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75화 (75/195)

75화 chapter 20. 가슴이 시켜서 (3)

* * *

일주일 뒤, 삼아대병원 1층 법무팀.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어요. 입원한 지가 벌써 석 달인데!”

소파에 걸터앉은 중년 여인이 소리를 꽥 질렀다.

“안타까운 사정은 이해합니다만, 아무리 심폐소생술을 잘해도 뇌로 산소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매번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법무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언성을 더 높였다.

“갈비뼈가 5대나 부러졌어요. 사람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떡하냐고요! 심폐소생술이 그렇게 위험한 거면 사인이라도 받았어야죠!”

“아니,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계신 데 어떻게 사인을 받습니까?”

“확실히 못 살릴 거면 헤매다 차라리 죽게 놔두지 왜 숨을 붙여놨어요? 치료비가 한두 푼도 아니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설현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환자분이 하루빨리 돌아오실 수 있도록, 병원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내 법무팀장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말로만 최선 최선 하지 말고 책임을 지시라고요. 보상이라도 해주던가요.”

“…….”

“심폐소생술 합병증 때문에 생긴 추가 치료비하고…… 저런 모습 보는 우리도 괴로우니 위자료도요.”

“저, 보호자님. 해당 사고가 병원 내에서 생긴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말이 통하지 않는 보호자의 반응에 법무팀장은 말문이 막혔다.

“원내만 아니지 저기 저 직원이 현장에서 응급조치하고 이쪽 병원으로 유도한 거잖아요?”

중년 여인이 턱짓으로 설현수를 가리키자 그는 또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엄마, 그만 하세요. 이분들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보다 못한 아들이 나섰다.

“죄송합니다. 저희 이만 가볼게요.”

“살펴 가십시오.”

법무팀장과 설현수가 복도까지 나와 중년 여인과 아들을 배웅했다.

“이것 참 곤란하네요. 환자분이 살아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멀어져가는 보호자들을 보며 법무팀장이 말했다.

“솔직히 이건 법이 문제 아닙니까? 생명이 위급한 환자를 구하다가 그 사람이 죽으면 구한 사람이 형사책임을 질 수도 있다니…….”

설현수가 울분을 터트리며 얼마 전 법무팀장이 보여준 법조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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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 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응급처치를 제공하여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死傷)에 대하여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傷害)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하며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은 감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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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제가 아니라 ‘감면’이라고?’

그 내용을 확인했을 때 설현수는 제 눈을 의심했다.

본래 구조 행위자를 보호하고 적극적인 구조를 유도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긴 하지만 함정이 있었다.

환자가 사망했을 시 형사책임이 ‘감면’인 점.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여전히 구조자가 처벌받을 여지가 남아 있다.

몇 년 뒤에 이 법에 대한 개정 시도가 이뤄지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요원한 일.

보호자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도 설현수와 법무팀장이 저자세인 이유였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닌데…… 정말 너무 합니다.”

“그렇죠? 그래도 옳은 일을 하신 겁니다.”

‘어쩌자고 밖에서 그런 오지랖을…….’

법무팀장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살린 사람을 마냥 탓할 수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귀찮게 해드려 죄송하고요.”

“전혀요! 귀찮지 않습니다. 이런 말 드리기는 뭣하지만,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외면하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아…… 저 보호자 보통이 아닌데 원장님한테 뭐라고 말씀드리지.’

법무팀장이 최대한 영업용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하는데.

“저 사람들인가요? 지난번에 말했던?”

어느새 다가온 시현이 설현수에게 물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언제 오신 거지?’

그가 지척에 오도록 전혀 모르고 있었다.

[system : ‘은신 포션’의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 환자 보호자들이에요.”

“법무팀까지 찾아오시고…… 선생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시현이 위로하듯 말했다.

“아닙니다. 법무팀장님도 그렇고 저 때문에 괜히 여러 선생님들께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울컥.

‘이게 왜 선생 잘못이야…….’

백번을 생각해도 그의 탓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이라면

아직은 미숙할지라도 언젠가 훌륭한 외과의로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젊은 의사의 선의를 짓밟아버린 것이 잘못 아닐까.

두근거림과 함께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system : 사용자의 교감신경계가 극도로 항진됩니다. 정보 열람 범위가 한시적으로 확장됩니다.]

시현의 발끝에서 퍼져나간 동심원이 보호자들에게 닿자 그들의 머리 위로 텍스트가 떠올랐다.

[정명례 여/55]

[김진수 남/27]

‘이렇게 화가 나기도 오랜만이네.’

[SORA : 확장된 정보 열람 범위를 축소할 수 있습니다.]

‘응. 그렇게 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정보창을 닫으려는 찰나.

딩동!

[system : 보호자 김진수의 생존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치료 진척도 0/100 생존 확률 21%]

새로 떠오른 메시지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도대체 왜?’

목숨이 경각에 달리 환자들이나 보일 법한 생존 확률이었다.

멀쩡히 병원 로비에서 다른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는 아들의 얼굴에 병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건강해 보이는데 어떻게…….’

젊고 건강한 청년이 돌연 사망하는 경우는 5만 명당 1명 정도.

전교생이 500명인 학교를 100곳 정도 조사하면 한 건이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라 관련 통계도 제각각인 실정이다.

‘우선 원인이 될 만한 건…….’

일단 떠오르는 건 부정맥이나 심근경색과 같은 심장질환들.

생명 유지에 가장 중요한 장기인 심장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심장이 아니라면 뇌 쪽일 텐데.’

그다음은 뇌 질환.

뇌경색(Cerebral infarction)이나 뇌동맥류파열(Cerebral aneurysm rupture).

어쩌면 경련 상태가 지속되는 뇌전증중첩증일 지도 몰랐다.

수년 전 의대생 시절 배웠던, 하지만 정신과 하면서는 좀처럼 접할 일들이 없었던 진단명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응급의료센터]

다음 순간.

로비 끝에 위치한 응급실 출입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방금 그들이 난동을 피웠던 곳이 대학병원이라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엎어지면 코가 닿는 곳.

심장이 멎어서 들어온 경우라 해도 소생의 기회가 있는 거리였다.

‘이대로 원내에만 있어 준다면…….’

하지만 시현의 바람과는 달리 보호자들은 로비를 벗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치료 진척도 0/100 생존 확률 21%]

[치료 진척도 0/100 생존 확률 20%]

……

……

[치료 진척도 0/100 생존 확률 18%]

병원에서 멀어질수록 생존 확률이 실시간으로 떨어져 갔다.

‘이거 좀 불안한데.’

“설현수 선생님, 배고프지 않아요?”

보호자들이 시야에서 거의 사라져갈 무렵 시현이 물었다.

“아, 저는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럴 줄 알았어요. 배고프지 않으면 인턴이 아니죠.”

“저는 정말로 괜찮…….”

“기분도 엉망인데 밥이라도 맛있는 거 먹읍시다.”

누군가 저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면.

적임자는 따로 있었다.

시현은 설현수를 억지로 끌다시피 하여 병원을 나섰다.

* * *

“이 근처에도 식당이 있었나요?”

설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병원 뒤편 먹자골목을 등지고 반대쪽으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

“아는 사람만 아는 맛집이 하나 있어요.”

시현은 일단 대충 둘러대면서 눈으로 부지런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까 분명 이쪽으로 갔는데.’

다음 순간 저만치 앞에서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모자를 발견했다.

‘찾았다.’

[치료 진척도 0/100 생존 확률 16%]

그새 생존 확률이 더 낮아져 있었다.

“지난번에 고기도 사주셨는데 이번에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그건 나중에 레지던트 합격하면 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닥쳐올 상황은 전혀 모른 채 설현수가 말했다.

“저기 4번 출구 앞에 아까 그 환자 보호자들 아닌가요?”

시현은 짐짓 우연히 그들을 발견한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네? 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기 서서 뭘 하시는 건지?”

아들은 걸음을 멈춰 서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눈에 확 띄는 창백한 얼굴.

중년 여인은 걱정스럽다는 듯 아들을 쳐다보았다.

[치료 진척도 0/100 생존 확률 14%]

‘증상이 벌써.’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선생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역에 좀 내려갔다가 올게요.”

“네? 지하철 역은 왜…….”

“화, 화장실이 급해서요!”

누가 봐도 곤란한 표정.

“네! 어서 다녀오십시오!”

응원하듯 대답하는 설현수를 뒤로 한 채 시현은 전력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SORA : 연기력을 좀 더 키우셔야겠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보호자 김진수가 무엇 때문에 죽게 될지는 모른다.

가장 가능성이 커 보이는 건 심혈관 질환.

‘그중에서도 부정맥일 가능성이 높다.’

“AED 어디 있습니까? 헉헉.”

시현이 맨 처음 만난 지하철 역무원에게 물었다.

“에이…… 뭐요?

“자동심장충격기 말입니다.”

“아, 그거…….”

역무원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엔가 분명히 있고 교육도 수차례 받았건만.

몇 년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을 물건이었다.

“AED라면 고객 상담실 좌측 벽면에 있습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심정지 환자가 생긴 것 같습니다. 4번 출구 쪽에서요.”

“네? 그렇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얼마 전에 훈련소에서 심폐소생술 배웠습니다!”

갓 배치받은 사회복무요원인 듯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AED 챙겨서 따라와 주십시오. 먼저 가겠습니다!”

‘준비해줘.’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SORA : ‘가속 포션’을 사용합니다.]

두 다리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시현은 지상으로 달려나갔다.

* * *

“지, 진수야! 갑자기 왜 그래? 괜찮아?”

시현이 지하철역으로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진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엄마, 나 어지러워…….”

그리고 이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 차려! 진수야!”

보호자가 어깨를 흔들어 깨워봤으나 반응이 없었다.

“도, 도와주세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흡사 비명과도 같은 외침.

끄어어- 꺼어어-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불규칙하고 헐떡거리는 듯한 호흡음.

퇴근길을 재촉하던 사람들 몇몇이 김진수의 상태를 살폈으나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저, 숨은 쉬고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삼아대병원이 근처니까 별일 없을 거예요.”

“맞아요. 몸을 떠는 걸 보니 그냥 경련인 것 같은데요. 119에 전화할게요.”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들의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아아.”

보호자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설현수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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