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chapter 21. 감별 진단 (2)
* * *
“환자분 상태는 어떤가요?”
“불안과 과호흡이 심합니다. 응급실 도착 시에 BP 160/110mmHg, 심박수는 120회였습니다.”
“그렇군요…….”
황진호의 시선이 환자의 모에 연결된 모니터링 기기를 향했다.
불안 증상이 있는 경우 혈압과 심박수는 오르기 마련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내과 진료도 했나요?”
불안으로 인한 증상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명색이 흉부 불편감과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심혈관계 질환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본원에서 새로 한 검사는 없지만, 병원에 오시기 전 건강검진을 모두 하셨다고 합니다.”
노민혜가 황진호를 향해 파일철을 건넸다.
[새미래병원 건강검진센터]
“환자분께서 요즘 들어 불안 증상과 두근거림을 호소하셔서 심장과 폐 질환에 대해 추가 검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여기 보시면…….”
건강검진 일자는 일주일 전.
노민혜의 말대로 일반적인 건강검진보다 더 포괄적인 검사들을 받고 온 상태였다.
‘흉부 X-ray에 심전도는 기본이고 심장 초음파 Holter(24시간 심전도)까지…….’
“이 정도면 왠만한 질환은 다 배제가 되겠어요. 내과 컨택은 따로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황진호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1년차도 끝나가는 마당에 불안 증상으로 응급실에 오는 환자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면담하실 때 참관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다른 환자 없으면 같이 가서 봐요. 곧 선생님도 하게 될 일인데.”
잔뜩 긴장한 표정의 노민혜를 보니 새삼 작년 이 무렵이 떠올랐다.
인턴으로서 응급실 환자를 볼 때와 레지던트가 된 다음 보는 건 무게감이 달랐다.
인턴은 각과 레지던트에게 노티만 하면 더는 신경쓸 일이 없는 위치였지만, 레지던트는 환자가 응급실에서 퇴실하기 전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입장이었다.
레지던트들이 노티를 받을 때 까다롭게 구는 이유이기도 했다.
“불안장애는 응급실에서 자주 보니까 어려워할 거 없어요.”
극심한 불안은 10분 내외면 사라지기 마련인 데다 환자들은 응급실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찾기도 한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주된 증상이지만,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충분히 안심하실 수 있도록…….”
황진호가 노민혜를 안심시키듯 말하며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 커튼을 열어젖히는데.
‘헉!’
환자와 눈이 마주친 황진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환자 상태가 왜 이래.’
건강검진 자료상으로는 대체로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이었는데, 그 ‘건강한’ 환자는 어디로 가고 깡마른 인상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병색이 완연한 환자가 침상에 누워있었다.
“저, 환자분… 괜찮으세요?”
후배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 저절로 환자의 안위부터 살피는 황진호였다.
“어지러워요. 가슴이 터질 거 같고. 하아하아.”
“안정제 주사해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황진호는 서둘러 주사제 처방부터 한 뒤 환자와 면담을 이어나갔다.
“증상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몇 달 됐어요. 수시로 불안하고… 잠도 안 오고.”
“과거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최근에 스트레스는…….”
“저 혹시 입원치료를 할 수 있을까요?”
환자와 보호자가 대뜸 입원 이야기부터 꺼냈다.
“불안장애라고 해서 모두 다 입원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일단 외래에서 약물치료부터 시도해보시고……. ”
“그거라면 몇 주 전부터 집 근처 정신과 의원에서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았는데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것 같아요. 이틀에 한 번씩 구급차를 부르고 있으니까요.”
환자의 곁을 지키고 있는, 딸로 보이는 보호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병실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노티를 받고 내려왔으니 뭔가 멋지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환자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더 평가해볼 것은 없을까요? 환자분이 최근에 체중도 많이 빠졌다고 하시고…… 전신 상태가 아무래도 좋지 않아 보여서요.”
“잠도 잘 못 자고 식욕 저하가 동반된 경우라서 그렇지 않을까?”
불안장애가 있으면서 우울증이 겹치는 경우는 숱하게 봐왔다. 체중감소와 무기력감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이기도 했고.
노민혜가 걱정스레 물었으나 황진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 * *
삼아대병원 원장실.
똑똑.
“응급의학과 김정현 선생이 왔습니다.”
홀로 중역 책상에 앉아있던 원일웅에게 비서가 말했다.
‘정현이가?’
예정에 없던 조카의 방문에 원일웅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급한 일이 아니면 따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 터였다.
“앉거라. 무슨 일이니?”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앞에 두고 그는 용건부터 물었다.
애초에 살가운 성격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조카를 원장실로 따로 불러다 챙긴다는 구설수도 원치 않았다.
“전에 말씀드렸던 ‘그 일’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그래?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김정현의 입에서 ‘그 일’이라는 말이 나오자 원일웅은 새삼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뒤로도 몇 달 동안 지켜봤지만, 딱히 흠잡을 곳도 없고. 과에서도 신임이 두터운 것 같았습니다.”
“흠. 1년차 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말이지.”
“네. 지금 같아서는 달리 손쓸 방법이…….”
“정현아.”
“네?”
김정현이 흠칫 놀라 원일웅을 바라보았다. 그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뭔가 움찔하게 만드는 위엄이 느껴졌다.
“차분히 더 생각해봐. 앞으로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방법이 없다는 둥 말 같지도 않은 말 하려고 찾아온 게냐?”
“네…….”
“너 의사 가운 입혀서 그 자리에 앉히려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는 있겠지?”
“…….”
원일웅의 지적에 김정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고 무리하라는 말은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처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혹시 벌써 누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서, 설마요. 아마도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매사 완벽을 추구하는 그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표현이었다.
“제대로 얘기해봐.”
원일웅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확실히 모를 겁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정현.
“앉아.”
하지만 원일웅의 한 마디에 무겁게 변한 원장실의 공기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네가 채이진 선생한테 한 일…… 또 누가 알고 있어?”
“제 일을 봐주던 간호사가 하나 있었는데…… 어쩌다 정신과 레지던트에게 들킨 것 같습니다.”
“정신과? 누구?”
“1년차 천시현이라고 자꾸 훼방을 놓는데…….”
“일 시킨 간호사하고 정신과 레지던트하고 벌써 둘이나 안다는 거냐?”
원일웅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노발대발하자 김정현은 점점 더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냥 애정 문제 정도로만 알고 있을 겁니다.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이수지를 시켜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병원에는 어떤 소문도 퍼지지 않았다. 정식으로 징계절차가 진행되거나 하지도 않았고.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이내 그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이수지가 처벌받는 걸 원치 않았던 거야. 고지식한 녀석…….’
진료 중 알게 된 사실로 인해 자신의 환자인 이수지에게 불이익이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껏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멍청한 놈. 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어떻게든…….”
“아니다. 당분간 이 일에서는 손 떼고 지켜보도록 해.”
“알겠… 습니다.”
김정현의 뇌리에 시현의 얼굴이 스쳤다.
의대에서도 병원에서도 1년 후배였으나 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고 싶었는데, 원일웅의 지시가 못내 아쉬웠다.
“대신 앞으로 마이너 지원자들 잘 살펴보도록 해.”
“마이너라면 피안성 말씀이세요? 그건 왜…….”
자신의 실수에 외삼촌이 실망했다고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오선태 의원 따님이 본과 4학년인데 알고 있니? 내년에 우리 병원 인턴으로 오겠다는구나.”
오선태 의원이라면 현 여당의 중진 의원.
차기 대선 후보의 복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본과 4학년 오진희…… 기억합니다.”
“그래? 마침 잘 됐구나. 의원님이 집안에 하나 있는 의사라 관심이 아주 많으시던데. 평판은 어때?”
“저, 그게…….”
김정현이 대답을 주저했다.
오선태 의원의 딸에 대해서라면 익히 겪어 알고 있었다.
‘PK 실습 때 사고 많이 쳤던 것 같은데…….’
본과 3, 4학년 학생들은 각 진료과를 돌며 임상 진료를 배우는데, 이것을 PK 실습이라고 한다.
각 과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회진을 함께 도는 것뿐 아니라 일부 임상 술기를 직접 해보기도 하는데, 어느 집단이나 그렇듯 사고뭉치들이 존재했다.
‘일단 손으로 하는 건 다 못했고…… 진짜 눈치도 없었는데.’
정맥 채혈이나 비위관 삽입과 같은 처치는 시킬 때마다 컴플레인이 들어왔고.
응급 환자 근처에서 웃고 떠들다 지적을 받기도 했다.
보통은 PK 실습이 끝나면 얼굴도 이름도 다 잊어버리는데, 워낙 독보적인 말리그라 기억에 남았다.
“내년에 응급실 점수 잘 줄 수 있도록 하고. 그 친구 피부과 의사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분명 힘이 될 거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
대대로 피부과 합격자는 의대 내신 1등급에 전공의 시험 성적도 최상위권이었다.
인턴 점수 조금 잘 받는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점수 차가 아니었다.
“교육수련부장 말로는 요즘 피부과 경쟁률이 높지 않다고 하더구나. 좋은 기회 아니냐?”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일웅은 마침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만만치 않습니다. 올해만 해도 2등 졸업에 일도 잘하고 평판도 좋은 친구가 지원해서 다른 인턴들이 겁을 먹고 안 써서 경쟁률이 낮은 거고요. 내년에도 비슷할 텐데…… 면접 점수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그렇단 말이지. 그럼 적당한 ‘이벤트’가 하나 필요하겠구나.”
“이벤트…… 요?”
김정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원하던 피부과에 합격한 후에 긴장이 풀려서 ‘불미스러운 일’ 하나쯤 생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알겠습니다. 내년 지원자들 눈여겨보겠습니다.”
그제야 김정현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환자 보다가 실수하는 것 없는지 사생활 문제는 없는지도 잘 살펴봐.”
‘쓸모없는 놈…… 아직도 하나하나 다 가르쳐줘야 하나.’
그가 나가자 원일웅은 책상에 놓인 레지던트 비상 연락망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신과 1년차라고 했던가.’
아주 잠깐 한국대병원 정신과 채종우 교수를 떠올렸으나 우직한 그의 성격상 딸을 잘 부탁한다고 따로 부탁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내 내선 전화를 들어 비서를 호출했다.
“원무과에 연락해서 올해 병원 매출 자료 제출하라고 하세요.”
- 네, 원장님.
“각 과별로 병동별 매출도 따로 뽑아달라고 하고. 특히 상반기에 적자가 있는 과들 위주로…….”
그는 한참 동안 이것저것 지시한 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국대에 얌전히 있었으면 이렇게 번거로울 일도 없었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