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chapter 21. 감별진단 (4)
- 시현아, 큰일 났어! 정광철 환자분이 갑자기 쓰러지셨어!
다급한 목소리에 시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갑자기 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은 불안 증상이 심할 때 종종 동반되는 증상이다.
‘하지만 실제로 의식을 잃는 경우는 드문데.’
오프인 사람에게 따로 전화할 정도라면 환자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야? 환자 바이탈은?”
- 어지럽다고 하셔서 혈압 쟀을 때는 160/100mmHg까지 올랐다가 지금은 90/70mmHg 정도로 갑자기 떨어졌어. 쓰러지면서 머리도 세게 부딪치셔서 지금…….
혈압이 불안정한 데다 두부 외상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환자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구체적인 통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더라도 분위기만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
채종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네, 교수님. 담당 환자분이 바이탈이 흔들려서 복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밥 한 끼 하자는 거였는데. 어서 가보게.”
그의 말에 서둘러 식당을 나서려는 찰나.
“저도 같이 가서 볼게요. 아무래도 내과적인 문제 같은데요?”
채이진이 선뜻 시현을 따라나섰다.
“내과 당직 응급실에 있으면 바로 못 올 수도 있어요. 그때까지만 도와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선생님도 오프신데…….”
“선생님 환자분은 안 괜찮을걸요? 어서 가요. 아빠, 이따 봐요!”
시현이 만류하는 속도보다 채이진이 짐을 챙겨 일어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어, 그래. 조심히 다녀…….”
채종우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식당을 빠져나갔다.
‘열심히 하네. 동료들하고도 잘 지내고.’
그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흐뭇한 표정으로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다 먹지? 허허허.”
졸지에 고깃집에서 혼자 고기를 굽게 된 상황만 아니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하려는데.
“채 교수, 오랜만이네.”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의외의 인물.
“잠깐 앉아도 될까?”
원일웅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그에게 다가왔다.
* * *
“방금 그 환자 어떤 환자예요? 기저질환은요?”
“공황장애로 응급실 통해 입원한 분이고 고혈압 외에 별다른 과거력은 없습니다.”
두 사람은 환자 이야기를 하며 병원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환자 상태는?’
[SORA : 정광철 환자의 간호기록을 출력합니다.]
시현은 시스템창을 통해 환자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오후 내내 별다른 증상 호소가 없었고 저녁 식후 안정제와 공황장애 치료제도 늦지 않게 복용했다.
간호기록 상으론 딱히 증상이 나빠질 만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직전까지도 웃으면서 다과를 들었다는 걸 보면…….’
면회 온 보호자들과 병동 홀에서 담소를 나누다 쓰러졌으니 별다른 스트레스도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원인이?’
“기본적인 혈액 검사는 병동에서 나갔을 테고, 우선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치셨다고 했으니까 brain CT 촬영을 해야겠죠?”
시현이 속으로 환자 상태를 가늠하는 사이 채이진이 말했다.
“네, Non-Con(조영제 없이)으로 빨리 찍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차피 환자 지하 촬영실로 내려가야 하니까 CT에서 별다른 이상 없으면 곧바로 Cardiac Echo(심장 초음파)도 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1년차 막바지인 탓일까? 그녀의 머릿속에는 환자를 어떻게 평가할지 계획들이 이미 잡힌듯했다.
하지만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심장 초음파를? 누가?’
초음파는 환자 상태를 실시간으로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도구긴 했으나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교수들이 모두 퇴근한 이 시간에는 검사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터.
초응급 상황이 아닌 바에야 당직 교수를 병원으로 불러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 시간에 초음파를 볼 수 있는 분이 안 계실 것 같은데요?”
“제가 볼 거예요.”
“네? 선생님이요?”
“따로 공부해서 어느 정도 볼 줄 알거든요. 펠로우 선생님만큼은 아니겠지만요.”
당직이 아닌데도 따라와 환자를 봐주는 것도 놀랄 일인데 1년차가 초음파를, 그것도 심장 초음파를 볼 줄 안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환자분이 병동에 계시면 포터블(이동식) 가져다가 봐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병동에 올라가서 환자 상태 파악하고 있을게요.”
병원 로비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각각 9병동과 이동식 초음파기기가 보관되어있는 심혈관 중재센터를 향했다.
* * *
9병동 병실.
“아니, 약을 어떻게 썼길래 우리 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진 겁니까? 집에 계실 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요!”
상기된 표정의 남자 보호자가 황진호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녁 약을 복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쓰러졌기에 환자 상태가 나빠진 것을 순전 약물 변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 원인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병동에 다른 환자분들도 계시니 일단 진정하세요.”
“진정이요? 지금 진정이라고 했어요? 당직 말고 우리 아버님 담당 의사 당장 불러주세요! 직접 설명을 들어야겠으니까!”
“교수님은 퇴근하셨고 병동 담당 선생님은 오늘 비번이어서 지금 바로 보실 수는…….”
“아니, 비번이면 나몰라라 해도 되는 겁니까? 환자가 곧 죽게 생겼는데?”
“…….”
현기증에 혈압이 약간 불안정한 정도라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반박하기에는 보호자가 너무도 기세등등했다.
‘365일 병원에 있을 수도 없고…….’
환자 상태가 나빠졌을 때 담당 의사가 바로 달려와 확인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현실적으론 불가능에 가까웠다.
혹시라도 시현이 아직 병원에 있을까 전화도 해봤지만, 분위기상 밖에 있는 것 같았다.
“지금 필요한 검사들을 진행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리시면…….”
철컥.
황진호가 보호자들을 달래듯 이야기하는데 별안간 병동문이 열렸다.
“시, 시현아! 오프인데 돌아온 거야?”
“아니, 환자가 쓰러졌는데 담당 선생님 이제야 오시면 어떡합니까?”
반기는 황진호와 비난하는 보호자 사이의 온도 차가 극명했다.
“바뀐 약물 때문에 증상이 악화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환자분 조금 더 진찰해본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찰로 되겠어요? 정밀 검사를 빨리해야죠!”
“그것도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지금은 야간이라 어렵다고 이야기해야지!’
빈말로 진정될 보호자가 아니었다. 도대체 ‘정밀 검사’는 언제 하느냐고 들들 볶아댈 것이 눈에 선했다.
“환자분 안정실로 이동해주시고 Normal Saline 달아주세요.”
“네, 선생님!”
“내과에서 협진 올 겁니다. 심장 초음파 포터블로 하겠습니다.”
‘응? 벌써?’
황진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시현에게 환자 상태를 알린 지 불과 20분 남짓.
어느 틈에 협진을 넣은 건지도 의아했지만, 심장 초음파를 볼 펠로우가 즉시 와준다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철컥.
그 사이 병동문이 다시 열리고.
‘1년차 선생님이 왜?’
채이진이 초음파 기계를 끌고 들어왔다.
“환자분 이쪽에 계세요.”
검사 준비를 마친 환자가 벌써 안정실에 누워있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매끄러운 진행.
어느새 보호자들도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황 발작이 심할 때 환자는 죽을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고 심하면 실신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실제로 생명이 위급한 상황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채이진이 환자를 검사하는 동안 시현은 병동 테이블에 앉아 보호자들을 안심시켰다.
“아, 네…… 아까는 너무 놀라서 그만.”
보호자들도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담당 의사가 24시간 병원에 있지는 않지만, 여기 당직 선생님께서 필요한 검사는 다 지시하셨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저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보호자들이 이번에는 황진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음번에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니까.’
일단 상황을 정리한 공은 황진호에게 넘기기로 했다.
당직 의사를 믿지 못하고 사사건건 담당 교수를 찾도록 해서는 곤란했으니까.
가뜩이나 불안이 높은 보호자들이라 당직 체계에 대한 신뢰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약간 진정된 보호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철컥.
또다시 병동 문이 열리고.
황진호의 동공이 한 번 더 커졌다.
“교수님 오셨습니까?”
시현과 황진호가 동시에 정세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실시간으로 간호기록이라도 챙기고 있었던 것인지.
시현으로서도 의외의 방문이었다.
“환자 상태는 어때?”
그 또한 병동에 도착하자마자 환자 상태부터 물었다.
“Syncope(실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차례 혈압이 치솟았다가 저혈압이 관찰되어 지금 안정실로 옮겨서 Cardiac Sono 진행 중입니다.”
시현의 대답에 정세일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안정실 쪽을 바라보았다.
‘조치가 빠르군.’
퇴근 전 담당 환자의 간호기록을 확인하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해외 연수를 마친 후 처음 맡은 환자 상태가 좋지 않자 걱정이 되어 즉시 병동으로 올라 와본 것.
그런데 자신보다 빨리 병동에 도착한 것으로도 모자라 바로 내과 협진을 내고 검사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보호자들 표정도 괜찮고.’
간호기록에서는 흥분해서 당직의에게 소리를 지른다고 했는데, 의외로 안심한 듯한 보호자들의 표정 또한 인상적이었다.
시니어 교수인 이광섭과 진철영 모두 레지던트들을 다그치지 않는 천성이 너그러운 사람들.
주니어인 자신이 해외에 가 있는 동안 기강이 해이해지지나 않을지 걱정했는데 완전히 기우였다.
“좋아. 일단 검사 결과를 기다려보도록 하지.”
딩동!
[system : 정세일 교수의 사용자에 대한 신뢰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정세일 또한 안심한 표정으로 스테이션에 앉아 채이진이 검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20여 분.
“일단 심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지금은 바이탈도 안정적이고요.”
안정실에서 나온 채이진이 말했다.
“여기 보시면 특별히 regurgitation(심장 판막의 역류)도 없고 EF(심박출률)도 60% 이상이라 괜찮습니다.”
“일과 시간도 아닌데 검사해줘서 고마워요. 우선은 내과적인 원인은 대부분 배제된 것으로 봐도 될까요?”
정세일이 채이진에게 물었다.
비록 1년차 레지던트이긴 했으나, 따로 시간을 내어 와준 타과 소속이라 한껏 예의를 갖춘 모습이었다.
“빈맥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심전도도 정상입니다. 순환기 내과적인 원인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수고 많았어요. 꼼꼼하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네. 검사하는 김에 Thyroid(갑상선) 쪽도 함께 봤는데, 깨끗했습니다.”
간혹 갑상선 기능 항진과 같은 질환에서 불안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채이진 또한 그 부분을 고려한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덕분에 보호자들도 한결 안도한 표정으로 환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이만…….”
모두가 안심한 상황. 채이진이 초음파기기를 정리하며 병동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정광철 환자의 생존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생존 확률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