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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72화 (72/195)

72화 chapter 19. 아이템 (3)

“선생님, 저희가 너무 감사해서 보답을 좀 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손사래 치는 시현을 향해 김민숙 환자의 아버지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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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김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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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한 번 식사하러 오십시오. 맛있는 고기 대접하겠습니다.”

“환자분께서 호전되셔서 저도 기쁩니다.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사기꾼한테 속아서 못 돌려받았을 돈만 해도 얼만데…… 그러지 마시고 여자친구 분과 꼭 한번 들려주세요.”

“…….”

‘그건 더더욱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로 난처한 시현이었다.

시현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보호자는 돌연 뭔가 깨달았다는 듯 명함에 글씨를 끄적였다.

[50% 할인 / 단체]

“혼자 오기 부담스러우시면 나중에 회식하실 때 찾아주세요. 선생님과 같이 오신 병원 선생님들께는 전부 반값으로 드리겠습니다.”

“네, 기회가 된다면 꼭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긴 뭣하지만, 고기 하나는 서울 시내에서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 정치인분들 단골도 많아요.”

시현이 조심스럽게 명함을 받아들었다.

더 이상 거절하기도 어렵고 할인권이야 받고 나서 안 가면 그만이니 특별히 보호자에게 부담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보호자들이 환자들 데리고 면담실을 나서자.

딩동!

알림음과 함께 전에 봤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system : 신규 아이템이 등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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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환자가 임의로 치료를 중단하거나 재입원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시현은 한참 동안 보호자가 주고 간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 * *

3개월 후.

“추석 연휴 때 당직 어떻게 할지 결정해서 알려줘. 이번 연휴 좀 기니까 병동 환자들도 특별히 신경 쓰고.”

회진이 끝나자 김민홍이 시현과 황진호를 보며 말했다.

“시현아, 추석 전날만 부탁할게. 추석 당일부터는 쭉 내가 서고.”

“어? 연당(연속 당직)이 너무 긴데?”

하루만 빼고 나머지를 다 자기가 서겠다는 말.

황진호의 제안에 시현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도 지난번에 다쳤을 때 네가 해준 거에 비하면…….”

“그건 수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잖아. 3일 연속은 좀 버거울 것 같다. 적당히 나눠서…….”

“아냐. 술 먹고 굴러서 다친 건데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어떻게든 시현에게 빚진 것을 갚으려는 그였다.

“그래. 일단 그렇게 알고 있을게. 변동사항 생기면 연락 주고.”

김민홍은 수첩에 황진호가 말한 당직 일정을 그대로 옮겨 적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이제 1년차도 거의 끝나가는데 뭘. 걱정하지 말라고!”

시현을 의식한 탓인지 황진호는 일부러 센 척을 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일정이 남아있다고.”

옆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김석용이 말했다.

“제일 중요한 일이요?”

“그래. 지금쯤이면 인턴들이 어플라이(지원) 과 정하는 시기잖아. 내년에 어떤 애들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1년이 달라진다?”

“우리처럼 아랫년차를 잘 뽑아야 너희도 고생을 안 해.”

권진은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신규 레지던트를 뽑는 게 1년차의 권한은 아니긴 했지만.

이광섭 과장을 비롯한 다른 교수들도 1년차들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인턴들이 일하는 것을 직접 지켜본 사람들이 현 1년차 아니던가.

“원외 지원자는 아무래도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까 원내 지원자 위주로 파악하면 되겠네.”

순혈주의 탓에 모교 졸업에 원내 인턴을 거친 지원자들에 대한 선호가 높았다.

그렇게 보면 한국대 출신의 채이진이 내과에 지원하여 합격한 것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올해는 누가 유력한 것 같아?”

“음…… 아마도 김원기, 노민혜 그리고 설현수 정도 아닐까요?”

황진호가 잠깐 위를 올려다보는 듯하더니 어렵지 않게 답했다.

‘설…… 현수?’

의외의 이름.

시현이 멈칫했다.

“설현수 선생이 우리 과 어플라이였어?”

“인턴장이 동아리 후배라 물어봤더니 그렇다던데? 아마 맞을 거야.”

회귀 전에는 정신과에 지원하지 않았던 인턴이었다.

[system : 인턴 설현수가 정신과에 호감을 보입니다. 향후 정신과에 지원할 확률이 상승합니다.]

과거 응급실에서 봤던 알림창이 뇌리를 스쳤다.

‘김원기와 설현수가 경쟁하게 된 건가?’

셋 중 노민혜는 1등 졸업에 전공의 선발시험 점수도 압도적이어서 무난하게 합격할 예정이다.

변수는 나머지 두 명의 남자 인턴들이었다.

‘원기를 돕고 싶지만…….’

김원기는 회귀 전 시현의 1년 후배로 3년간 의국 생활을 같이했던 인물.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근무 태도를 보면 두 사람 모두 A등급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과거에 인연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쪽 편을 드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설현수 선생은…….’

- 현수? 일 잘하지. 쓸만한 녀석이야.

회귀 전에는 흉부외과를 선택했던 설현수를 두고 한준식이 종종 하곤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큰 수술 위주인 흉부외과와 정적인 상담이 위주인 정신과.

같은 의사라는 것 외에 두 과 사이에는 돌고래와 우주선 만큼의 공통점도 없다고 봐도 좋았다.

설현수가 정신과에 마음을 돌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위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응급실이었다.

“정신과 시현입니다.”

- ER 인턴 설현수입니다. 노티 드리겠습니다. 환자는……

‘얘도 양반은 못되네.’

“설현수야? 환자보다 그 친구 평가를 더 잘해봐.”

“네, 선생님.”

시현은 곧바로 응급실을 향했다.

* * *

“29세 여자환자이고 1시간 전부터 시작된 불안과 두근거림으로 오셨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설현수가 환자 상태에 대해 보고했다.

[이정미 여/29 인턴 설현수 / R1 천시현]

‘또 오셨네.’

공황 증상으로 응급실에 자주 오던 익숙한 환자였다.

“환자분 불안이 심해서 일단 수액부터 달아뒀습니다.”

“수고했어요. 제가 볼 테니까 다른 환자 보고 계세요.”

최근에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기에 굳이 인턴에게 더 물어볼 것은 없었다.

“괜찮으시다면 선생님 환자 보시는 거 참관해도 될까요?”

의외의 반응.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 초진 환자가 잠깐 끊겨서요.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설현수가 난처한 듯 얼버무렸다.

‘환자에 관심이 많은 건가? 관심 있는 척을 하는 건가?’

“환자가 호소하는 불안은 어떤 양상이던가요?”

시현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불안으로 Paroxysmal anxiety(발작적 불안)에 해당합니다.”

일단은 정답.

“그렇군요. 선생님이 보기에 진단은 뭐 같아요?”

“반복적인 불안발작이 주된 문제이고 증상이 발생하는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는 ‘광장공포증을 동반한 공황장애’로 생각됩니다.”

‘진단도 괜찮고.’

최신 진단체계에서는 공황장애와 광장공포증을 따로 생각하지만, 구판 기준으로는 정답이다.

단순히 윗년차에게 잘 보이려고 환자에 관심 있는 척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환자분만 괜찮다고 하시면 같이 보시죠.”

“네, 감사합니다.”

시현은 설현수와 함께 응급 환자 면담실로 들어갔다.

* * *

“이정미님 안녕하세요?”

“아, 선생님.”

환자는 바퀴 달린 수액 거치대를 잡고 면담실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지금은 좀 어떠세요?”

“응급실 막 들어올 때보다 낫긴 한데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요. 후우. 후우.”

환자는 대답하면서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설현수 선생님, 바리움(항불안제의 일종) 1앰플 준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미리 확보된 수액 라인으로 바리움을 주사하자 환자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요즘 너무 힘들어요. 미치겠어요.”

“최근에 어떤 스트레스가 있으신가요?”

“남자친구 때문에요…… 이번엔 좀 심각해요.”

환자가 눈물을 글썽였다.

‘또 그 사람 때문인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돈 문제로 환자 속깨나 썩이던 인간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관계가 끝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지경.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같이 안 오셨네요?”

“네, 며칠째 연락이 안 돼요.”

환자는 휴대폰을 열어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남자친구로서 너에게 짐만 되는 것 같다. 네 돈 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을게. 미안해. 진심이야.]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남자는 답이 없었다.

‘아니, 이건 돈 갚기 싫어서 잠수탄 거잖아.’

시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열이 나고 혈압이 오를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저희 진짜로 헤어질지도 몰라요. 어떡하면 좋죠?”

“......”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환자가 어떻게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

‘돈은 나중에 갚아도 되니까 일단 만나자고 하겠지.’

그리고 그 결과까지도.

환자는 시현이 3년차가 될 때까지도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다.

‘결국은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서 떠났지.’

통장에는 그를 대신해 떠안은 수천만 원의 빚만 남을 예정이다.

“남자친구분이 혹시 주식투자를 하시나요?”

“헉, 그걸 어떻게?”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 표정으로 환자가 되물었다.

“그쪽으로 좀 빠져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전에는 꽤 수익도 많이 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수익을 봤다고 빚을 좀 갚던가요?”

“그건…….”

“돈을 더 빌려주거나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은 안 됩니다.”

회귀 전의 환자가 돈을 되돌려받지 못한 이유.

수익을 내면 남친이 갖고 손실을 보면 환자를 대신해 투자해준 거라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혹시 오빠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환자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등질 듯한 메시지를 남겨놓고 연락 두절이니 걱정할 수밖에.

‘공황 발작이 문제가 아니야.’

극도의 불안감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 뿌리에는 분리 불안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정신치료를 받아보시는 게 어떠세요?”

예전 같으면 선배 레지던트에게 정신치료를 의뢰하는 것이 껄끄러웠겠지만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어떤 식의 치료가 도움이 되고 누가 적임자인지.

불안이 높은 환자에게는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어 줄 의사가 필요하다.

“정신치료요?”

“외래에서 매주 상담을 하는 겁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선생님 한 분 하고요.”

증상이 있을 때마다 응급실에서 안정제를 주고 돌려보내는 것 만으론 한계가 있다.

“제 담당 의사가 생기는 건가요?”

“네, 적당한 선생님이 있는지 찾아보고 따로 연락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환자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았다.

* * *

“수액 다 맞고 퇴실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면담실을 나오자 시현이 말했다.

“네, 선생님. 환자는 혹시 공황장애가 아닌 건가요?”

설현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글쎄요.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보이는 증상은 공황장애 같은데 심리적으로는 뭔가 복잡한 것 같네요.”

“우리 과 질환들이 대체로 그렇죠. 불안장애 환자가 백 명이면 사연도 백 가지니까.”

“아, 네…….”

설현수의 얼굴에 망설임이 스쳤다.

‘설현수는 무슨 생각인 걸까?’

[SORA : ‘카이트만의 안경’ 사용을 추천합니다.]

회귀 전과 가장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인턴 중 한 사람.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단순히 지원과를 바꾼 것이지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좋아.’

[system :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다음 순간 시현의 눈동자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선생님, 이번에 우리 과 지원하신다면서요? 전부터 생각이 있었어요?”

“아, 네. 학생 때부터 관심이 있었습니다.”

[system : 인턴 설현수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뭐, 전에 관심 없었다고 말하기도 그렇지.’

입사 면접에서 면접자 대부분이 회사에 전부터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하지만, 실은 면접 전날 회사 홈페이지 보면서 준비하는 경우가 태반인 경우와 같았다.

“그렇군요. 어떤 면이 마음에 드세요?”

“아, 그건…….”

설현수가 대답하려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인턴 선생님, 초진 봐주세요. 흉통 환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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