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78화 (78/195)

78화 chapter 21. 감별 진단 (1)

며칠 뒤, 9병동 회의실.

“901호 이종숙 환자 외박 후 복귀했습니다. 집에서도 증상 악화 없었다고 합니다.”

“904호 김영태 환자 증상 호전되어 오늘 퇴원 예정입니다. 다음 주 외래 방문하도록 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은 회진.

시현과 황진호가 환자 보고를 마쳤다.

“그래요, 병동 환자들도 많이 안정된 것 같군요.”

이광섭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곧 있으면 전공의 시험인데 지원자들 파악하고 있나요? 내년 지원자들도 올해처럼 잘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원내에서 2명 지원 예정입니다.”

3년차 권원주가 대답했다.

김민홍과 최지훈이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있어 그녀가 실질적인 치프 역할을 맡고 있었다.

“2명이라. 얼마 전까지 3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네, 그랬었는데 지원자였던 설현수 선생이 흉부외과로 돌렸습니다.”

“흉부외과면… 이상한데? 정신과와는 접점이 전혀 없지 않나?”

이광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두 사람이 최종 합격할 것 같은데 예비 레지던트라고 생각하고 잘 가르쳐보세요.”

“네, 과장님.”

회진이 끝나고 이광섭이 회의실을 나서자 권원주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우리 과 경쟁률이 1대 1이 뭐야? 3대 1은 돼야지. 1년차들 응급실에서 인턴들한테 행패 부린 거 아니지?”

“아, 아닙니다.”

황진호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현이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대답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설현수가 흉부외과에 지원한 건 자신이 개입한 바 컸으니까.

“에이, 우리 1년차들이 어디 그럴 애들인가요? 인턴들한테도 잘 해주고 당직 때 타과 컨설트도 잘 봐준다던데요?”

권진은이 대신 대답했다.

“따로 알아봤는데 노민혜랑 김원기 둘 다 평판이 좋았습니다. 그 둘이 될 것 같으니까 나머지 인턴들이 돌린 것 같은데요.”

김석용도 거들었다.

“하긴, 시현이나 진호나 말리그는 아니지.”

권원주가 피식 웃어 보였다.

“뭐, 경쟁률이 중요한가? 최종 합격자가 어떤 사람들인지가 중요하지. 안 그래?”

같은 연차인 하도영이 말했다.

“아무리 경쟁률이 1:1이라고 해도. 아직 우리 식구 된 것 아니니까 미리 일 시키고 그러면 안 된다.”

“네! 선생님!”

그의 말에 시현과 황진호가 동시에 대답했다.

“맞아. 아무리 합격한 거나 다름없어도 인턴은 인턴이야. 내가 인턴 때 당한 것만 생각하면 어휴…….”

오래 참았던 말을 이제야 한다는 듯 두 사람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쩍 주변을 살피기는 했다.

김민홍과 최지훈이 병동에 없는 건 뻔히 알았지만, 여전히 윗년차 이야기를 하기란 조심스러웠으니까.

“인턴 때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황진호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권원주 선생님이 인턴 때 당한 거?’

시현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최지훈 선생님이 1년차 때 하도 사고를 많이 쳐서…… 이왕 말 나온 거 내가 증례 퀴즈 하나 내볼게. 맞추는 사람 있으면 내가 커피 쏜다.”

권원주는 먼 산을 바라보듯 옛 기억을 더듬었다.

* * *

3년 전.

“원주야, 이제 응급실 노티 오면 네가 가서 먼저 보고 나한테 보고해. 픽스턴 됐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1년차 최지훈이 인턴 권원주에게 말했다.

픽스턴.

고정을 의미하는 픽스(fix)와 인턴(intern)를 합친 말.

인턴은 여러 과를 순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연말 레지턴트 시험에 합격하여 전공할 과가 정해지면 남은 몇 달간은 자신이 일할 과에서 남은 인턴 기간을 보낸다.

“네? 응급실 콜을 받으라는 말씀이세요?”

아무리 픽스턴이라지만 인턴끼리 노티를 주고받는 황당한 상황.

최지훈의 말에 권원주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어차피 몇 주만 지나면 네가 하게 될 일이잖아. 미리 해보라는 거지. 내가 다 백 봐줄 테니까 안심해. 이게 다 트레이닝의 일환이라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그는 아예 응급실 당직표에 권원주의 이름을 올려놓은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위이이잉.

병동 환자 드레싱을 하던 권원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 원주야, 정신과 환자 왔는데 그냥 너한테 얘기하면 되니?

응급실을 돌고 있는 동기 인턴의 목소리였다.

“그래. 무슨 환자인데?”

- 어, 그게…… 그냥 정신과 환자야.

주증상은 무엇인지 어떤 질환이 의심되는지 병력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었다.

“…….”

당황한 권원주가 말을 잇지 못하자 동기 인턴이 미안한 듯 덧붙였다.

- 원주야, 미안한데 그냥 내려와서 봐주면 안 될까? 지금 응급실이 지금 좀 바빠서 말이지.

피차 말년 인턴.

1년차도 별로 안 무서울 땐데 동기한테야 오죽할까.

“그래…… 그럼 다른 환자 먼저 보고 있어. 그 환자는 내가 초진할게.”

‘어차피 내가 봐야 할 환자니까.’

인턴 신분으로 응급실 콜을 받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는 일단 응급실을 향했다.

* * *

“헐. 정말 1년차 때부터 남다르셨네요.”

김석용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와, 아무리 픽스턴이어도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건 그냥 본인 당직 내린 거잖아요!”

황진호는 과몰입으로 울분을 터트렸다.

시현으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

문득 환자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 환자는 어떤 분이셨나요?”

“만성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 조현병)였어. 최근에 약을 안 먹었다고 했었고…… 내가 갔을 때는 눈 감고 누워만 있더라고. 움직이지도 않고 전혀 협조도 안 되고.”

시현이 묻자 권원주가 당시 환자 상태를 설명했다.

조현병이라고 하면 환청과 망상으로 대표되는 양성증상(positive symptom)을 먼저 떠올리지만, 무의욕과 감정의 반응성이 심하게 저하되는 등의 음성증상(negative symptom) 또한 흔하게 나타난다.

“환자 최종 진단이 뭐였을 것 같아?”

“음. 혹시 조현병의 음성증상이 심해져서 왔던 걸까요? 사회적으로 위축을 보이면서 주변에 대한 반응이 떨어진다면……”

황진호가 대답했다.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권원주가 빙그레 웃었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야. 하지만…….’

단순히 응급실로 온 조현병 환자를 권원주가 대신 진찰한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오래 기억에 남을 리 없다.

‘조현병 악화는 정답이 아니라는 거지.’

“시현이 의견은 어때?”

“말씀하신 것만으로는 잘 모르겠는데요. 다른 증상은 없었나요? 검사상 이상 소견이랄지.”

“37.5도 정도로 미열이 있기는 했는데, 흉부 X-ray하고 심전도는 정상이었어. 혈액검사에서 백혈구 수치가 약간 떨어져 있었던 것 말고는 특이소견은 없었고.”

“그렇다면…….”

환자를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정보도 제한적인 상황.

“어렵지? 이건 진짜 아무도 못 맞출걸?”

하지만 거기에 절대로 맞출 리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더해지자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절대로 공짜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일단, 의학적 상태에 의한 섬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정보가 부족하긴 하지만요.”

“에이, 설마. 딱 봐도 약 안 먹어서 조현병의 음성 증상이 나빠진 것 같은데? 검사 결과도 다 정상이고 미열 말고는 별다른 증상도 없어. 이 정도로 내과나 신경과에 노티 했다가는 바로 까일 거야.”

시현의 말에 황진호가 바로 반론을 제시했다.

“정말 미열 말고는 증상이 없을까? 의식 장애가 먼저 왔고 그러다 보니 약을 못 먹은 거라면? 약을 잘 챙기지 못한 게 증상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일 수도 있지.”

황진호가 기존 조현병의 악화를 먼저 의심한 것과 달리 시현은 또 다른 질환으로 인한 의식 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 다양한 의견 좋아. 그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지금의 너희라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권원주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일단 입원이죠. 환자 셀프 케어가 전혀 안 되고 약도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요.”

황진호가 대답했다.

“저도 입원 적응증이라고 봅니다.”

진단은 갈렸지만 결국 시현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아직은 1년차인가?’

권원주가 또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그게 우리 과는 아닐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시현의 대답에 권원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과가 아니라니?”

“물론 섬망은 우리 과에서 보는 질환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치료는 원인 질환의 교정입니다. 의식 저하의 원인을 알아내는 게 먼저죠.”

“그래서 원인 평가는 어떻게 할 건데?”

권원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우선 Contrast-enhanced CT 촬영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뇌에 병변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죠. 그리고…….”

“약 안 먹어서 응급실 온 걸 가지고 뇌 영상을 다시 찍는다고? 그건 너무 방어 진료 아닌가? 검사비도 꽤 비싼데.”

그건 아니라는 듯 황진호가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아니, 당연히 새로 평가하는 게 맞아. 기존 환청이나 망상이 나빠진 게 아니고 새로운 증상이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리고 조현병 환자라면 산정 특례 적용이 되어서 본인 부담금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야.”

산정 특례.

진료비 부담이 큰 중증질환에 대해 진료비를 경감하는 제도로 조현병도 여기에 해당했다.

‘제법 세심한데.’

“계속 말해봐. 또 뭘 해볼 건지.”

시현의 다음 판단이 궁금해지는 권원주였다.

“그리고 CT에서 별다른 소견이 없다면 뇌척수액 검사까지는 해보고 싶습니다.”

“중추신경계 감염을 의심한다는 건가?”

“네. 환자가 보여준 의식 혼탁이 그것 때문일 수 있으니까요.”

가장 위험할 수 있는 치명적인 감염부터 배제한다는, 명료한 판단이었다.

“음… 일단은 정답이야.”

그 말에 권원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정말 CNS infection(신경계 감염)이 답이었어요? 고열도 없고 혈액 검사상 이상이 없는데도요?”

김석용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최종 진단은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이었어. 보호자가 일반 감기인 줄 알고 약국에서 해열제를 사다 먹인 모양이야. 그러니 열이 덜 날 수밖에.”

“그럴 수도 있군요. 근데 시현이는 어떻게 안 거야?”

“그냥 감이죠. 하하.”

‘실은 경험이지만.’

응급실에서 무심코 입원시켰다가 숨겨진 다른 질환이 발견되어 곤란했던 경험.

두고두고 이불을 찰 옛 기억을 더듬으며 시현은 씩 웃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은 환잔데 픽스턴 땐 어땠겠어? 아무튼, 곧 1년차들 새로 들어오는데 제대로 좀 가르쳐줘. 일 막 내리지 말고 알겠지?”

“네, 선생님!”

“그래도 너희 보면 안심이…….”

위이이잉.

권원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정신과 황진호입니다.”

- 응급실 인턴 노민혜입니다. 노티 드리겠습니다. 61세 남자 환자 정광철 님, 한 달 전부터 시작된…….

내년 지원자들을 이야기하던 중에 도착한 노민혜의 노티.

제대로 가르치고 오라는 응원을 받으며 황진호는 응급실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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