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86화 (86/195)

86화 chapter 22. 네 탓이 아니야 (3)

* * *

10분 전.

‘가속 포션’

[SORA : ‘가속 포션’을 사용합니다.]

응급실을 나온 시현은 곧장 조광필의 교수실이 있는 연구동을 향해 달렸다.

‘제발…… 계셔야 할 텐데.’

김정현에 관한 일로 몇 번 조광필을 찾아가 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교수실 위치를 알고 나니 회귀 전에는 몰랐던 사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과 의사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에도 그의 방에는 종종 불이 켜져 있곤 했다.

시니어 아니, 시니어 중에서도 나이가 좀 있는 편이었음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병원에서 자는 날이 많은 것 같았고.

응급의학과 생활을 오래 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일중독 성향이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저 사모님과 관계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연구동 7층 제일 끝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한 시현은 나는 듯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똑똑.

“교수님, 천시현입니다.”

대답을 기다리기까지의 몇 초가 몇 시간과도 같이 느껴졌다.

실수로 불을 안 끄고 퇴근한 거였다면 그야말로 낭패 아닌가.

“천 선생? 이 시간에 어떻게…… 들어오게.”

다행히도 조광필은 전기를 허투루 낭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열린 문틈으로 조광필의 교수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니터에 띄워진 각종 도표와 PDF 파일들. 논문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교수님,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시현은 최대한 호흡을 정돈해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강백혁 교수가 오는 중인데…… 그 전에 환자가 익스파이어 할 수도 있다는 건가.”

“네, 교수님. 결국 개흉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개흉이라.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인 것 같은데. 이 시간에 날 다 찾아오고…… 도대체 무슨 일인 건가?”

임상 진료과와도 안 맞고 당직 체계에서도 한참 벗어난 부탁이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조광필은 뭔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다.

“환자분이 동기 레지던트 아버님입니다. 그리고 한국대병원 정신과 교수이기도 하고요.”

“그것… 뿐인가?”

조광필이 반문했다. 단순히 지인이라서 특별히 부탁하러 왔다고 하기에는 시현의 표정이 뭔가 절박해 보였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 말에 조광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먼저 가 있게. 환자 CT 확인하고 바로 가지.”

“교수님, 감사합니다!”

“대신 한가지 약속해줄 것이 있는데…….”

이어진 조광필의 말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 * *

중앙 수술실 앞.

어느덧 조광필이 채종우를 데리고 수술실로 들어간 지 2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강백혁 교수가 병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들어간 후로도 조광필은 한참 동안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두 분이 수술을 같이하고 계신 건가?’

급한 건 심장 파열과 혈흉이었지만, 복강 쪽 출혈도 절대 가볍지 않았다.

특히나 복부 대동맥 손상은 심해질 경우 바로 사망할 수도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밤샘 수술이 예정된 가운데, 시현과 채이진은 중앙 수술실 앞 복도에 마련된 대기실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전혀 몰랐어요. 조광필 교수님이 더블보드였다니…….”

“원래 소아 흉부외과 쪽을 전공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국내에서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를 처음 선발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

초창기 응급의학과는 외과나 흉부외과 전문의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펠로우 마치고 소아 심장 수술 쪽으로 해외 연수도 다녀왔다고 하셨는데…….”

응급의학과로 오기 전에는 전도유망한 흉부외과의였던 그는 어떤 이유에선지 삼아대병원 응급의학과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아까 보니까 다들 잘 모르는 눈치던데…… 선생님은 조광필 교수님과 친하신가 봐요.”

시현 또한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이긴 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라 레지던트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가깝다고 할 수도 있으려나…….’

병원을 통틀어 시현이 회귀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는 했다.

최세영의 부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호의적이기도 했고.

김정현 사건 때도 시현의 편에 서주었다.

원장단과 척을 질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교수님들을 제외하면 원내에서 시현에게 가장 우호적인 스텝이라고 봐도 좋았다.

사실 이 시간에 조광필을 찾아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도 내심 그가 들어줄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아까 조광필 교수님이 말씀하신 ‘약속’은 뭐였어요?”

“그건…….”

- 단순한 우연이면 좋겠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당분간은 예전에 겪었던 일들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최대한 조심했으면 좋겠어. ‘약속’할 수 있겠나?

시현은 교수실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자칫 채종우가 죽기라도 하면 과도하게 위축되지나 않을지 우려하는 듯했다.

“아, 별건 아니었어요. 제때제때 응급실 콜 잘 받고 내년 레지던트 1년차들 교육할 때도 인턴들 괴롭히지 않게 잘 가르치라고 하셨죠.”

“아… 네…….”

채이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근무 태도가 안 좋은 레지던트라면 모를까. 시현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광필이 굳이 그런 걸 강조했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괜찮… 을까요?”

말없이 수술실 전광판을 보고 있던 채이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사실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초기 처치는 나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외상 정도가 심했다.

뛰어난 써전이 수술을 집도하고는 있지만, 모든 환자가 소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저 괜찮다는 말, 무사히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괜찮을 겁니다. 무사히 돌아오실 거예요.”

그리고 그 말이.

시현의 입에서 나왔다.

딩동!

[system : 환자의 생존 확률이 상승합니다.]

무심하게 먼 산을 보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응급실에서 ROSC(자발순환회복) 상태로 올라가셨고 강 교수님도 워낙 수술 잘하시는 분이니까요. 별일 없을 겁니다.”

아까보다 시현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

“선생님은… 뭐랄까, 좀 신기한 거 같아요.”

“신기요?”

“네. 그냥 툭 던지는 말인데 묘하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드니까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입으로는 괜찮을 거라고 말하면서, 눈빛으로 표정으로 우려를 드러낸다면 누구도 안심시킬 수 없다.

[치료 진척도 56/100 생존 확률 49 -> 51%]

반면 시현에게는 언제나 그렇듯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니긴 한데…….’

실시간으로 생존 확률이 올라가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이진아! 괜찮아?”

복도 끝에서 누군가 채이진을 부르며 다가왔다.

서혁상, 연정서 그리고 정은형.

채이진의 내과 동기들이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당직 중에 잠깐 틈을 내서 달려온 것 같았다.

“어떡해…… 아버님 괜찮으셔야 할 텐데.”

연정서가 채이진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강백혁 교수님이 집도하시니까 괜찮을 거야. 인턴 때 보니까 수술장에서 손이 안 보이더라고.”

“부디 무사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을게.”

중간중간 콜을 받느라 응급실과 병동에 다녀오기는 했지만, 내과 동기들은 채이진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여럿이서 수술방 앞에 앉아있으니 채이진도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르르륵.

중앙 수술실의 자동문이 열리고.

수술용 멸균 가운을 걸친 강백혁이 걸어 나왔다.

채이진도 함께 있던 레지던트들도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굳은 표정의 강백혁.

뭐라도 묻고 싶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보다 훨씬 긴장한 기색의 채이진이 그의 표정을 살피는데.

“일단 수술은 성공적이야.”

후우.

날숨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상대정맥과 우심방 연결 부위가 10mm가량 찢어져 있었어. 출혈이 많긴 했지만 잘 봉합했고.”

이어진 그의 말에 등 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어레스트가 한 번만 더 생겼으면…… 아니, 조금만 수술이 늦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강백혁은 수술용 두건을 벗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천시현 선생님이라고 했나요?”

“네, 교수님.”

“조광필 교수님께 들었습니다. 덕분에 수술을 빨리 시작할 수 있었다고……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평소 존경하던 채 교수님이 무사하시다니 저도 너무 기쁩니다.”

그런데 보통은 수고가 많았다고 하지 않나?

‘감사’라는 말에 미묘한 어색함을 느끼던 찰나.

“채 교수님은 저에게도 각별한 분이세요. 대학 선배시기도 하고 또…….”

강백혁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채이진의 눈치를 살폈다.

“아, 일단 중환자실로 옮겨서 경과 보도록 할 테니 채이진 선생님도 일단 복귀하도록 하세요. 지금 상태만 봐서는 금방 나빠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백혁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채이진은 이내 시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정말 고마워요. 또 연락 드릴게요.”

그리고는 다른 동기들과 함께 병동을 향했다.

하나 남은 가족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해도 바로 놓을 수 없는 것이 병동 주치의 일이었다.

따로 예비 인력이 편성된 것도 아니고 고년차에게 잠깐 부탁한다고 해도 환자 인계하는 데만 한세월이었으니까.

‘부디 무사하시기를.’

[치료 진척도 56/100 생존 확률 51%]

아까부터 51%에서 멈춰있던 생존 확률이 마음에 걸렸지만, 당장은 더 떨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 * *

일주일 뒤, 본관 14병동.

“교수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덕분에 괜찮아. 마음 같아서는 내일이라도 퇴원해도 될 것 같은데.”

채종우가 밝은 표정으로 시현을 맞아 주었다.

중환자실에서 이제 막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라 바로 퇴원은 어려울 것이었지만, 안색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휴. 아빠 때문에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 왜 안 드시던 술을 드시고 대리운전을 부른 거예요?”

채이진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게 말이다. 기분이 좋아서 오랜만에 한잔했지. 기분이 좋아서…….”

“갑자기 무슨 좋은 일이 있는데요?”

“네가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학생 때까지만 해도 마냥 어리게만 봤었는데 이제 어엿하게 내과 의사가 되어서 자기 몫을 하는 걸 보니…….”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순간 서글픈 표정이 스쳤다.

이 모습을 아내와 함께 봤더라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곧 2년차예요. 다들 이 정도는 한다고요!”

그 말에 채이진이 발끈했다.

병원 생활 잘하는 모습 두 번 보여줬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으니까.

“다들 그 정도… 는 아닌 것 같은데요?”

옆에서 지켜보던 시현이 웃으며 말했다.

“교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동기들보다 채이진 선생님 실력이 월등한 건 사실이니까요. 심초음파를 그 정도로 볼 줄 아는 1년차는 전국에 선생님뿐일 겁니다.”

“그게 꼭 그렇지는…….”

시현의 칭찬에 채이진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오, 그 정도란 말이지?”

채종우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굳은 표정의 노신사가 정장 차림의 수행원들과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누구지?’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

시현이 노신사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이.

“오셨… 습니까.”

지금껏 누워있던 채종우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그를 맞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