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69화 (69/195)

69화 chapter 18. 증언 (5)

“조동규 씨의 경우, 정신과적 진단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습니다.”

‘중요한 게 빠져있다고? 그럴리가…….’

변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또한 변호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의사였다.

의뢰인의 의무기록을 여러 차례 확인했고 담당 교수와 따로 면담도 했으나 특별히 미흡한 부분은 없었다.

아니, 없다고 믿고 있었다.

눈앞의 1년차 레지던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진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까지는.

‘느낌이 좋지 않아. 뭔가가 있다.’

명확히 짚이는 부분은 없었지만,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증인은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세요. 설마 몇 주간에 걸친 면밀한 정신감정보다 증인이 며칠 본 소견이 더 정확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일단은 지금의 흐름을 이어가기로 했다.

검증된 전문가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평가했으니 아무래도 더 정확하지 않겠냐는.

제법 설득력 있는 전략이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으면 빈혈을 진단하고, 공복 혈당이 높게 측정되면 내당능 장애나 당뇨로 진단하죠. 조현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든 검사결과가 명확한데 도대체 뭐가 빠져있다는 겁니까?”

“변호인께서는 외과 전문의라고 들었는데, 정신과 진단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뭐요? 그게 무슨…….”

새파랗게 어린 후배에게 뭘 모른다는 평을 다 듣고.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정신과 질환 중에서 가장 흔하고 진단 기준도 간단한 불면증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들기까지 몇 시간 이상이 걸리면 불면증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변호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 또한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할 때 수면제를 처방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1시간인가?”

“아니, 2시간 이상 걸려야 할 것 같은데?”

“하루에 5시간 이하로 자면 불면증 아닌가?”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평소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듯했다.

“몇 시간 이하면 불면증입니까?”

뜻밖의 질문이 판사석에서 나왔다.

증인이 신문 중에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의아하긴 했으나 불쾌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제 막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더니…….’

오히려 저 노회한 변호인을 곤란하게 하는 모습이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증상 측면에서 본다면, 입면이 안되거나 수면 유지가 어려워 짧게 자거나 자고 나도 피로가 회복되지 않아야 합니다.”

시현이 판사석을 향해 대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잠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나 수면 시간만으로는 불면증을 진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진단을 합니까?”

의외의 답변에 판사가 반문했다.

“불면증이 심한 고통을 초래하고 사회적, 직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영역에서의 ‘기능 저하’가 있을 시에만 비로소 진단할 수 있습니다.”

“기능 저하라…… 만약 환자가 4-5시간만 자고도 다음날 피로감 없이 일상생활을 잘 할 수 있다면 불면증으로 진단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매우 드물지만, 4시간 정도의 수면만으로도 건강하게 잘 지내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그분들을 환자로 진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른바 숏 슬리퍼(short sleeper). 선천적으로 수면 시간이 짧아도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겠군요. 그 사람들은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기능이 좋은 사람들이니까. 우리 사법연수원 동기들 중에도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판사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조현병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까?”

“네. 미국정신의학회의 기준에서도 ‘장애의 발병 이래 상당 부분의 시간 동안 업무, 대인관계 혹은 자기 관리 같은 영역에서 기능 수준이 발병 전보다 현저하게 저하될 것’을 Criterion B(진단기준 B항목)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판사의 질문에 대답하며 시현은 강현욱이 서 있는 검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결국, 정신과적 진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상이 초래하는 ‘기능 저하’ 여부입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시현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알아보라고 한 게 이런 의미였어…….’

시현의 말에 강현욱은 번개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증상에 대한 진단 기준인 Criterion A.

그리고 기능 저하에 대한 진단 기준인 Criterion B.

정신과의 모든 진단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할 때에야 비로소 성립할 수 있었다.

* * *

일주일 전.

- 그리고 공판 전에 몇 가지 확인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현은 다음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겠다고 말하며 강현욱에게 추가로 조사했으면 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변호사 수임료를 어떻게 냈는지 알아봐달라니 그건 왜…… 그때 이유진 씨 말로는 조동규 부모가 부담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들여 최고의 변호사들을 선임해줄 정도인데, 재판에 나와보지 않는 게 이상합니다.

‘자식 얼굴을 보러 와볼 법도 한데…….’

그러고 보니 그동안 몇 차례의 공판이 진행되었지만, 조동규의 가족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야.’

만약 부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평범한 회사 다닌다던 사람이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났는지 새삼 의문이 일었었다.

- 그리고 이유진 씨를 따로 만나볼까 합니다. 아마 재판에 도움을 줄 부분들이 더 있을 겁니다.

“그분은 또 왜요? 이번 사건을 최초로 신고한 사람인 데다 조동규가 감형되는 걸 두려워하는 입장인데…… 이미 충분히 협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시현의 말에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면도 더러 있었다.

그밖에도 생산직 노동자로서 조동규의 근태, 본업 외에 따로 하는 일이 있는지 그리고 통장 거래 내역과 같은 전반적인 것들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혹시 건지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의 가족관계서부터 어렸을 때 겪었던 소소한 일들까지 따진다고 들었던 것 같다.

조동규의 질병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보였지만, 증인으로 나서주겠다는데. 강현욱은 일단 시현의 의견을 따라보기로 했다.

* * *

변호인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는 조동규가 호소하는 증상이 조현병의 증상에 부합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증상을 가장한다는 비난을 피해야 했기에 최고의 병원을 선택해 최선의 평가를 진행했다.

다행히 성과도 있었다.

심리검사 소견과 뇌파검사 결과가 조현병 환자들의 패턴과 비슷했던 것.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제는 기능 저하까지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변호인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잠깐만. 직장 동료들에게 부탁해서 진술을 확보하면 되는 일 아닌가? 환청 때문에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는 내용 있으면 될 것 같고. 거기에 지인들을 증인으로…….’

변호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줄 증인들만 섭외하면 되지만 검사는…….’

오히려 불편감 없이 일상생활을 잘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기가 더 힘들다.

의학적으로도 어떤 질환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검사 한 두 가지만 하면 되지만, 건강상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적인 건강검진이 필요하다.

‘훨씬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할 테지.’

아무리 봐도 자신에게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가 안도하는 사이 강현욱이 입을 열었다.

“최근 6개월간 피고인의 근무표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근무표를?’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증거.

변호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피고인이 근무하는 LGS화학은 업계에서는 근무 강도가 높기로 유명한 회사입니다. 3교대 근무에 추가 연장근무도 빈번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여기 근무표 상에서 피고인은 최근 6개월간 단 하루의 결근도 없이 성실하게 출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준비를 이렇게…….’

변호인의 손에 땀을 쥐었다.

“병원 진료를 보기 위해 연가나 병가를 따로 쓴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질병이 있어도 회사에는 알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아,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피식. 강현욱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맺혔다. 이전 공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여유였다.

“조현병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게 무슨 자랑도 아니고…… 주변에서는 충분히 모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 말은 피고인이 환자인 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무 내색하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변호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조절 가능한 수준이라면, 통제되지 않는 증상으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닙니까!”

강현욱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system : 강현욱의 주된 감정은 ‘완전히 신남’입니다.]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했더라면, 저런 알림창이 뜨지 않았을까.

반면 검사를 보는 조동규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직장 생활만 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외 다른 영역에서는 더 평가가 필요합니다.”

“피고인이 차명으로 음식점을 운영했던 사실이 확인됩니다. 이유진 씨가 운영하는 미용실도 실질적인 주인은 피고인이었습니다. 통장 거래 내역을 추가 증거로 제출합니다.”

‘뭐…… 라고?’

평범한 회사원이라던 조동규가 거액의 수임료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긴 했지만, 집안에 여유가 있겠거니 정도로 생각해왔었다.

“피고인과 피해자가 만난 것도 자신이 운영하던 도예 공방에서였습니다. 이 정도의 사업 능력이 있는데 회사에 왜 다니는 건지가 궁금할 정도더군요.”

오히려 검사가 자신의 의뢰인에 대해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듯했다.

몇 차례 공방이 더 오갔지만, 이미 반전된 분위기를 되돌리기에는 궁색한 변명이었다.

“음, 범행 당시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고일을 앞둔 마지막 공판.

주심판사의 말에 변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동규의 표정은 이미 흙빛으로 질려있었다.

* * *

법정 앞 복도.

“증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번 사건은 무사히 마무리된 것 같네요.”

공판이 끝나고 시현과 강현욱이 다시 마주 섰다.

“아직 선고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감형은 없다고 봐도 좋은 상황입니다. 우발적인 범행 후에 구조 활동을 했다는 것도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요.”

강현욱이 안심시키듯 말했다.

“아무튼 깜짝 놀랐습니다. 단순히 증언만 해주실 줄 알았는데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계셨다니…….”

“아닙니다. 검사님께서 잘 준비해주신 덕분이죠.”

일견 쟁점과는 무관한 부분이었을 것들을 꼼꼼하게 챙긴 강현욱의 준비성이 승패를 갈랐다.

“큰 신세를 졌군요.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강현욱이 아쉬운 듯 작별인사를 하려는 찰나.

“그럼 작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시현이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