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chapter 21. 감별진단 (3)
* * *
9병동 아침회진.
“응급실 통해 입원하신 61세 남자 환자 정광철 님입니다. 한 달 전부터 시작된 불안 발작(Anxiety attack)을 주소로 방문하셨고…….”
“정신과적 과거력이 전혀 없는 60대 환자에서 처음 불안 증상이 시작되었을 때 감별해야 할 것들은 뭐가 있을까?”
황진호의 보고를 듣고 이광섭이 물었다.
발작적인 불안은 공황장애(Panic disorder)에서 특징적인 증상.
문제는 흉부 불편감과 호흡곤란 등 공황장애 환자들이 호소하는 증상이 심혈관계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증상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것이었다.
이런 부분들을 놓치고 공황장애에 대한 치료만 할 경우 자칫 골든 타임을 놓칠 수도 있었다.
“환자는 두근거림과 어지러움 등 다양한 신체 증상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단 심근경색과 부정맥과 같은 질환을 배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식과 만성 폐쇄성 폐질환과 같은…….”
황진호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공황장애 환자의 인지 왜곡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 증상으로 인해 절대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의료진도 환자 상태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네, 과장님. 입원 전 검사들을 검토해서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추가 평가 시행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이광섭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2년차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광섭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환자는 정세일 교수에게 보고하도록 하세요.”
“정세일…… 교수님이요? 다음 달에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정신과 조교수 정세일.
지난 1년간 존스홉킨스에서 연수 중이던 그가 귀국한 모양이었다.
“아내분 HNP(추간판탈출증, 허리디스크)가 나빠져서 지난달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예정보다 빨리 이번 달부터 근무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황진호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정세일이 누구던가. 막내 교수답게 환자 진료며 연구 모두에서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논문 머신’일 정도.
선배들에게 듣기로 환자 진료와 의무기록에 대한 기준도 높아서 담당 레지던트가 되면 ‘환자의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 담당의는 응급실에서 봤던 황진호 선생이 하는 것으로 하고…….”
이광섭이 병동 담당의까지 지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그 환자분 제가 담당하고 싶습니다.”
시현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천 선생이?”
“시현아, 내가 볼 차례인데…….”
이광섭도 황진호도 의아하다는 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마침 천 선생 담당 환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권원주의 말에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벽에 걸린 병동 현황판을 바라보았다.
“담당했던 환자들이 지난주에 모두 퇴원했군요.”
“네, 다들 예상보다 경과가 좋아서 일찍 퇴원하셨습니다.”
병동 전체로 보면 남은 베드가 거의 없을 정도로 환자가 넘쳤지만, 이상하게도 시현의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 환자는 천시현 선생이 보도록 합시다.”
“네, 과장님.”
이광섭이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늦은 나이에 발병한 신체 증상으로 안 그래도 신경이 쓰이던 환자였는데, 평소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던 시현이 선뜻 맡겠다고 하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또 신세를 지네…….’
생각해보면 학기 초부터 시현의 담당 환자들은 금방금방 좋아져 일찍 퇴원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황진호가 담당할 환자도 시현이 맡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정세일 교수의 담당 환자를 피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병상 회전율 1위 – 빠른 퇴원은 환자에게도 병원 경영에도 좋습니다. 동료 의료진의 신뢰도가 상승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2,000P)]
“고마워, 마침 환자분들 경과가 지지부진해서 퇴원을 못 시키고 있었는데…….”
황진호의 담당 환자는 8명.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한명 한명이 만만치 않은 환자들이었다.
“괜찮아. 환자 안 보고 있는 것도 마음이 불편해.”
시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뜻하지 않게 포인트까지 획득한 상황.
그로서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래. 서로 여력 있을 때 돕고 살자고. 이번 주는 네가 ‘한가’하니까…….”
빠직.
하지만 황진호의 다음 말에 시현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핸드폰.
- 선생님, 응급실 인턴 김병수입니다. 31세 남자 환자분으로 환청과 망상 공격적인 행동을 주소로…….
위이이잉.
- 선생님, 외래인데요. 진철영 교수님이 찾으세요. 입원 필요한 분이신데 병실에 안 올라가겠다고 버티고 계셔서…….
“…….”
황진호의 마법에 또다시 할 말을 잃은 시현이었다.
* * *
똑똑.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1년차 천시현입니다.”
응급실 환자와 외래 환자를 정리한 뒤 시현은 정세일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반가워요. 과장님께 따로 연락받긴 했는데, 환자 상태는 어때요?”
단정하게 빗은 짧은 머리.
군인을 연상시키는 바른 자세.
정세일은 회귀 전 시현이 알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교수님…….”
체감상으로는 몇 년 만에 그를 다시 마주한 시현은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천 선생 무슨 일 있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아, 아닙니다. 환자 보고 드리겠습니다.”
시현은 교수실에 방문하기 전에 정광철 환자와 면담한 내용들을 보고했다.
회귀 전 접점이 없던 환자라 ‘세상의 모든 차트’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황진호가 남긴 응급실 기록에 입원 후 새로 면담한 내용들이 더해지자 초진 보고답지 않게 꽤나 길어졌다.
“사실 천 선생 오기 전에 어드미션 노트(Admission note)는 이미 확인했어. 내용도 충실하고 환자를 성실하게 보고 있는 것 같네.”
보고가 끝나자 정세일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평소 감정 표현이 별로 없는 그의 성향을 생각하면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반응이다.
- 기록되지 않은 면담은 안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면밀한 의무기록 작성.
회귀 전 정세일 교수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이 환자 앞으로 치료 계획은?”
“일단 기존에 타병원에서 쓰던 벤라팍신을 에스시탈로프람으로 변경할 예정입니다.”
“그래? 에스시탈로프람을 선택한 이유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에스시탈로프람은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인데…… SSRI 단독으로 효과가 부족할 때 벤라팍신으로 교체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드물지 않나?”
정세일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환자의 기저 질환을 고려했을 때 적절하지 않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기저질환이라면…… 어떤?”
“입원 후 측정한 혈압은 130/85mmHg 정도로 조절이 안 되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불안 발작이 시작되면 180/110mmHg 까지 혈압이 치솟는 양상입니다.”
벤라팍신은 SNRI(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 클래스의 약물.
SSRI에 비해 추가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간혹 고혈압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고 기존 약물인 벤라팍신은 서서히 감량하자고.”
“네, 교수님.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순간 들리는 익숙한 알림음.
입원 바로 다음 날 환자의 특성에 맞게 약물 변경이 이뤄졌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딩동!
[system : 정광철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27/100 -> 35/100 퇴원까지 21일 2시간 10분 29초]
보고를 마치자 미미하게나마 치료 진척도가 올랐다.
입원 기간이 생각보다 길긴 하지만, 그건 아마도 정세일 교수가 약물 교체를 서서히 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치료 진척도가 올랐으니까.’
시현은 별다른 의심 없이 환자 보고를 마쳤다.
* * *
같은 날 저녁.
“정광철 환자는 벤라팍신 37.5mg 감량하고 에스시탈로프람 5mg 새로 시작했어.”
시현은 당직인 황진호에게 인계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혹시 불면 호소하시면 졸피뎀 6.25mg 추가하고 불안 증상 있을 때는…….”
“오케이. 그렇게 할게. 나도 응급실에서 봤던 환자라 히스토리 대략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프 다녀와.”
[SORA : 환자 활력 징후에 변동 있으면 수시로 보고하겠습니다.]
당직도 환자를 잘 파악하고 있고 유능한 비서가 수시로 환자 상태를 알려준다.
회귀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시현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 * *
병원 앞 건널목.
“천시현 선생!”
퇴근길을 재촉하는 인파 속에서 누군가 시현을 불렀다.
“아, 교수님.”
뒤를 돌아보자 낀 거구의 중년 남자, 채종우가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모직 코트에 흰 목도리를 한 채이진이 보였다.
결코 작은 키가 아니었던 그녀였지만, 채종우 옆에 서 있으니 유독 작고 귀엽게 느껴졌다.
“아직 저녁 전이지? 오늘 오프인가?”
채종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시현만 보면 밥을 사 먹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그였다.
“네, 교수님. 저녁 아직 안 먹었습니다.”
“잘 됐구먼. 식사 같이하지.”
“아빠, 갑자기 그러시면…….”
채이진이 당황하여 채종우를 말렸다. 혹여 시현이 불편하지나 않을까 눈치를 보면서.
“이쪽으로 가지. 내가 잘 아는 고깃집 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시현은 곤란한 기색 하나 없이 채종우의 제안을 반겼다.
‘시간이 빨라…….’
두 사람과 같이 밥을 먹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계절이 세 번 바뀌어 다들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어째 천 선생 소식은 안 들으려고 해도 자꾸 들려오는 것 같아.”
식당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자 채종우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 소식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최근에는 그와 얽힐 일이 없어 보이는데. 시현이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채이진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그녀로서도 금시초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우리 병원에 정신감정 목적으로 입원한 환자가 있었어. 김상진 교수 담당이었는데…….”
‘아, 조동규 이야기였구나.’
김상진의 이름이 나오자 시현은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조현병 증상이 범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쟁점이 있던 환자였는데 병원에서 한 검사 결과에 따르면…….”
채종우가 채이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각종 검사 결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담당 교수가 아니었음에도 꽤 자세히 알고 있는 걸 보니 채종우로서도 그를 관심 있게 봤던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애초에 환자가 아니었던 거지. 사회적 기능이 전혀 저하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김상진 교수님이 환자에 가깝다고 판정했는데…… 천시현 선생님이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 때문에 결과가 뒤집힌 거예요?”
채종우의 설명에 채이진이 감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셈이지. 이쯤 되면 김상진 교수하고 거의 천적 관계 아닌가? 지난번 PGR 때도 그러더니.”
“환자가 아닌 건 정말 우연히 알게 된 겁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깝기는 했다. 회귀 전 경험이 아니었다면 시현 또한 모르고 지나갔을 일이었으니까.
“겸손하기는. 아무튼, 학회에서 김상진 교수 만나게 되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아주 이를 갈고 있으니까. 허허허.”
같은 병원 교수가 망신을 당했다는 데도 채종우는 시종일관 싱글벙글이었다.
“자, 어서 들지. 여기 고기가 정말 맛있어.”
“아, 네.”
채종우의 권유에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으려는 찰나.
딩동!
[SORA : 정광철 환자의 혈압이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위이이잉.
알림음과 동시에 시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R1 황진호]
핸드폰에 뜬 황진호의 이름에 시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병원에서 전화가…….”
“그래. 급한 것 같은데 얼른 받지.”
채종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현은 수신 버튼을 눌렀다.
- 시현아, 큰일 났어! 정광철 환자분이 갑자기 쓰러지셨어!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흘러나오는 다급한 목소리.
시현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