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chapter 20. 가슴이 시켜서 (2)
“시현아, 오늘 오프지? 같이 밥이나 먹을까?”
한준식이 흘끗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인턴 선생님도 교대하고 같이 갈래요?”
마침 나이트 번 인턴들이 응급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네, 시간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야, 지원자라고 미리 챙기는 것 보게. 밥은 정신과에서 사는 거로?”
한준식이 이죽거렸다.
설현수는 서둘러 환자를 인계한 뒤 시현과 한준식을 따라 응급실을 나섰다.
* * *
“사장님, 여기 삼겹살 2인분 추가요!”
한준식이 짓궂은 표정으로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시현아, 이정도는 살 수 있지?”
“…….”
“올해 보니까 A턴(A등급을 받은 인턴)들이 정신과 많이 쓰던데. 여기 설현수 선생님도 그렇고…… 부러우면 지는 거긴 한데 진짜 부럽다.”
뜨끔.
‘왜 흉부외과 안 쓰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원래라면 흉부외과로 가야 할 사람을 빼돌린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삼겹살 나왔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음식이 세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저, 사장님. 이거 2인분 맞나요? 잘못 나온 것 같은데요.”
한 눈에도 4인분쯤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삼아대병원 선생님들이시죠? 제가 올해 초에 거기 흉부외과에서 수술받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오늘 고기가 좋으니까 많이들 드세요.”
식당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우와. 한준식 선생님 잘 먹겠습니다.”
“에이, 시현이가 사는 건데 천시현 선생님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한준식이 손사래를 쳤다.
“4월 초였던가? 여기 사장님이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셔서 외상성 기흉에 심근 파열까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내가 집도한 건 아니지만 내가 다 뿌듯하네.”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엄청 당황스러웠겠는데요?”
“어휴 말도 마. 집에 계시던 교수님 바로 달려 나오시고 장난 아니었지.”
또다시 설현수의 눈이 빛났다.
딩동!
[system : 인턴 설현수의 주된 감정은 ‘흥미진진함’입니다.]
“진짜 대단한 건 시현이야. 병동에 Cardiac tamponade(심낭 압전) 있었던 환자 블라인드로 찔러서 살려내고…… 진짜 흉부외과를 해야 하는 건 이 녀석인데. 너, 어쩌다가 정신과를 한 거냐?”
한준식이 시현을 끌어당겼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기 아랫년차로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두 분 말씀 들어보니 저는 아직 먼 것 같습니다.”
다음 순간 설현수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system : 인턴 설현수의 주된 감정은 ‘자책’입니다.]
‘왜지?’
환자를 볼 때 약간 긴장한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충분히 괜찮은 인턴이었다.
스스로를 탓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였다.
“아직 멀긴요. 선생님 정도면 응급실 에이스죠.”
“맞아요. 환자 걱정된다고 3년차한테 그것도 남혜미한테 그렇게 할 말 다 하는 거 아무나 못 하는 겁니다.”
두 사람의 격려에도 설현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흉통 환자를 처음 봤을 때 표정이 공포였어.’
다음 순간 시현의 뇌리에 응급실에서 본 알림창이 스쳤다.
‘혹시?’
의사에게 자책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상황.
잊었던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최근에 본 환자 중에 잘못된 분이 계신가요?”
“네? 그걸 어떻게…….”
시현이 질문에 설현수의 눈이 커졌다.
“그런 경험 없는 의사도 있던가요? 말해봐요. 무슨 일인지.”
“그게… 얼마 전에 병원 밖에서 사고가 있었는데요…….”
술이 몇 순배 더 돌고.
설현수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3개월 전.
“오빠, 인턴 되더니 나한테 너무한 거 아냐? 이게 얼마 만이야?”
“미안. 동기 스케쥴 좀 바꿔주느라고…….”
정신과 1년차가 정형외과에 입원하면서 정신과와 피부과를 커버하는 인턴 일정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친구만 중요하고 나는 안 중요하다 이거지?”
“아냐, 그럴 리가! 대신 오늘은 공연 보고 맛있는 거 먹자!”
오랜만의 데이트.
설현수는 여자친구와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설현수가 가리킨 곳에 불편한 표정으로 거친 숨을 내쉬는 중년 남성이 가로수를 붙잡고 서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걸어 올라오신 건가?’
심폐기능이 떨어진 경우라면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일시적인 호흡 곤란이 올 수 있다.
“오빠는 밖에 나와서까지 환자만 보이는 거야? 더워서 잠깐 쉬시는 거 아닐까?”
“그, 그런가?”
“어서 가자. 공연 늦겠어!”
여자친구의 성화에 중년 남성을 지나쳤으나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득 뒤를 돌아본 순간.
휘청.
주저앉듯 옆으로 쓰러진 중년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방금 그분 쓰러지셨어! 가봐야 할 것 같아.”
쓰러진 환자 곁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행인 몇몇이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웅성웅성.
“아저씨! 정신 차려보세요. 괜찮으세요?”
젊은 청년 한 명이 환자 곁에 앉아 어깨를 흔들어 보았으나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빠, 그냥 가자. 도와주실 분들 많은데 굳이…….”
여자친구가 걱정스럽게 설현수의 소매 끝을 잡아끌었다.
끄어어- 꺼어어-
‘저건!!!’
숨을 쉬는 것인지 신음하는 것인지 모호한 비정상적인 호흡.
그 소리에 설현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정지 호흡 이잖아?’
심정지 호흡(Agonal respiration).
일견 숨을 쉬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유의 헐떡거림만 있을 뿐, 실제로는 적절한 호흡이 이뤄지지 않는 상태.
환자의 심장이 멈췄음을 의미했다.
이내 환자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환자 반듯하게 눕혀주세요!”
설현수는 여자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들었다.
“심정지입니다! 거기 가죽 재킷 입으신 분! 119 불러주세요!”
“아, 네!”
명확한 대상을 지정하여 구호 요청을 했고.
“지선이 너는 근처에 AED(자동제세동기) 있는지 얼른 찾아봐!”
“어? 어…….”
최대한 빠른 제세동을 위해 AED를 찾도록 했다.
하나. 둘. 셋. 넷.
원내에서 수도 없이 들어온 코드블루 덕이었을까.
설현수는 기계적으로 흉부 압박을 시작했다.
그러기를 8분.
교대해 줄 동기 인턴들이 없어 힘은 달렸지만, 나무랄 것 없는 처치였다.
‘AED는 아직인가.’
삐오– 삐오-
번쩍거리는 경광등과 함께 구급차가 도착했다.
“의사신가요? 가까운 응급실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십니까?”
걱정 반 원망 반으로 바라보는 여자친구를 뒤로한 채 설현수는 구급차에 올랐다.
* * *
“그래서? 그 환자는 살았나요?”
설현수가 말한 상황에 과몰입했는지 한준식이 다그치듯 물었다.
“일단 우리 병원 응급실로 가셨고 제세동한 뒤에 맥박이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혼자서 BLS(기본심폐소생술) 만으로 환자를 살린 거잖아요?”
그러나 한준식의 칭찬에도 설현수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온전히 회복했다면 자책과 공포를 느낄 리 없지.’
결과가 좋았다면야 도리어 평생 자신감을 북돋아 줄 사건으로 기억될 일.
하지만 그간 설현수가 보인 반응을 보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 후로는 별일 없었나요?”
시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고 보니 환자가 심근경색 과거력도 있었고 심장 기능이 좋지 못했더라고요. 중환자실에 오래 계셨는데 입원 중에 폐렴도 생기고 아직도 퇴원을 못 하셨습니다.”
“저런! 그래도 너무 자책은 마세요. 일단 환자 살았잖아요.”
“맞아요. 기저 질환 때문에 예후가 안 좋았던 거지 선생님 탓이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보호자는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설현수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흉부 압박을 하면서 갈비뼈 골절이 다발성으로 생겼고 기흉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산소 상태가 길어지다 보니 뇌손상도 의심되고요. 어쩌면 얼마 못가서…….”
“아니,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유효한 압박을 제공하려면 분당 100회 이상으로 흉곽이 최소 5cm 이상 깊게 들어가도록 눌러야 하는데, 갈비뼈가 멀쩡할 수가 없죠!”
한준식의 말처럼 흉부 압박을 제대로 했다면 골절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했다.
오히려 갈비뼈 골절이 없을 정도로만 압박을 했다면 환자가 죽을 수도 있던 상황.
“집에서 나갈 때까지만 해도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나갔다면서…… 심폐소생술이 필요 없는 환자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하더군요.”
“무슨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보도 아니고! 보호자들 너무 진상 아닌가요?”
그의 말에 한준식이 울분을 터트렸다.
“생명이 위급한 응급상황이었어요. 특별히 선생님 과실은 없어 보이는데 과연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시현이 물었다.
“맞아. ‘선한 사마리안 법’이 있는데 괜찮지 않을까?”
선한 사마리안 법.
생명이 위급한 환자에게 응급처치를 제공하다가 발생한 손해에 대해 행위자의 책임을 경감하는 법률로 이 시점에도 이미 개정되어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현의 예상과 달랐다.
“그게…… 환자가 상해를 입은 수준이면 책임이 없는 게 맞지만, 혹시라도 사망하게 되면 또 다른가 보더라고요.”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을 ‘감면’해주기는 하지만 ‘면제’는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아니, 그럼 죽어가는 사람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밖에 안 되잖아요?”
“네. 지금 마음 같으면 그 환자……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쳤을 것 같습니다. 여자친구 말을 들을 걸 그랬어요.”
설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AED 구해오는 걸 다른 사람에게 시켰으면 어땠을까요? 마침 여자친구는 힐을 신고 있어서 걸음이 느렸을 텐데…… 제세동을 빨리해서 그만큼 압박 횟수를 줄였다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가 쉬운 게 아니죠.”
“차라리 지하철역으로 뛰어가라고 바로 이야기만 했어도…… 저는 바이탈과(환자의 생명과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과) 할 자신이 없습니다.”
눈앞에 놓인 4인분 같은 2인분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더없이 서글퍼 보였다.
[system : 인턴 설현수의 주된 감정은 ‘자책’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거였어.’
회귀 전과는 달리 정신과를 선택한 이유.
보호자의 터무니없는 요구, 그리고 설현수의 자책하는 성향이 절묘하게 겹친 결과물이었다.
* * *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설현수 선생은 바이탈 쪽으로는 관심이 아주 싹 가셨겠어.”
한준식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마음고생 세게 하네.”
“좀 적응됐다 싶다가도 수시로 도망가고 싶은 게 우리 관데 하겠다는 인턴이 있겠어? 나도 흉부외과 선택한 거 후회막급이다.”
[system : 레지던트 한준식이 거짓을 말합니다. (99.9%)]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시현이 씩 웃었다.
“그래도 뭐, 보람은 있어. 큰 수술하고 환자 살렸을 때…… 우리 과 특유의 감성이 있달까?”
[system : 레지던트 한준식이 진실을 말합니다. (99.9%)]
말로는 매번 힘들고 비전도 없는 과 택했다고 툴툴거렸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괜찮은 인턴이었는데 아쉽네. 흉부외과에는 관심 1도 없겠지?”
“아마도?”
인턴도 이미 후반기로 접어들었다. 몇 달 사이에 심경 변화가 생기기란 어려워 보였다.
‘특별한 계기가 아니고는 힘들겠지.’
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계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두 사람은 병원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