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85화 (85/195)

85화 chapter 22. 네 탓이 아니야 (2)

규칙적인 리듬을 보이던 심전도가 돌연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V-fib(심실세동)…….’

심전도 파형을 확인한 채이진이 하얗게 질렸다.

심실세동(Ventricular fibrillation).

심실이 불규칙하고 무질서하게 수축하는 상태.

규칙적으로 수축 이완을 반복하며 혈액을 순환시켜야 할 심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사실상 심장이 멎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3번에 어레스트! 제세동기 준비해주세요!”

유근웅이 다급하게 외치며 흉부 압박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레지던트들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모여들었다.

20분 전 건너편 침상과 정확히 같은 상황이었다.

딩동!

[system : 환자의 생존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치료 진척도 7/100 생존 확률 15%]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생존 확률이…….’

낮다.

지금껏 봐왔던 어떤 환자보다도.

현기증이 일고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시현은 채이진의 표정부터 살폈다.

‘초점이… 없어.’

늘 총명해 보이던 눈동자가 텅 비어있었다.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 때, 몸은 생존을 위해 심박수와 호흡수를 높인다.

근육에 충분한 혈액과 산소를 공급하여 ‘싸우거나(Fight) 또는 도망칠(Flight)’ 준비를 하는 것.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는 위협에 처할 때, 몸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굳어버리기도 한다.

이른바 얼어붙기 반응(Freeze response)이었다.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시현이 채이진을 데리고 처치실로 들어갔다.

그대로 뒀다가는 트라우마에 노출될 것 같았으니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뭐라도 해야…….”

“컴프레션(흉부 압박)이라도 하실 건가요?”

그 말에 채이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머리칼이 곤두섰다.

운이 좋아 채종우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괜찮겠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일이었다.

병동에서 혹은 중환자실에서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오늘의 악몽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살아나 그녀를 괴롭힐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해주셔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이요?”

“강백혁 교수님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요. 수술방부터 잡아야 할 텐데…… 마취과 정영민 선생님께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시현은 최대한 차분하게 계획을 설명해나갔다.

‘영민 언니를 어떻게 알고?’

시현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채이진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마취과 치프 정영민.

한국대 출신으로 채이진의 동아리 선배이기도 했다.

외과계 레지던트도 아닌 시현으로서는 접점이 없을 법한데. 어떻게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확실히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취과에서 수술 방을 열어준다고 해도 흉부외과에서는 당장 수술을 할 수 없다고…….”

“……있어요. 개흉 수술을 하실 수 있는 분.”

시현의 말에 채이진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모시고 올라갈 겁니다. 선생님은 수술방에서 기다려주세요.”

* * *

10분 뒤.

시현이 응급실로 돌아왔을 때,

채종우의 생존 확률은 더욱더 낮아져 있었다.

딩동!

[system : 환자의 생존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치료 진척도 7/100 생존 확률 15 -> 11%]

강백혁이 도착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

서둘러야 한 시간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고.

‘시청타촉의 포션.’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CPR 팀이 채종우를 에워싸고 있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뭐라도 단서를 얻어야 했다.

[시청타촉의 포션 00 : 02 : 59 ]

- 여기 신환 누가 와서 좀 봐줘요!

- 인턴! 거기 똑바로 안 잡을 거야?

- 12번 베드 환자 CT실로 내려 주세요!

응급실은 채종우 외에도 수십명의 응급환자들이 진료받는 곳이었다.

가뜩이나 시끄러운데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자 정신이 사나워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채종우의 상태에 집중했을 때.

“200줄 차지! 떨어지세요!”

두 번째 전기 충격이 들어가고 있었다.

“에피 계속 주세요!”

추가로 에피네프린 한 앰플이 들었지만 여전히 정상 심박동을 회복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미 흉부 CT에서 심장 손상이 의심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슴팍에 멍이 든 것을 보면 흉골(앞쪽 가슴 한 가운데 위치한 납작한 뼈) 골절이 있을 수도 있었다.

“2분 됐어! 교대해!”

한 사람이 2분 이상을 실시하면 압박의 효율이 떨어져 적절한 심박출량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렇게나 심폐소생술은 체력 소모가 극심한 술기였다.

시행하는 사람이 그럴 진데 받는 환자에게도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정지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CPR을 하고는 있지만, 분당 100회 이상의 묵직한 압박은 심근에 추가 데미지를 줄 것이 분명했다.

쩌적- 쩌적-

이내 뼈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갈비뼈… 아니, 흉골인가?’

CPR을 하는 본인조차 듣지 못할 만큼의 작은 소리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근- 두근-

어느 때보다 반가운 심장 뛰는 소리가 시현의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시현이 반사적으로 채종우의 경동맥을 짚었다.

“잠시만요! 리듬 돌아왔어요!”

시현이 한참 흉부 압박을 하고 있던 인턴을 제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리듬 확인할 때 안 됐는데? 인턴, 압박 계속해!”

응급의학과 3년차, 엄주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압박을 중단하지 않는 것.

심폐소생술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다.

멈춘 심장을 대신해 외부 압박으로 혈액을 순환시켜주지 않으면, 저산소증으로 뇌 손상이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CPR 중에도 불가피하게 압박을 잠시 중단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2분마다 심장 리듬이 정상으로 돌아왔는지를 확인할 때였다.

그 전에 심전도를 확인한답시고 수시로 압박을 중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

“분명 심박동이 있었어요!”

“리듬이 돌아왔는지를 어떻게 알아?”

엄주영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압박 중에는 제대로 된 심전도 확인이 어려운 것이 사실.

경동맥이나 대퇴동맥에서 맥박이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 맥박이 자발적인 것인지 압박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잠시면 됩니다. 잠시면…….더 압박하다가는 심근 손상이 심해집니다!”

환자가 정신과 교수라고 했던가.

무슨 사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현의 눈빛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인턴, 멈춰봐.”

가이드라인과는 맞지 않았지만 일단 그의 말을 따라보기로 했다.

“네?”

그 말에 인턴이 고개를 갸웃했다.

압박을 멈추는 것은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심폐소생술을 종료할 때나 있는 일이었다.

“멈추고 잠시만 리듬 보자.”

영문 모를 중단 요청에 인턴이 손을 뗐다.

압박으로 인해 출렁이던 심전도가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정말…… 돌아왔어.’

정상 심박동을 의미하는 균일하고 날렵한 모양의 QRS파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펄스 있으니 일단은 지켜봅시다…….”

‘이대로 얼마나 버텨줄지.’

심장이 다시 뛰고는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엄주영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환자의 수축기 혈압은 80mmHg 남짓. 여전히 저혈압이 심했다.

이곳저곳을 다쳤으니 출혈량도 상당할 것이고 무엇보다 심장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외상이 심한데 흉부압박까지 더해졌으니.’

이미 너덜너덜해진 심장 근육이 파열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추가 압박을 막은 시현의 심정이 이해도 됐다.

리듬이 돌아온 것을 무슨 수로 빨리 발견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어찌 됐건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았다.

띠- 띠- 띠-

‘BP(혈압) 유지가 안 돼…….’

각종 승압제(혈압을 올려주는 약)를 들이붓다시피 했으나 혈압은 미세하게 조금씩 떨어져 갔다.

우려했던 대로, 이내 채종우에게 연결된 모니터가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70 / 45mmHg]

순식간에 낮아진 혈압.

이제는 모니터에 표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버렸다.

딩동!

[system : 환자의 생존 확률이 떨어집니다.]

[치료 진척도 7/100 생존 확률 11 -> 6%]

‘이대로…… 끝인가.’

시현의 눈에도 절망이 감돌았다.

인과관계를 따질 수 없고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바뀐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걸.

울먹이던 채이진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엄 선생, Sono(초음파) 준비해줘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수님.’

시현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조광필은 굳은 표정으로 채종우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Pericardiocentesis(심낭천자) 키트도 가져오고!”

“네! 알겠습니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레지던트들도 돌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술방은 어떻게 됐나?”

“네, 채이진 선생이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이대로는 수술 시작 전에 expire(사망)할 거야. 강 교수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

조광필이 라텍스 장갑을 착용하며 초음파 프로브를 잡았다.

헉.

그 모습에 엄주영을 비롯한 레지던트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Parasternal Long Axis View.

환자의 흉골 측면에서 심장을 길게 본 단면에서 심낭 내에 다량의 혈액이 고여있는 것이 보였다.

심장 파열이 의심될 정도로 많은 양.

조광필은 프로브 각도를 바꿔가며 심낭 천자를 위한 위치를 잡아갔다.

푸욱.

이내 정확한 위치로 들어간 바늘이 채종우의 심낭을 꿰뚫었고.

연결된 관을 따라 고여있던 혈액과 혈종이 배출되었다.

딩동!

[system : 환자의 생존 확률이 증가합니다.]

[치료 진척도 7/100 생존 확률 6->26%]

헉헉.

“수술방 준비됐습니다.”

채이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95/70mmHg…….’

그녀의 표정에 약간의 안도감이 스쳤다.

마취과에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심정지 상태나 다름없는 상태였는데, 지금은 아까보다 바이탈이 많이 안정되었다.

‘심낭 천자를 벌써…….’

자신 또한 마취과 치프와 최대한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온 것인데, 그 사이 심낭 천자가 끝나있었다.

배액 된 혈액 양을 봤을 때 채이진은 다시 한번 놀랐다.

‘저 혈액이 심낭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수술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레스트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광필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채 선생이 걱정이 많겠어. 일단 고비는 넘겼지만…….”

급한 불만 껐을 뿐, 상황이 나아진 것이 아니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채이진은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다.

“강 교수하고 방금 통화했는데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그래서 개흉까지는 내가 먼저 하고 있겠다고 했어.”

“네, 감사합니다.”

응급의학과 교수님이 집도를 한다니 조금 의아한 상황이었지만, 강백혁이 올 때까지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쳐준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천시현 선생은 ‘약속’ 꼭 지키도록 하고.”

조광필이 묘한 미소를 띤 채 시현에게 말했다.

“네, 교수님. 명심하겠습니다.”

약속? 무슨 약속?

채이진은 세상 궁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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