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chapter 19. 아이템 (1)
* * *
9병동 회의실.
“김민숙 환자는 좀 어때요?”
이광섭이 레지던트들에게 담당 환자들의 상태를 보고받고 있었다.
“팔리페리돈 117mg로 주사하고 경과 관찰 중입니다. 현재까지 부작용 관찰되지 않고 있습니다. 금일 평가한 PANSS score는…….”
김민숙이 입원한 지도 2주가 지났다.
[system :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HD#10 치료 진척도 60/100 -> 64/100]
[HD#11 치료 진척도 64/100 -> 70/100]
……
……
[HD#14 치료 진척도 81/100 -> 89/100]
치료를 방해하던 요인을 제거한 탓이었을까.
환자의 치료 진척도는 꾸준히 올랐고 어느덧 퇴원을 저울질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환자는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보호자 교육에도 신경을 쓰도록 합시다.”
‘그땐 왜 몰랐을까.’
보호자 면담에 신경을 써라.
으레 하는 말이라 무심코 넘겼던 말이 다시 보니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실제로 과거 김민숙의 경과가 좋지 못했던 것은 보호자들의 영향도 컸으니까.
“네, 과장님. 오후에 면담 예정되어 있습니다.”
“참, 법원에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천시현 선생이 적절하게 증언을 잘한 것 같습니다. 마침 담당 검사도 거기에 맞는 증거를 준비했더라고요.”
“증언에 맞는 증거라면?”
김민홍이 법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보고를 듣는 내내 이광섭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Criterion B라…… 증상 외적인 부분으로 접근했다는 거군요. 잘하고 왔다니 다행입니다.”
시현이 증언을 하겠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걱정이 앞섰는데, 들어보니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온 것 같았다.
‘김상진 교수 얼굴이 볼만하겠군.’
이광섭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얼마 전 PGR에서 시현이 코멘트한 내용까지 알았다면 함박웃음을 지었을 테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모르던 그였다.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 외래에서 환자를 입원시킬 때 조금 더 신중했으면 합니다.”
“네 과장님. 유의하겠습니다.”
김민홍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커피 한잔하자. 내가 살게!”
회진이 끝나자 김민홍이 멋쩍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 또한 외래에서 조동규를 진료했던 의사.
아무것도 모른 채 자칫 범죄자에게 유리한 진술을 할 뻔한 상황이었다.
‘의국에 복덩이가 들어왔어.’
마음 같아서는 소고기라도 사주고 싶은 심정의 김민홍이었다.
* * *
김민홍이 산 커피를 들고 병동으로 돌아오자 마침 병동에서도 티타임이 한창이었다.
“도사님! 저도 좀 봐주세요!”
“도사님 저는요?”
역시나 오늘도 왕백운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피곤할 법도 한데 그는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다른 환자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담당의인 시현 또한 왕백운과 면담하기 위해 줄을 서야 할 것 같은 기분.
‘한번 가서 들어볼까?’
회귀 전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왕백운의 말은 꽤나 신뢰할 만했다.
자신이 알던 환자의 경과와 비슷한 말들을 환자들에게 해주고 있었던 것.
“오, 우리 젊은 의사 선생님 오셨구먼.”
시현이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자 왕백운이 그를 반기며 말했다.
“왕백운 님, 오늘은 기분이 어떠세요?”
“좋습니다. 다른 분들이랑 이렇게 대화도 나누고 기분이 아주 좋아요.”
[치료 진척도 89/100]
‘이렇게나 올랐다고?’
시현이 보기에는 입원 첫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증상 변화가 없는 것 같았는데 치료 진척도가 오르는 건 좀 신기했다.
환청이 들린다고는 했지만, 증상으로 보기에는 뭔가 애매한 양상.
애초에 입원한 동기부터가 불분명했다.
“처음 뵈었을 때나 지금이나 둘 다 좋아 보이시는데요. 병동 환경이 답답하지는 않으세요?”
“아, 그렇지 않아요.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탁한 기운 때문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많이 맑아진 것 같다니까. 허허허.”
도대체 뭐가 좋아졌다는 건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왕백운이 말을 이었다.
“이곳만큼 사람들의 기운이 변화무쌍한 곳도 드물어요. 저기 저쪽에 앉은 처자는 여기 와서 복운(復運)을 한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김민숙 환자가 앉아있었다.
“복운…… 이요?”
처음 듣는 의학용어라도 접한 기분.
시현이 되물었다.
“제 운이 돌아왔다는 말이지. 며칠 새에 완전히 달라졌어. 귀인이라도 만난 것인가…….”
“그렇게 보이십니까?”
“처음에 보니까 귀신 셋을 업고 있더라고. 잘못하면 폐인이 될 것 같더니만 지금은 다 털어내고 홀가분해 보여.”
‘많이 좋아지긴 했지.’
과거와 확실히 달라진 경과.
처음 입원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또래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저 처자가 퇴원할 무렵에 나도 같이 나갈 것 같구먼.”
“…….”
[치료 진척도 89/100]
[치료 진척도 89/100]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치료 진척도가 정확히 같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직관? 예지? 그도 아니면 통찰?
신기할 정도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잘 맞추는 능력을 뭐라고 기술해야 할지 난감하던 찰나.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밖에서 하던 일이 도무지 손에 안 잡혀서 입원한 환자가 이제 좀 나아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된 거지.”
시현의 고민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왕백운이 말했다.
“세상에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한 게 있을까? 허허허.”
“그렇…… 군요.”
역술원을 운영하면서 큰 성공을 거둔 그였다.
운세니 기운이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뿐이었지만, 인지기능이 약해졌던 환자가 직업적 능력을 회복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보통 사람들과 뭔가 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결국, 치료라는 건 환자가 생계를 유지하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Vortioxetine 10mg HS]
그러고 보니 왕백운이 복용하고 있던 약물은 인지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제약회사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제품이었다.
“젊은 의사 선생님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네요.”
“열심히? 무엇을 위해서?”
왕백운이 물었다. 과거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던 질문이었다.
“그야 일단은 전문의가 되는 게 우선 아닐까요? 레지던트니까요.”
“허허허. 누가 들으면 전문의가 못돼서 한이 맺힌 사람 같구먼.”
시현이 속으로 뜨끔 했다.
시험을 하루 앞두고 사고를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잘나가는 역술인이라더니 족집게네.’
“혹시 돈 때문이라면 의사 말고도 길은 아주 많아. 혹시 우리 역술원에서 한 번 일해볼 생각은 없는가?”
“역술원…… 이요?”
간혹 환자들 가운데 시현이 마음에 든다며 조카를 소개해 주겠다는 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취업 제안은 또 처음이었다.
“천 선생님은 기운이 아주 좋으니 명리학 공부를 하면 틀림없이 큰 부자가 될 거야!”
다음 순간 시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방법이!!!’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카이트만의 안경’과 알림창을 활용하면 용한 도사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환자와 밖에서 보는 건 좀…….’
과거에도 환자와 사적으로 만나는 일은 극도로 경계하던 시현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정신과 공부하기도 바빠서 다른 공부하기는 어렵습니다.”
짧게 망설이다 시현이 입을 열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우리 선생님은 돈이 중요한 사람은 아닌 듯하구먼…… 뭔가 집념이 있어 보인단 말이지.”
왕백운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공부만 하지 말고 세상 물정도 좀 배우고 해야 해.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는 마케팅 전략 같은 것들도 연구해 둬야 한단 말일세.”
“아, 네…….”
마케팅이라니. 전형적인 도인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아, 그리고 이거 받아두시게나.”
왕백운이 종이 상자 예닐곱 개가 든 쇼핑백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특별히 신경 써서 고급스럽게 만들어달라고 했으니 잘들 쓰시오. 병동에 두고 쓰면 좋겠구먼. 허허허.”
“잠시만요.”
호의로 주는 것 같기는 했으나 고가의 물건이라면 받기가 곤란했다. 재빨리 상자를 열어본 시현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병동 선생님들하고 나눠서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현이 왕백운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
백운역술원
- 사주, 풍수, 택일, 작명, 부동산 컨설팅 -
☎ 02-XXXX-XXXX
-----
“…….”
시현의 손에는 역술원 로고가 새겨진 텀블러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 * *
“선생님, 이거 왕백운 님이 주셨어요.”
“뭔데? 오, 텀블러! 수선생님이 종이컵 너무 많이 쓰지 말라고 했는데 잘됐다!”
스테이션에 앉아 차트를 쓰고 있던 김석용이 반색하며 말했다.
“헷갈리지 않게 이름을…….”
딩동!
[system : 신규 아이템이 등재되었습니다.]
다음 순간 김석용이 들고 있던 텀블러가 희미하게 빛났다.
정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뭐지?’
시현은 새로 뜬 알림창을 열어보았다.
-----
[레지던트 김석용의 텀블러]
- 강남도인 왕백운이 주문 제작한 판촉용 텀블러
- 높은 내구도로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 보온력이 뛰어나 커피믹스의 풍미가 향상됩니다.
-----
텀블러에 간략한 설명이 붙어있었다. 별다른 동요가 없는 걸 보면 여전히 김석용에게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실제 물건이 아이템 판정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레지던트들 모두 커피를 달고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다들 개인 머그컵이나 텀블러 하나씩은 다들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이름을 적어서인가?’
알림창이 떠오른 것은 김석용이 이니셜을 쓰고 난 직후였다.
시현은 텀블러 하나를 꺼내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니셜을 쓰기 시작했다.
CSH.
딩동!
[system : 신규 아이템이 등재되었습니다.]
예상대로 시현의 텀블러도 아이템 판정을 받았다.
-----
[레지던트 천시현의 텀블러]
- 강남도인 왕백운이 주문 제작한 판촉용 텀블러
- 높은 내구도로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 보온력이 뛰어나 커피믹스의 풍미가 향상됩니다.
- 정신과적 진단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
‘양산형 제품이라 그런지 김석용 선생님 텀블러와 별다른 차이는 없…….’
하지만 마지막 줄이 달랐다.
- 정신과적 진단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습니다.
어쩌면 아침에 커피를 타 마실 때마다 떠오를지도 모를 말.
그런 장면들이 겹쳐지기에 환자가 퇴원하면서 준 선물들은 항상 기억에 오래 남곤 했다.
시현이 알림창을 둘러보는 사이.
“선생님, 저희 부모님 오셨어요.”
“아, 보호자님 오셨습니까.”
벌써 약속한 면담시간.
김민숙 환자와 보호자들이 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