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chapter 20. 가슴이 시켜서 (4)
“선, 선생님. 저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설현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확실히 못 살릴 거면 헤매다 차라리 죽게 놔두지 왜 숨을 붙여놨어요?
불과 20여 분 전, 보호자가 법무팀에서 했던 말이었다.
“저, 저는…….”
머리털이 곤두서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환자를 앞에 두고 발이 들썩들썩했으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뭣 하고 있어요? 환자가 죽어 가는데!!!”
자신이 했던 말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듯, 보호자는 설현수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 그거 있잖아요. 소크라테스 선서! 의사면 환자 살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라도 좀 해달라고요!”
“…….”
‘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
자책하는 상황은 한 번으로 족했다.
이곳은 병원이 아니다.
코드블루 팀은커녕 흉부 압박을 교대해 줄 의사 한 명도 곁에 없는 상황.
구급차가 퇴근길을 뚫고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 환자가 죽기라도 하면?’
만약 심정지 상태라면 생존 확률은 높지 않다.
설령 운 좋게 살아난다 하더라도 여러 합병증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죄송합니다. 저는 도와드릴 수…….”
설현수는 보호자의 손을 가만히 뿌리쳤다.
그리고 다가오는 보호자를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턱.
그러다 등 뒤에 서 있던 누군가와 부딪쳤다.
“아, 죄송…… 선생님, 벌써 오셨군요.”
[치료 진척도 0/100 생존 확률 11%]
“저기 누워계신 분 어떻게 된 겁니까?”
“저분은…….”
설현수는 잠시 환자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여전히 환자가 보였다.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아직 죽을 때가 안됐다고.
움직이지 않는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system : 인턴 설현수의 주된 감정은 ‘공포’입니다.]
‘이대로는 안 돼.’
“보호자님, 저희는 환자분 합병증 없이 확실히 살릴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시현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럼요!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뭐라도 할게요!”
보호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면 각서부터 좀 받아야겠습니다. 선의로 돕는 일이니 결과가 어떻든 아무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적어서 사인해주십시오.”
“애가 곧 죽게 생겼는데! 어디다 어떻게 사인을 하란 말씀이세요!”
“아까는 분명 사인받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잘, 잘못했습니다. 책임도 묻지 않고 살든 죽든 사례도 하겠습니다. 제발 뭐라도 해주세요!”
꾸욱.
시현은 휴대폰의 녹음 중지 버튼을 눌렀다.
“좋습니다. 그럼 동의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딩동!
다음 순간 익숙한 알림음이 울리며 새로운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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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
난이도 A
한 생명은 누군가의 선택에, 그리고 그 선택은 수많은 생명들에 영향을 줍니다.
성공 조건 : 심정지 환자의 성공적인 자발 순환 회복(ROSC)
성공 보상 : 흉부외과 협진 이용권(무제한) + a
실패시 : 인턴 설현수의 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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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성공해야 해.’
이대로 병원을 그만두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시현 수락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엔 두 명이니까 다르지 않겠어요? 우리 해봅시다.”
“네! 선생님!”
다음 순간, 설현수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현수는 흉부 압박을 시작했다.
그러기를 2분.
[치료 진척도 10/100 생존 확률 16%]
‘오르고 있어.’
시현이 바로 손을 바꿔 압박을 이어갔다.
“여기 AED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사회복무요원이 도착했다.
‘어, 어떻게?’
설현수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AED 상자를 열어 패드를 붙이기 시작했다.
[심장 리듬을 분석 중입니다.]
설현수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숨죽여 새로운 AED 판독 결과를 기다렸다.
[제세동 해야 합니다. 충격(shock) 버튼을 누르세요.]
“환자 곁에서 떨어지세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설현수가 충격 버튼을 눌렀다.
“컴프레션 하겠습니다!”
전기 충격으로 환자의 상체가 떠올랐다가 가라앉기 무섭게 설현수가 다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두근- 두근-
다음 순간, 미약하지만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환자의 심박동이 돌아오는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상태.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변화였지만 혈색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설현수 선생님, 잠깐만요!”
“네?”
“잠시 멈춰보세요. 괜찮을 겁니다.”
다음 리듬 분석까지는 한시도 중단해서는 안 되는 흉부압박을 멈추라니.
설현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시현이 환자의 경동맥을 짚었다.
모두가 숨죽여 바라보기를 몇 초.
“펄스, 돌아온 것 같네요.”
쿨럭. 쿨럭.
이내 환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기침을 내뱉었다.
‘이대로만 유지 된다면.’
동시에 설현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제세동까지 성공했다.
구급차만 제때 도착해준다면.
환자는 살 수 있다.
“환자 회복 자세로 눕힙시다.”
“네!”
아직 온전치는 않지만, 의식도 돌아왔다.
더 이상의 압박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고 설현수와 사회복무요원이 환자를 옆으로 눕혔다.
“진, 진수야! 괜찮아?”
눈물범벅이 된 보호자를 향해 환자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삐오 – 삐오 -.
멀리서 구급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
“어레스트가 있었는데 지금은 자발 순환 회복했습니다.”
구급대원이 묻자 설현수가 대답했다.
“아, 의사십니까? 환자분이 정말 운이 좋았군요!”
병원 도착 전 자발 순환이 돌아오는 경우는 10% 남짓.
구급 대원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응급실까지 잠깐 동승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가시는 길에 상황 설명도 해주실 겸.”
“제가 대신 타도 괜찮겠습니까?”
설현수가 보호자를 힐끗 보며 물었다.
“그렇게 해주세요. 저는 걸어갈게요. 바로 앞이니까요.”
혹여 구급차 안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자신보다는 설현수가 훨씬 더 도움이 될 터.
보호자도 흔쾌히 수락했다.
구급 대원들이 서둘러 환자를 데리고 떠나자 시현이 사회복무요원에게 말했다.
“덕분에 시간을 많이 절약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일은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응급구조사가 꿈이었거든요!”
역시나.
AED 위치를 숙지하고 있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부터가 남달랐는데 이유가 있었다.
- 김상윤 Kim S.Y.
자주색 상의에 새겨진 이름이 눈에 띄었다.
“빠른 제세동이 정말 중요하죠. 환자분이 살아난 건 김상윤 님 공이 큽니다.”
“그렇군요! 도움이 됐다니 너무 다행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쪽지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시현에게 건넸다.
“저 혹시 환자분께서 회복하시면 연락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연락은 왜…….”
“저희 역장님이 이런 ‘미담’을 워낙 좋아하셔서요. 하하하.”
김상윤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잘하면 자신도 포상 휴가를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그렇군요. 꼭 연락 드리겠습니다.”
AED를 챙겨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유독 가벼워 보였다.
이제 4번 출구 앞에는 시현과 보호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우리 아들 괜찮을까요?”
보호자는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평가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분이 들고 가는 저 AED 말인데요, 자동으로 심장 리듬을 분석해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전기 충격을 줍니다.”
“꼭 필요한 경우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전기 충격으로 심장을 ‘리셋’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부정맥이 있었다는 거죠. 부정맥이 먼저인지 아니면 이차적인 원인이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요.”
“부정맥이라면…… 심실세동이 있었다는 건가요?”
보호자의 입에서 의외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설현수를 무작정 비난하고 나설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심실세동이라는 용어를 아는 걸 보면 이쪽 상식이 아주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네, 아마도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보호자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자식이 아픈 건 걱정되나 보네.’
남편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사뭇 다른 반응.
[system : 정명례의 주된 감정은 ‘불안’입니다.]
카이트만의 안경 또한 비슷한 평가였다.
“그런데, 지금 바로 심전도를 찍으면 어떻게 나올까요?”
하지만 보호자의 다음 질문은 좀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검사 결과는 왜?’
“제세동이 됐으면…… 일단은 정상으로 나올 수도 있는 거죠?”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바로 응급실로 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심시키려 했으나 정명례는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아드님이 평소에 아픈 곳이 있었던가요?”
두 사람은 응급실 쪽으로 걸어가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뇨. 건강했었어요. 군대도 잘 다녀왔고요.”
[system : 정명례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특별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못내 불안해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 가족력은요? 직계 가족 중에 심장질환으로 돌아가신 분은요?”
“전혀요. 애들 아빠가 얼마 전에 쓰러진 것 말고는 없어요.”
[system : 정명례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그 대답에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족력이…… 있다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호자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저는 응급실로 어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여기 제 명함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나중에 꼭 사례 드릴게요.”
[정명례 삼아생명 재무설계사 010-21xx-56xx]
명함 한 장을 건네고 응급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잠시만요.”
“네?”
시현의 말에 보호자가 응급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췄다.
‘꽤 연차가 있는 보험설계사인 것 같은데, 혹시?’
병력을 숨기고 아들의 검사 결과에 집착하는 태도.
전에 보여준 남편의 생존에도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모습까지.
‘가족력이 있는 부정맥…….’
시현이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시죠?”
“기저질환이 없는 20대 젊은 남성이 갑자기 부정맥으로 사망하는 건 매우 드문 현상입니다.”
“그래서요?”
“최근에 남편분께서 비슷한 증상으로 죽을 뻔하셨고요. 뭔가 가족력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력은 없다고.”
[system : 정명례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의심되는 질환이 하나 있는데 유전자 검사를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남의 일에 관심이 너무 많으시군요. 신경 끄시죠.”
보호자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남의 일이라고 내버려 뒀으면 지금쯤 아드님도 남편분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 그건…….”
“브루가다 증후군. 맞죠?”
철렁.
시현의 마지막 말에 보호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