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83화 (83/195)

83화 chapter 21. 감별진단 (6)

시스템창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을 때 시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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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외래 조기 입성]

난이도 S

삼아대병원 최초!

1년차에 외래 진료실을 획득하였습니다.

사용자의 명성이 원내에 퍼집니다.

성공 조건 – 외래 오픈을 희망하는 환자 20인 이상 + 교수 3인 이상의 허가

성공 보상 - 닥터 천시현의 외래 진료실

실패시 - 패널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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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딴 게 왜 보상이야!’

내용을 보면 시현에게 진료실이 배정되어 외래 진료에 투입된다는 것.

3년차는 되어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외래 진료를 1년차에 시작한다는 건 이례적이기는 했지만, 이걸 과연 보상으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었다.

‘……일만 늘어나는 거 같은데?’

외래 환자를 진료한다고 해서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 축하드립니다! 초과 근무에 당첨되셨습니다!

이런 느낌이랄까.

아무리 봐도 이건 보상 자체가 패널티였다.

문제는 왜 이 시점에 퀘스트의 성공 조건이 활성화되었느냐는 것인데, 이어진 정세일 교수의 말을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연수 마치고 귀국한 기념으로 교수님들하고 점심을 먹다가 천시현 선생 이야기가 나왔어.”

“제 이야기요?”

그동안 특별히 밉보인 일은 없었으나 교수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다는 말에 급 관심이 쏠렸다.

“이광섭 교수님께서 외래에 유독 천시현 선생 진료를 희망하는 환자들이 많다고 하시더라고.”

‘이광섭 교수님 환자분들이 왜…….’

이광섭은 불안장애 분야의 대가로 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정신과 명의를 꼽으라면 꼭 들어갈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의사였다.

특히 그가 운영하는 사회공포증 클리닉은 대기가 1년 이상 밀려있을 만큼 인기가 있었고.

그런 이광섭 교수의 외래 진료를 받는 환자들이 왜?

시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정세일이 입을 열었다.

“병동에서 천 선생이 담당했던 환자들이 그런 문의를 많이 한다고 하던데, 솔직히 난 반대였거든.”

‘왜 반대를?’

이 시점의 정세일 교수와는 아무런 접점이…….

외래가 열리는 것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 터였다.

시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병동에서는 담당 교수의 책임 아래 레지던트가 진료하는 것이지만, 외래는 달라. 1년차가 지도 감독 없이 온전히 모든 책임을 떠안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었어.”

‘아 그래서…….’

딱히 시현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기보다 1년차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두 분 교수님이 왜 천 선생을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아. 외래 진료, 한번 해볼 생각 없어?”

정세일의 제안에 시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광섭, 진철영 그리고 정세일까지 시현이 외래 진료를 일찍 시작하는데 동의한 상황.

회귀 전에도 병동에서 관계가 좋았던 몇몇 환자들이 시현의 외래는 따로 없는지 묻기도 했지만, 극히 소수였기에 이런 고민은 처음이었다.

“환자분들이 찾아주신다니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시현은 이내 완곡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

“경험이라…… 처음부터 능숙한 사람은 없고 결국 경험은 쌓아가는 것 아닌가? 처음 외래 진료를 보는 의사에게 더 중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해?”

“더 중요한 덕목이요?”

“오늘 환자 보니까 나 레지던트 때 병동에서 담당했던 환자가 떠오르는데…….”

정세일은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전공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 *

16년 전, 명성대병원 정신과 의국.

“정신과 1년차 정세일입니다.”

- 세일아, 외래에서 환자 한 명 병실로 올라갈 거니까 네가 담당의 해라.

외래에서 걸려온 전화.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네, 치프 선생님. 어떤 환자…….”

- 그걸 일일이 말해줘야 해? 내가 너한테 노티라도 하랴?

“죄송합니다. 외래 기록 참고하도록 하겠…….”

뚝.

정세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치프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환자에 대해 간단한 설명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잠시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보다 치프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불안이 더 큰 시기였다.

‘패닉(공황장애, Panic disorder) 환자인가…….’

전자의무기록(EMR, Electronic Medical Record)이 일반화되기 전.

정세일은 외래로 내려가 차트를 확인한 후에야 환자의 진단명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차트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진단명뿐.

‘이게 무슨…….’

영문 필기체인지 룬문자인지 모를 글씨들이 차트를 메우고 있었다.

‘이래서는 환자 파악이 되지 않아.’

치프 레지던트가 환자를 면담한 내용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약물 이름과 용량은 확인할 수 있었다.

Paroxetine 40mg에 Clonazepam 1mg.

공황장애 환자들에게 흔히 처방되는 약물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정세일이 조심스럽게 4년차 공부방 문을 열었다.

“새로 입원하신 환자분 관련해서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내가 차트 참고하라고 하지 않았었나?”

치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게…… 어떤 내용인지 읽을 수가 없어서…….”

“1년차도 끝나가는데 대략 파악할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까지 하나하나 알려줘야 해?”

“죄송합니다.”

잘못한 것은 딱히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숙였다.

치프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환자에 대한 정보는커녕 욕만 실컷 얻어먹을 것 같았다.

“진단은 패닉.”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치프는 선심 쓰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광장공포증이 동반됐고 주증상은 현기증과 두근거림이다.”

하루에도 수시로 공황발작을 겪는 심한 환자로 불안이 심하고 약물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아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환자분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까? 기질적 원인이랄지…….”

“특이사항? 아주 ‘전형적인’ 패닉인데…… 40대 초반의 젊은 남자에게 뭐가 있을까? 병동에 올라가면 추가 검사 진행해보던가.”

치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와… 전자의무기록이 없던 시절에는 차트를 못 알아봐서 힘든 일도 있었겠네요!”

정세일의 말에 황진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그 시절에는 그랬지. 하지만 덕분에 깨달은 게 있어.”

“깨달음… 이요?”

황진호가 반문했다.

깨달음이라니.

아무리 봐도 까칠한 치프 만나서 고생한 것밖에 안 들리는데.

“진료의 연속성에 대한 거야.”

그의 말에 시현은 회귀 전 겪었던 정세일을 떠올렸다.

레지던트들을 격의 없이 대하기는 했지만.

환자 진료에 대해 누구보다 엄격했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의무기록을 강조했다.

- 환자의 병력(病歷)은 레지던트가 병원에서 수련하는 기간보다 깁니다.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다른 의사가 같은 환자를 이어서 진료하게 된다는 뜻.

그때를 대비하지 않고 환자에 대해 혼자서만 알고 있으면 담당의로서 환자를 잘 본다고 한들 진료의 연속성이 무너진다.

“기록되지 않은 면담은 안 한 것이나 다름없어.”

시현 또한 선배들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며 병원을 떠날 때 꽤 많은 환자들을 인계받았다.

대개는 차트 만으로도 어느 정도 환자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더러는 부실한 기록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면담을 다시 했던 경우도 있었다.

‘면담이 원활하지 않아서 병원을 옮긴 환자들도 제법 있었지.’

지나고 나니 정세일 교수가 했던 말들이 더 와닿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내 환자들을 이어서 진료할 후배들을 나와 비슷한 수준 또는 그 이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지.”

어떤 면에서는 이광섭보다 진철영보다 더 교육자다운 면모가 있는 그였다.

타산지석(他山之石).

보통은 선배 레지던트가 말리그였노라고 술자리 안줏거리로 욕하며 넘어갈 일에서 정세일은 뭔가 의미를 찾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환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채이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일단 입원 후에는 기본적인 검사들을 진행했는데, 역시나 치프 선생님이 예상했던 것처럼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지.”

“그렇다면 그분 말처럼 공황장애 환자였던 건가요?”

황진호의 질문에 정세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일반적인 공황장애 환자였다면 그의 기억에 이렇게 오래 남을 이유가 없었다.

“일단 기존 약물을 증량했고 효과 부족으로 교체도 했지만, 증상은 잡히지 않았고 급기야 병동에서 쓰러지기까지 했어.”

그 말에 레지던트들의 시선이 저절로 정광철 환자를 향했다.

시점만 다를 뿐 여러모로 비슷한 두 환자였다.

“심혈관계 문제가 있었던 건가요?”

“맞아. 급성심근경색 그것도 STEMI(ST절이 상승하는 심근경색의 일종)였어.”

헉.

황진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급성심근경색이라면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막혀 심장에 괴사가 생기는 상태가 아니던가.

불안 증상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는 의료사고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초기에 심전도 변화를 잘 잡아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

후우.

당직 때 비슷한 일을 겪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신과로 입원했다가 순환기 내과에서 퇴원한 환자였네요.”

“순환기 내과? 아니야. 스텐트 시술까지 마치고 내과에 입원하는 동안 ‘뒤늦게’ 급성심근경색의 원인이 밝혀졌거든.”

입원 후 한참 만에 원인이 밝혀질 정도라면 드문 질환이 분명했다.

“그 원인이 혹시 크롬친화세포종… 이었습니까?”

시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맞아. 관상동맥은 제대로 뚫렸는데 혈압이 계속 불안정했어. 이런저런 검사 다 해보고 복부 CT와 24시간 소변검사까지 하고 나서야 확진을 할 수 있었지.”

자신이 레지던트 때 놓쳤던 진단을 늦지 않게 찾아낸 탓이었을까?

정세일은 흡족한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시니어 레지던트가 됐다고 늘 하던 대로 타성에 젖어서 환자를 보면 반드시 놓치는 게 생기지. 나는 외래를 볼 때 중요한 덕목이 ‘초심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진단이 쉽지 않은 환자를 1년차 다운, 지극히 ‘교과서적인’ 접근으로 풀어낸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뭐, 교과서만으로 진단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일단 병동에서 진료했던 환자를 외래에서 팔로우업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신환은 최소한으로 보면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자고.”

정세일이 한껏 추켜세웠지만 시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단순히 일이 늘어나는 건 하면 되지만…….’

변수가 생기는 건 여러모로 까다롭다.

쉽게 결정할 사안은 아닌듯했다.

* * *

“선생님 덕분에 병변을 빨리 찾았어요.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선생님이 복부까지 보자고 안 했으면 저도 놓쳤을 거예요.”

병동을 나와 다시 식당으로 가는 길.

시현의 고맙다는 말에 채이진은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제가 늘 배우는 기분이에요. 선생님은 내과 하셨어도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빈말이 아니고 진심이었다.

1년차 초반에도 남혜미가 놓칠 뻔한 간손상을 시현이 발견하지 않았던가.

“배우다뇨. 저는 1년차 선생님이 Sono(초음파) 잡는 거 처음 봤어요. 꽤 능숙하시던데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아는… 교수님이 계셔서요. 따로 부탁드렸어요.”

한국대 출신인 채이진에게 아는 교수님이 있다는 게 의아했다.

이유야 어쨌든, 바쁜 1년차 스케쥴에 시간을 내서 초음파를 배운다는 건 보통 열정은 아닌듯했다.

“채 교수님은 아직 식당에 계실까요?”

“집에 먼저 가신다고 문자는 하셨는데…… 아까부터 아빠 연락이 안 되네요.”

“쉬고 계신가 봅니다. 저 때문에 따로 시간도 내주셨는데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괜찮아요. 혼자서 갈 수 있어요.”

“아, 네…….”

회귀 전 만큼은 아니어도 이제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던 찰나.

“아까 밥을 제대로 못 먹고 나와서 배가 고픈데 저녁… 같이 드실래요?”

채이진이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때였다.

위이이잉.

[02-20xx – 0119]

미처 메뉴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채이진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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