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chapter 22. 네 탓이 아니야 (1)
위이이잉.
[02-20xx - 0119]
응급실이었다.
“내과 채이진입니다. 저 오늘은 오프…….”
간혹 당직표를 잘못 보고 실수로 연락하는 간호사이겠거니 생각하는데.
상대방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 헉. 채이진… 선생님?
채이진을 호출했고.
채이진이 받았을 뿐인데.
되려 전화를 건 쪽이 더 당황한 것 같았다.
“네, 저예요. 응급실에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저… 그게…….
머뭇거리던 간호사가 어렵게 운을 뗐다.
“……혹시 채종우 님 보호자가 선생님이세요?”
* * *
어떻게 응급실까지 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빠! 괜찮아요?”
응급실 내에서도 중환자 구역.
채이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채종우에게 다가갔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85 / 60mmHg HR 110/min
낮은 혈압에 빠른 맥.
곳곳에 든 멍과 출혈의 흔적들.
다발성 외상이 의심되는 상태였다.
[채종우 남/55 인턴 김영은 / R3 유근웅]
금방이라도 일어나 괜찮다며 너털웃음을 지을 것만 같은데.
의식 없이 누워있는 채종우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회귀 전 4년차 때까지도 왕성한 학회 활동을 하던 그였다.
“119 통해 내원하셨습니다. 외상으로 출혈이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뇌, 흉부, 복부 CT 처방했습니다.”
외과 3년차 유근웅이었다.
워낙 여러 곳을 다친 탓에 어디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를 상황이었지만, 일단 프라이머리(주 진료과)는 외과로 정해진 듯했다.
“네… 감사합니다…….”
채이진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평가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검사결과 나오는 대로 알려드릴게요.”
유근웅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지금 BP가 낮은데 추가로 해야 할…….”
채이진을 곧장 몸을 일으켜 스테이션을 향했다.
“선생님, 잠시만요.”
그런 그녀를 시현이 붙잡았다.
가족이 의식을 잃고 눈앞에 누워있는데, 진정이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다른 치료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불안은 전염된다.
흔들리는 시선과 떨리는 목소리를 매개로.
가족으로서 느끼는 공포와 의사로서의 우려가 뒤섞여 다른 의료진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
“일단은 보호자로서 교수님 곁을 지켜 주세요. 오늘은 내과 의사로 오신 게 아니니까요.”
사려 깊지만 단호한 말투.
시현이 채이진을 달래듯 말했다.
“다른 가족분께 연락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놀라실 것 같으면 조금 있다가…….”
보호자 한 명이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당장 내일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데, 환자를 혼자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없…… 어요. 아무도.”
의외의 대답. 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채이진의 오빠가 레지던트 시절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남은 가족이 채종우 교수와 채이진 둘 뿐이라는 것은 처음 들었다.
내과 의사로서, 아니 응급실 인턴 시절부터 각종 질병과 사고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봐온 그녀였다.
그러나 객관적인 의사의 시선으로 그들을 보는 것과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가족을 보는 것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수시로 채혈을 하고 주렁주렁 수액을 단 채 방사선사가 이동식 X-ray 기기로 여기저기를 촬영하는 동안,
의사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어… 어…… 펄스 없습니다!”
그때였다.
채종우가 누워있는 병상 바로 건너편에서 인턴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환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채종우와 마찬가지로 다발성 외상 환자였다.
“컴프레션! 바로 시작해!”
그 말에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들이 모여들었다.
“V-fib(심실세동)입니다! 200줄 차지!”
“에피(epinephrine) 바로 주세요!”
인턴들은 교대로 흉부 압박을 실시했고, 응급의학과 3년차의 지시로 전문심폐소생술(ACLS)이 이어졌다.
채이진 또한 평소 같았으면 도울 것이 있는지 알아보거나 교대로 흉부 압박이라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굳어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섬뜩한 감각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처음 올 때부터 상태가 너무 안 좋았는데, 보호자는 연락이 안 되고…….”
채종우의 상태를 보러 온 유근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너편을 보며 말했다.
“아버님 차를 운전했던 대리운전기사라고 하더군요. 운전미숙인지 아니면 급발진이라도 있었던 건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신주를 들이받았다고 합니다.”
“아빠가… 술을 드셨다고요?”
의외의 포인트에서 채이진이 반문했다.
“그렇지 않았을까요? 아니라면 굳이 왜 대리운전을?”
유근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의 기억에 채종우가 술을 마시는 모습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니, 전혀 없었다.
레지던트 시절에는 선배들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해 간혹 마셨다고 했는데, 교수가 된 후로는 완전히 술을 끊었다고 했다.
“이게 다 나 때문이에요. 이쪽으로 오겠다고 고집하지만 않았어도…….”
채종우의 손을 꼭 쥔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채 교수님은 한국대에 남기를 원했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채이진은 삼아대병원을 선택했고, 그래서 채종우가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선생님, 우선 여기 좀 앉으세요.”
“네…….”
시현은 보호자용 의자를 끌어와 채이진을 앉혔다.
그리고는 건너편이 보이지 않도록 레일 커튼을 쳤다.
CPR 팀을 도울 수 있는 상태도 아닌데 보고 있으면 마음만 더 심란해질 것 같았다.
“…… 선생님 탓이 아닙니다.”
지금 상황에서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회귀 전에도 채이진은 삼아대병원 내과에서 수련을 받았지만, 채종우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선택과 오늘의 사고가 무관하다는 것을 시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 때문에…….’
애초에 황진호에게 환자를 보도록 했다면.
직접 가서 보더라도 채이진이 따라오려는 것을 말렸다면.
아니, 처음부터 채종우와 접점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경우의 수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쯤 유근웅이 태블릿을 들고 나타났다.
“채이진 선생님, 일단 복부 CT 올라온 것 확인했는데… 여기 Hemoperitoneum(복강내출혈)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복부 대동맥 손상도 의심되고요.”
“대동맥이라면…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인가요?”
“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흉부 CT상 혈흉이 있고 심장 손상이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CT만으로 정확하게 파악은 안 되겠지만, 출혈 정도에 비해 혈압이 더 떨어지는 건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범위가 넓어…….’
당장 급하지 않은 골절 치료는 미룬다고 하더라도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장기들이 포진해있는 복부와 흉부에 대한 처치에 급했다.
당장 외과와 흉부외과가 협업해야 할 상황.
‘어쩌면 신경외과도.’
사고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지연성 뇌출혈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계속 의식이 저하된 상태인 것도 걱정스럽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떤 과가 메인이 되어 수술을 진행할지 교수들끼리 논의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좀 설릴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해야…….’
다음 순간 시현의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그때.
“저… 강백혁 교수님께 수술 부탁드려도 될까요?”
채이진이 조심스레 유근웅에게 물었다.
놀랍게도 시현이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외과 교수 강백혁.
소속은 외과지만, 외과와 흉부외과 더블보드(전문의 자격증이 둘인 경우)로 외상외과 파트를 담당하고 있었다.
응급의료센터에서 중증외상 진료는 그가 도맡아 하는 편이었다.
‘강백혁 교수님 실력이라면…….’
혼자서도 능히 전문의 둘 아니, 셋의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과 간에 의견 교환하는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강 교수님이요? 오늘 당직 아니실 텐데.”
“그래도 한 번 여쭤볼게요. 비번일 때도 병원에 계실 때가 많아서…….”
유근웅의 입장에서도 강백혁이 환자를 받아준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여러 과에 전화를 걸어 어레인지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그라면 다 죽어가는 환자도 살려낼 것만 같은 믿음이 있었다.
문제는 외과 레지던트인 그가 같은 외과 소속 교수인 강백혁에게 연락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비번인 상사에게 당장 나와달라고 요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연락해보실 수는 있겠지만…… 저는 일단 절차대로 흉부외과에 연락해보겠습니다. 우선 수술방 잡는 게 급하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1년차 레지던트에 불과한 채이진이 타과 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것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절차를 따지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절박했다.
그녀는 즉시 강백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 이진아, 무슨 일이야?
어렵지 않게 통화에 성공했다.
당직인데도 통 연락이 안 되는 레지던트들이 많은데, 강백혁은 비번임에도 바로 전화를 받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채이진을 대하는 강백혁의 말투.
병원 안에서는 레지던트들에게 늘 존대를 하던 그였으나, 사적인 통화에서는 편하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전화 드려 죄송해요. 아버지께서 사고를 당하셨어요…….”
채이진은 간신히 울음을 참아가며 강백혁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 하필이면 이럴 때…… 서두르면 한 시간 내로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최대한 빨리 갈게.
후우.
병원에서 좀 떨어져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와 연락이 닿은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강 교수님과는 아는 사이신가요?”
통화가 끝나가 시현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리 사명감 넘치는 의사라고 해도, 늦은 시간에 전후 사정 따지지 않고 바로 오겠다고 하는 건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네, 한국대 선배시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어요.”
‘어려서부터라면…….’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채이진 본인보다는 그녀의 부모님들과 더 인연이 있다고 봐야 했다.
채종우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만사 제쳐두고 달려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채종우가 얼마나 버텨주느냐였다.
* * *
잠시 후.
“저, 흉부외과에서 아까 그 환자 응급수술 때문에 바로 수술방 열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유근웅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채이진에게 말했다.
“다행히 강백혁 교수님 연락이 돼서 지금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정말요?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저도 정 안되면 강 교수님께 부탁드려보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유근웅은 정말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교수님 오실 때까지 수술 준비를…….”
그가 안심한 표정으로 마취과에 전화를 걸려던 찰나.
띠- 띠-
채종우에게 연결된 모니터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다소 빠른 박동이기는 했으나 규칙적인 리듬을 보이던 심전도가 돌연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V-fib(심실세동)…….’
심전도 파형을 확인한 채이진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