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77화 (77/195)

77화 chapter 20. 가슴이 시켜서 (5)

브루가다 증후군.

상염색체 우성 유전 질환으로 평소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가도 갑자기 생긴 심실세동으로 인해 급사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이거라면 평소에 정상 심전도를 보일 수도 있지.’

일부 환자에서는 체온 변화에 따라 심전도가 변하기도 하고 이상 소견이 나타났다가도 다시 정상화 될 수 있어 질병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90년대에 이르러서야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을 정도.

‘굳이 숨기는 이유는 뭘까.’

의문은 정명례의 명함을 건네받았을 때 풀리기 시작했다.

“브루…… 뭐요? 그, 그게 뭔가요?”

“유전질환입니다. 드물지만 급사를 유발할 수도 있죠.”

“…….”

“알고 계셨을 텐데요?”

가족력이 없다는 말이 거짓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했다.

“처음 듣는데요. 알았다면 치료부터 했겠지요.”

[system : 정명례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이제 확실해졌군.’

시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질환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고의로 치료를 미루는 상황은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고지의무를 지키지 않고 생명 보험이라도 가입하셨던 건가요?”

‘그걸 어떻게?’

[system : 정명례의 주된 감정은 ‘공포’입니다.]

“설현수 선생한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거, 처음부터 알고 계셨죠?”

“그건…….”

“기흉이니 골절이니 뇌손상이니 했던 것도 혹시라도 환자분이 잘못되면 사인을 그쪽으로 하려고 했던 거고요.”

“…….”

정명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보험 사기를 치던 부당 수령을 하던 그딴 건 관심 없어요. 하지만 설 선생이 원래 하려고 했던 진로를 포기하게 만든 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눈앞에서 사망보험금 수억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

보호자가 시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을 텐데요.”

냉랭하게 손을 뿌리치며 시현은 자리를 떠났다.

* * *

“선생님, 저희 애는 괜찮은가요?”

보호자는 응급실에 들어오자마자 설현수부터 찾았다.

“네, 구급차 안에서도 별문제 없었습니다. 응급실 들어온 뒤로는 내과에서 보고 있고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확 바뀐 태도에 설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외상이 있는지는 저희 과에서 볼 겁니다.”

누군가 두 사람 사이로 다가와 말했다.

흉부외과 레지던트 한준식이었다.

“갈비뼈 골절이 한 두 곳 있을 수는 있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심폐소생술이 길어지면 다발성 골절이 생기고 기흉이 오는 경우 꽤 있습니다. 능숙한 사람이 했다고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그래도 그만큼 열심히 살리려고 제대로 한 거니까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연하죠. 이해하다마다요. 일단 살았으면 됐습니다.”

‘같은 보호자 맞아?’

한준식 또한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며칠 전 식당에서 들었던 태도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

“이번에 옆에서 직접 보니 알겠습니다. 지난번 남편이 쓰러졌을 때도 똑같이 하셨겠지요?”

보호자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설현수에게 말했다.

“그동안 괴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남편이 어떻게 되든 절대 문제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이어지는 뜻밖의 말들.

한준식과 설현수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으, 여긴?”

그러는 사이 환자가 눈을 떴다.

아직 통증이 심한지 잔뜩 찌푸린 얼굴.

“진수야!”

보호자가 바짝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 구급차에 타고 계셨던 게 선생님이셨군요. 정말 감사…….”

“아직 일어나지 마세요. 그대로 계십시오.”

설현수가 일어나려는 환자를 만류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가 그렇게 힘들게 해드렸는데…….”

불과 한 시간 전과는 180도 달라진 환자와 보호자를 뒤로 한 채 설현수는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 * *

30분 뒤. 삼아대병원 구내식당.

“밖에서 맛있는 밥도 못 먹고 이게 무슨…… 그래도 보람은 있죠?”

한준식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환자가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우리 과가 별로 내세울 건 없지만, 내 손으로 누군가를 살렸다는…… 그 뿌듯한 느낌은 남부럽지 않게 느낄 수 있어요.”

“선생님은 바이탈과 해도 잘할 겁니다. 진짜로요.”

시현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 저는 실력이 많이 모자라서…….”

설현수가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병원 밖에서 환자를 둘이나 살렸는데. 지난번에 대동맥 박리 환자도 선생님이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위험할 수 있었어요.”

“그건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이 지나치네요. 실력은 그 정도면 훌륭하죠.”

“아, 감사합니다.”

설현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보호자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이번에 그런 판단을 했다는 거, 그게 정말 대단한 거예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환자를 살리는 기술을 배우는 일은 차라리 쉽다. 진정 어려운 것은 불이익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는 일이었다.

“맞아요. 그런 ‘진정성’이 있으니까 보호자도 뒤늦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한 거 아니겠어요?”

“그, 그럴까요?”

사실 보호자가 사과한 것은 ‘진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믿는 듯했다.

“어때요? 흉부외과 생각 없어요?”

한준식이 설현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환자 몰고 다니는 스타일인가요? 그럼 살짝 곤란한데.”

한준식이 놀리듯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 내공은 괜찮은 편입니다.”

“올. 그럼 거의 합격인데? 이따 밤에 시간 되면 우리 당직실로 오세요. 같이 야식이나 시켜 먹게.”

딩동!

[system : 퀘스트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의 성공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system : 성공 보상을 지급합니다. 흉부외과 협진 이용권(무제한) + 10,000P]

‘이걸로 일단은 해결인가.’

환자를 앞에 두고 공포에 떠는 설현수의 모습은 이제 없을 것이다.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시현은 의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2개월 뒤, 삼아대병원 원장실.

“오늘 남은 스케쥴이 어떻게 되나?”

“교육수련부 전민성 교수님과 면담 예정되어있고 곧바로 리서치 센터장님과 일정 잡혀있습니다.”

원일웅이 비서를 통해 오후 일정을 확인했다.

“참, 전 교수 만나기로 했었지. 오면 바로 들여보내 주세요.”

똑똑.

“아, 원장님 이야기 중이셨습니까?”

양반은 못 되는지 이야기하는 중에 전민성이 찾아왔다.

“아닙니다. 마침 잘 왔어요. 내년 전공의 모집은 순조롭게 되고 있습니까?”

“네, 여기 지원 현황입니다.”

전민성이 결제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

“시간 참 빨라. 벌써 레지던트 지원 시기가 되고…… 경쟁률은 어떤가요?”

“지금까지 경쟁률은 1.4대 1입니다.”

“올해도 마이너과 인기는 여전하고?”

원일웅이 안경 너머로 그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훑었다.

마이너과.

내과와 외과 같은 생명을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메이저’ 과와 비교되는 개념으로 피부과, 안과 그리고 성형외과와 같은 인기과들이 대표적인 마이너과다.

“인기는 여전하지만, 오히려 예년보다는 덜한 편입니다. 올해는 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모두 경쟁률이 2:1 정도입니다.”

“경쟁률이 낮아진 것 같은데…… 왜 그렇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기본 3:1에서 시작하던 과들 아니던가. 원일웅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마이너 선호하는 친구들이 몇 년 사이에 재활의학과나 영상의학과, 정신과로 분산되는 경향이 좀 있으니까요.”

졸업 후 수요에 따라 전공과의 인기가 달라지는 어디서든 마찬가지. 정책이나 수가의 변화에 따라 인기과는 조금씩 달라지곤 했다.

“올해는 전체 수석이 정신과를 지원했습니다.”

“정신과에? 피부과가 아니고?”

“네. 노민혜 선생이라고…… 알아보니 학생 때부터 정신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바이탈과는 미달이 많아 걱정인데, 내과가 그나마 선방인 것 같습니다.”

선방이라고 해봐야 겨우 미달을 면한 수준.

교육수련부장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흉부외과 지원자 1명 / 정원 3명]

문서를 쭉 읽어 내려가던 원일웅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올해 흉부외과 지원자는 한 명…… 간신히 명맥은 이어지겠구만.”

“네, 하지만 꽤 성적이 좋은 친구가 지원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성적이 좋다는 말에도 반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뭐, 지원자가 없으면 없는 대로 갑시다. 인기 없는 과 정원 채우려고 무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인력 충원에 신경 쓰지 말라니. 전민성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중환자실 병상 하나당 연간 적자가 얼마인데? 흉부외과나 외상외과에 지원자가 늘어나서 과 운영이 정상화되면 적자 폭만 늘어나서 골치 아프고…… 차라리 사람이 부족해서 환자를 덜 보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돌려보내야 하는 환자들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건 정책의 문제이지 우리 같은 민간 기업에서 걱정해야 할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원일웅이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전민성의 우려에 선을 그었다.

“솔직히 나는 이런 기피 과에 지원자가 있는 거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도 과에 명맥이 끊기지 않고 유지되려면 지원자가 필요…….”

“교육수련부장님도 순진한 구석이 있으시군요.”

원일웅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맺혔다.

“개흉 수술은 하면 할수록 적자에… 에크모(ECMO, 체외 순환기) 달아봐야 삭감되기 일쑤예요. 사람 목숨 살려보겠다고 하는 일들이 병원에는 전부 다 손해라는 말입니다.”

“…….”

그 말에 전민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경영자라고는 하나 생명을 놓고 경제적인 면을 들먹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젊은 선생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지원한다는데 병원 차원에서 독려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인력을 충원할 수 없으니 당직실 환경이라도 개선해서…….”

“개인 차원의 그런 어설픈 ‘사명감’에 무슨 힘이 있습니까? 이럴 바에야 지원자가 아무도 없는 편이 나아요. 국가에서 심각성을 좀 깨닫고 지원이라도 해주게. 아무튼, 그쪽으로 예산 편성은 어려우니 그리 아세요.”

내년 레지던트 지원자들을 놓고 한참을 더 이야기했으나, 두 사람의 견해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아, 그리고 앞으로 안과하고 피부과 지원자들 인적사항 따로 정리해서 보고해주세요.”

“안과하고 피부과요?”

“최대한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당사자들은 모르게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두 과 모두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지원자가 넘쳐나는 과들이었다.

영문 모를 지시에 전민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원장실을 나왔다.

띠리리리.

그가 나가기 무섭게 내선 전화가 울리고.

- …… 의원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바로 연결해줘.”

원일웅의 통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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