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68화 (68/195)

68화 chapter 18. 증언 (4)

“검사님, 천시현입니다.”

- 아,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다음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싶습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강현욱이 조심스레 물었다. 수화기 너머 그의 놀란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 솔직히 상대측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준비를 너무 잘 해왔어요.

짧은 한숨. 지난 공판 때의 분위기 탓인지 강현욱은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괜히 나섰다가 시현만 곤란한 상황에 놓이지 않을지 모습이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 선생님이 증언해주신다니 저로서는 감사할 일이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검사님 부탁 때문만은 아닙니다. 죄질도 나쁘지만, 정신질환을 가장하는 태도…… 우리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네요.”

-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심기일전해서 다시 잘 해봐야겠군요.

강현욱의 목소리에 아까보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 그리고 공판 전에 몇 가지 확인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 * *

다음 공판 기일.

“검사, 신문하세요.”

“피고인은 정신질환을 이유로 피해자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를 처음 만났을 때도 동일한 증상이 있었습니까?”

“네…… 있었습니다.”

조동규는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유진 씨와 동거 중이었고요?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강현욱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의 있습니다. 본 사건과는 무관한 개인 사생활에 대한 질문입니다.”

“조금 더 듣겠습니다. 검사, 신문 계속하세요.”

다소 벗어난 주제인 듯했지만, 주심판사는 일단 강현욱이 신문을 계속하도록 했다.

“동거인의 말로는 당시 조동규 씨가 환청에 시달린다는 걸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고 하던데요.”

동거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당시 제 모습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고인이 된 피해자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당시 조동규씨의 상태는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때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

“검사의 주관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이번에도 변호인이 나서서 강현욱을 제지했다.

“당시 환자의 의학적 상태는 당시 의무기록과 정신감정 결과를 참고해야 합니다.”

“검사, 사실 위주로 신문해주세요.”

“네, 재판장님. 저 역시 당시 환자 상태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객관적인? 변호사가 눈을 치켜떴다. 검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외의 말에 쌔한 기분이 들었다.

“본 사건에 대한 증인으로 정신과 레지던트 천시현 씨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그 말에 조동규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 * *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

시현은 선서서를 낭독한 뒤 증인석에 앉았다.

“검사 측에서도 정신과 의사를 데려왔어?”

“그 얘긴 지난 공판 때 끝난 것 아닌가?”

“누구지? 되게 어려 보이는데?”

의외의 증인에 변호인석이 술렁였다. 검사 측에서 뭘 준비한 것인지 몰라 긴장한 기색이었다.

두근두근.

불편하기는 시현 또한 마찬가지.

늘 입던 의사 가운 대신 걸친 정장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증인께서 근무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삼아대병원 정신과입니다.”

“피고인이 삼아대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피고인의 병동 담당의를 맡은 바 있고요?”

“네, 그렇습니다.”

시현이 짧게 답변했다.

“본격적인 신문에 앞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의료인에게는 자신이 진료한 환자에 대해 비밀을 유지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출석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시현의 시선이 방청석을 향했다.

울먹이는 얼굴로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 피해자의 부모.

그 뒤로 김민홍과 권진은 그리고 김석용의 얼굴도 보였다.

-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은데. 다른 선생님들도 참관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겠다고 말했을 때, 이광섭이 했던 말이었다.

시현을 말리기는커녕 흔쾌히 허락하며 다른 레지던트들도 가서 볼 것을 주문했다.

‘부담스러운데.’

자신을 응원하는 시선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특히 김민홍은 조동규를 조현병으로 생각해 1년차 초반의 시현에게 배정한 터라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해보자.’

이왕 할 거라면 조동규가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편이 환자의 비밀 운운하는 논란에서 확실히 벗어날 방법이기도 했고.

“비밀 보장은 그 대상이 환자일 때나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저는 조동규 씨가 환자를 가장하고 있을 뿐 실제 환자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아까보다 더 큰 술렁임이 일었다. 이번에는 변호인석뿐 아니라 방청석까지.

“이의 있습니다. 환자가 아니라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의사 한 사람의 지극히 주관적인…….”

변호인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기각합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도 듣고 싶네요. 검사, 신문 계속하세요.”

이번에는 판사도 검사의 손을 들었다.

“네, 재판장님. 증인은 어떤 근거로 피고인이 환자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까?”

“우선 병동에서 보인 피고인의 모습이 일반적인 환자들과는 매우 달랐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습니까?”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강현욱은 시현이 할 말이 몹시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이며 위생상태가 불량한 점은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입원 후 불과 며칠 만에 그런 부분들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혹시 피고인이 약물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까?”

강현욱이 짐짓 조동규의 입장을 대변하듯 신문을 이어나갔다.

“일반적으로 항정신병약물이 효과를 내려면 몇 주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약물에 의한 증상 호전보다는 애초에 그럴만한 증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약물 효과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거군요?”

강현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외적으로 약물에 대한 반응이 빠른 것이 아닐까도 잠깐 고민했었지만, 검사 결과 그 부분도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삼아대병원에서는 어떤 검사를 시행했나요?”

“환자가 복용 중인 약물들에 대한 혈중 농도 검사를 했고, 결과는 해당 약물이 미검출인 것으로 나왔습니다.”

“약물을 전혀 복용하지 않았다는 뜻이군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피고인은 병원에 대한 피해망상이 있어서 병원을 믿지 못해 약을 먹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알고 있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의견도 부탁드립니다.”

“환자는 스스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자의 입원’인 셈이죠. 병원에 대한 피해망상이 있어 독살의 위협을 느꼈다면 그대로 퇴원 요청을 하면 됩니다. 의료법에서는 자의 입원한 환자가 퇴원을 요구할 경우 즉시 퇴원시키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시현의 말을 듣고 보니 조동규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순투성이였다.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변호인, 반대신문 하세요.”

검사의 신문이 끝나고 공은 변호인 측으로 넘어갔다.

‘분위기가 안 좋아.’

변호사가 슬쩍 재판장의 눈치를 살폈다.

기껏 한국대병원 교수까지 섭외해서 유리한 증언들을 많이 확보한 상황인데, 젊은 레지던트 하나가 뜬금없이 나타나 초를 치는 상황이었다.

“증언 잘 들었습니다. 천시현 선생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변호인이 너그러운 미소를 띠며 시현에게 말을 붙였다.

“천시현 선생님께서는 몇 년 차 레지던트이신가요?”

“1년차입니다.”

1년차 레지던트라는 말에 변호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증인 신문이라기보다는 선배 의사가 후배 의사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태도. 호칭도 아예 ‘선생님’이었다.

‘누구 의견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 어디 보자고.’

의료 관련 소송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인 만큼, 같은 환자를 두고 의사들끼리 다른 소견을 내는 경우도 많이 봐왔다.

‘한국대병원 교수를 두고 이런 애송이의 말을 들을 리가.’

같은 조건이라면 크고 공신력 있는 기관의 의견이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

처음 시현의 말을 들었을 때는 감형이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마저 받았지만, 이제 막 의사 생활을 시작한 1년차라는 것을 알고 금새 여유를 찾은 그였다.

“병원 생활 힘드시죠? 레지던트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되었나요? 한창 바쁠 시기인데, 이렇게 따로 시간도 내시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

신문의 방향도 시현의 신빙성을 깎아내리는 쪽으로 잡았다.

“피고인이 삼아대 병원에 입원한 것이 3월입니다. 실례되는 말인 줄은 알지만…… 아직 임상 경험이 많지 않으실 때인데, 조동규 환자는 선생님의 몇 번째 환자였습니까?”

“그건…….”

“곤란한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시기를 생각하면 선생님이 피고인을 진료했을 당시에 경험한 환자 수는 채 10명이 못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지금 변호인은 증인을 인신공격하고 있습니다!”

보다 못한 강현욱이 이의를 제기했다.

“기각합니다. 본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질문으로 생각됩니다.”

“…….”

그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주심판사를 바라보았다.

“비교할만한 ‘전형적인 환자’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데, 다른 환자와 임상 양상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그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피고인이 가짜 환자 행세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측 아닙니까?”

‘낭패다.’

강현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심쩍은 정황들과 조동규를 직접 진료한 의사의 소견이라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상대측 변호사가 만만치 않았다.

경험 많은 대학병원 교수와 신입 레지던트 1년차가 반대 의견을 낸다면? 자신이 판사라도 시현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맞습니다.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환자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위험천만한 일이 맞다니? 의외의 대답에 강현욱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수세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저건 변호사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 아닌가.

“그래서 정신과에서는 환자의 증상을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검사를 합니다. 심리검사와 뇌파검사 그리고 MRI와 같은…….”

“피고인의 경우 방금 증인이 말한 검사들에서 조현병 환자에 부합하는 소견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피고인이 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변호인이 말 허리를 끊고 노골적으로 시현을 몰아세웠다.

이제 예 / 아니오의 대답만이 남은 상황.

사람들의 시선이 시현에게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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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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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이 있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 환자가 아니라는 걸 최근에 배웠습니다.”

등 뒤로 차오르는 후광을 느끼며 시현이 눈을 빛냈다.

“그게 무슨…….”

논리에서 앞서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전혀 기죽지 않은 태도에 변호인은 순간 움찔했다.

“조동규 씨의 경우, 정신과적 진단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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