이 다른 레지던트들을 바라보았다.

“고령에 새로 발생한 증상의 경우 치매 가능성도 있습니다. CERAD-K(신경인지검사 도구 중 하나) 검사를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증상이 일중 기복이 심합니다. 섬망 아닐까요?”

“과거 뇌수막종 부분절제술 병력이 있습니다. 사이즈 변화부터 체크하는 것이…….”

한 환자를 두고 이렇게나 다양한 감별 진단이 나오는 경우도 오랜만이다.

“그런데 ‘신기’라고 하면 일종의 Culture-bound syndrome(문화증후군)으로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문화증후군.

다른 문화권에서 보기에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양상의 증상.

3년차 레지던트 권원주가 새로운 의견을 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화를 지속적으로 억눌러 생긴다고 알려진 화병(火病)이나 무속과 관련되어있다고 알려진 신병(神病)이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등제되어 있습니다.”

“좋은 의견이야. 환자가 속한 문화적인 배경을 고려해야지.”

진철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정식 진단으로 들어왔지만, 우리가 자주 접하는 식이장애도 어떻게 보면 날씬한 체형을 선호하는 것에 따른 일종의 문화증후군이라는 의견도 있었지. 왕백운 환자는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가?”

“환자분이 역술원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오 그래? 앞으로 면담을 더 해봐야겠지만, 일단은 약물치료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경과를 살펴보도록 하지.”

환자의 정확한 진단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다행히도 별다른 문책은 없었다. 담당 교수인 진철영 또한 환자 상태를 그리 심각하게 보고 있지 않아 보였다.

* * *

오후 2시 병동 티타임.

“저는 어제 입원한 왕백운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짝짝짝.

병동환자들이 새로 입원한 왕백운을 반겼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지만, 시종일관 편안하게 웃고 있는 탓에 누구도 그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도사님 같아요!”

그를 본 소아 환자 한 명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 말에 왕백운이 짐짓 놀란 척을 했다.

“맞아요. 할아버지는 작은 역술원을 하고 있어요. 척 보고 내 직업을 맞추다니…… 네가 더 도사같구나!”

하하하.

“제가 좀 똑똑하긴 하죠!”

왕백운의 칭찬에 소아 환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사님, 저는 언제나 사업운이 있을까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중년의 남자환자가 왕백운에게 물었다.

“어휴, 그런 걸 공짜로 물어보면 어떡해요? 복채를 내야지!”

그 모습에 다른 환자들이 그를 나무라며 핀잔을 주었다.

“환자들끼리 금전 거래를 할 수 없으니 오늘은 내 특별히 공짜로 봐 줌세.”

“정, 정말요? 감사합니다. 여기 제 생년월일하고 생시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남자는 반색하며 종이쪽지를 건넸다.

한참 동안 낡은 종이 책자를 뒤적이던 왕백운이 입을 열었다.

“허어. 근래에 보기 드문 사주로다…….”

“어떻습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사주가 좋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혹시 최근에 크게 재물을 잃은 적이 있지 않은지?”

“맞습니다! 제가 이번에 인테리어 사기를 크게 당해서…… 불안증이 도져서 입원했다는 거 아닙니까!”

오오오.

왕백운 환자는 이미 병동 환자들 사이에서 진짜 ‘도사님’이 되어있었다.

“도사님, 그래서 다음 사업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제 느낌에는 대박이 날 것 같은데.”

남자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없어…… 사업운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팔자인데. 어찌 이런 일이…….”

“…….”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남자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왕백운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10년 전, 5년 전 그리고 3년 전…… 손대는 일마다 손해를 크게 입어서 이대로는 선산 지키기도 쉽지 않아.”

“…….”

반응을 보니 왕백운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자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인지 귀인이 있어. 재물복을 타고난 귀인이…… 천만다행이야.”

“귀, 귀인이요? 그게 누굽니까?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남자는 금방이라도 병동 문을 박차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멀리 갈 것 없네. 이미 가까이에 있는 것 같으니까.”

“네? 귀인이 어디에…….”

왕백운의 시선이 병동 입구를 향했다.

“승, 승찬이 엄마?”

환자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 사복 차림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병원 반찬이 심심하다고 해서 따로 좀 해왔어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왜 사람들이 다 저를…….”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딴생각하지 말고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만 해. 사업운이 없는 대신 처복이 아주 많으니까. 그럼 운수대통일 걸세.”

와하하하.

테이블에 앉은 환자들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 환자…… 뭐지?’

반면 시현은 마냥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백운에게 사업운을 물은 남편과 반찬을 싸들고 온 그의 아내.

두 사람에 대해서라면 시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 내가 이 인간 때문에 진짜 못살아요! 아무리 말려도 일을 벌리는데…… 이것도 병 아닌가요?

회귀 전 3년차 무렵이었던가. 남자는 아내가 말리는 사업을 무리하게 진행하다 대차게 말아먹고는 불안증이 악화되어 재입원한다.

‘폐쇄병동에 있으면 정말 신기가 돌아오나?’

시현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왕백운을 바라보았다.

“왕백운 님, 저는요? 저는 언제 시집을 가게 되나요??”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한 티타임이 진행되는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환자들 무리에 섞여 있었다.

[권진은 여/29 삼아대병원 정신과 2년차]

‘아니, 권진은 선생님은 왜…….’

“음…… 우리 선생님은 지금 만나는 사람하고 내년 가을에 식 올리면 좋겠어. 어디 보자, 아들이 셋이로구먼! 아주 좋아!”

“에이. 요즘 세상에 누가 아이를 셋이나 낳아요?”

권진은이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왕백운을 보며 말했다.

“허허허. 두고 보시게. 나중에 셋째 낳으면 내 특별히 작명도 공짜로 해드리리다.”

“와하하하.”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병동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조동규의 재판 대한 일도 잠시 잊은 것 같았다.

시현도 홀린 듯 권진은의 옆에 앉았다.

“저도 좀 봐주시겠습니까?”

전에는 없던 상황.

시현은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음력 생일과 생시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음…….”

그는 시현이 건네준 쪽지를 들고 또다시 한문이 빼곡히 적힌 책자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천시현의 관상을 보다가 다시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허허. 참…….”

“왜 그러세요? 우리 천시현 선생은 뭐가 안 좋은가요?”

권진은이 세상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안 좋다고 해야 할지…….”

“괜찮습니다. 말씀해주세요.”

티타임이 즐거워 보여 착석했을 뿐 원래 시현은 명리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천상 의사의 팔자요. 상을 보니 벌써 좋은 업도 많이 쌓은 것 같네만. 이미 환자도 많이 살리고…….”

“어휴, 도사님. 이 친구는 이제 레지던트 1년차인데…… 아직 환자 많이 못 살렸어요. 잘 좀 봐주세요.”

사정을 알 리 없는 권진은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글쎄. 아무튼,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걸. 여기 병동에 있는 젊은 선생님들 중에서는 제일인 것 같은데…….”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레지던트들 중 전문의 시험 직전까지 간 것은 시현뿐이다. 당연히 환자도 제일 많이 봤고.

“에이. 도사님 아까 제가 아들 셋 낳는다고 할 때부터 좀 이상했어요!”

권진은의 표정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래도 사람들을 많이 살리고 좋은 일도 한다니 기분이 좋네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시현의 인사에 왕백운이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상해…… 이립(而立, 서른 살)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지. 그것참…….”

왕백운의 말이 시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니 도사님, 그럼 우리 시현이가 요절이라도 한다는 거예요?”

크게 놀란 권진은이 따져 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허허허.”

공교롭게도 과거의 전문의 시험을 보던 해 천시현의 나이가 딱 서른이었다.

‘예전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기운이 강해서 변화가 무쌍하면 이런 경우가 있어. 대길이 될지 대흉이 될지 아무도 모르지. 지금부터 3년이 아주 중요해.”

“3년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단 강한 기운에는 큰 굿을…… 아니, 그게 아니지. 흠흠.”

몸에 밴 영업 전략이 자동으로 나오려던 중 왕백운은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어갔다.

“기운이 강하니 날파리들이 꼬이는 수가 있어. 그 사람들 조심하고 착실하게 자기 길만을 걷게.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화를 면하기 어려워.”

“에이. 그런 말은 저도 할 수 있어요. 시현아, 들었지? 앞으로 3년간 딴생각하지 말고 환자 열심히 봐야 한다.”

권진은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했으나, 시현의 표정은 자못 진지해졌다. 뻔한 말처럼 들렸지만 왕백운은 지금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철컥.

그때였다.

병동 출입문이 열리고 남녀 한 쌍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누구십니까? 여기는 폐쇄병동이라 사전에 허가받은 분만…….”

정장 차림의 두 사람.

환자 보호자로 보이지는 않는 터라 시현이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아, 저희는 왕백운 선생님의 회사 직원들입니다. 면회는 외래에서 진철영 교수님 허락을 받았습니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시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니, 자네가 여긴 무슨 일로?”

왕백운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묻는데,

“할아버지, 연락은 왜 안 받으세요? 방송국에서 촬영 일정 다시 잡자고 전화 왔다고요!”

같이 온 젊은 여자가 왕백운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허허. 여기 병동에서는 전화를 쓸 수 없다는구나. 병동 규칙인 걸 어떡하니?”

“그리고 갑자기 입원하시는 바람에……. 김 회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반년 전부터 예약했는데 갑자기 취소하는 게 어딨냐고…….”

보아하니 왕백운이 자리를 비우면서 역술원이 발칵 뒤집힌 모양이었다.

“밖에 있었어도 그분들 못 뵈었을 거다. 요즘 ‘신기’가 약해져서 ‘소리’가 잘 안 들리는걸. 다행히 여기 입원하고 나니 좀 나아진 것 같다. 퇴원하고 뵙자고 전해라.”

왕백운이 서둘러 두 사람을 내보냈다.

보통은 폐쇄 병동에 입원하면 답답한 마음에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기를 원하는데, 그는 오히려 이곳이 편한 것 같았다.

“그런데, 도사님 진짜 용한 분이신가 봐요. 방송국에서 촬영도 오고?”

“아까 무슨 회장님도 만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아요. 몇 달 전부터 예약했다고…….”

두 사람의 방문으로 환자들의 관심이 더욱 뜨거워졌다.

“잠깐만…… 혹시 도사님 그분 아니세요? 강남에서 엄청 유명하다던…….”

“맞네! 맞아! 저 TV에서 봤어요! 도사님,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이윽고 몇몇 환자들이 왕백운을 알아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환청이…… 문제가 아니었어.’

예상 밖 상황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수신차단 해제]

그리고는 즉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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