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chapter 22. 네 탓이 아니야 (4)
“자네들은 잠깐 나가 있게.”
노신사는 수행원들을 내보내고 채종우의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여긴… 어떻게?”
“왜? 내가 못 올 데 왔나?”
어리둥절한 채종우를 향해 노신사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백혁이한테 다 들었어. 죽다 살아났다면서?”
문병을 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냉랭한 말투.
시니어 교수인 채종우 조차 저리 깍듯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높은 사람인 듯했다.
‘한국대병원 원장님이라도 되나.’
노신사의 정체가 궁금해지던 찰나.
“할아버지…… 아빠 아직 환자예요.”
채이진이 곤란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래, 이진이는 그동안 잘 지냈니? 1년차 힘들지는 않고?”
채종우를 대할 때와 180도 다른 태도.
노신사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네. 이제 많이 익숙해졌어요.”
“네가… 걱정이 많았겠구나. 혹시라도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할애비한테 얘기하거라.”
지금 보니 아까 병실에 들어왔을 때의 굳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자네는 이진이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어쩌자고 하지도 못하는 술을…… 아무튼,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야.”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뒤늦게 시현의 존재를 확인한 노신사가 물었다.
“레지던트 동기예요. 할아버지.”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채이진의 소개에 시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우리 이진이 친구로구먼. 무슨 과인가? 내과? 아니면 외과?”
“아, 저는 정신과 레지던트입니다.”
“뭐어? 정신과?”
다음 순간 노신사의 얼굴에 심상치 않은 노기가 감돌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시나?’
시현이 의아한 얼굴로 분위기를 살피는데.
위이이잉. 위이이잉.
때마침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외과 R3 유근웅]
“천 선생, 바쁠 텐데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봐요. 다음에 학회에서 또 봅시다.”
채종우는 마침 잘 됐다는 듯 인사를 건넸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시현은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다.
* * *
“네, 선생님.”
- 협진 때문에 전화했다. 지금 시간에는 너한테 전화하는 게 맞지?
수신 버튼을 누르자 유근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7 : 35 PM]
본래 타과 협진 업무는 3, 4년차의 일이었지만, 일과 시간이 끝난 뒤에는 당직 의사 업무였다.
“네, 맞습니다. 말씀하세요.”
“ICU(중환자실)에 김종수 님이라고 있는데…….”
귀에 익은 이름에 눈이 번쩍 뜨였다.
“TA(교통사고)로 입원한 분 아닌가요? 채종우 교수님 차를 운전했던…….”
“맞아. 그분이야. 수술 후에 아직도 의식이 불안정한 상태인데, stupor(혼미) 상태였다가 가끔 의식 돌아오면 불안이 너무 심해…… 잠깐 와서 봐줄 수 있나?”
‘중환자실 환자 출력해줘.’
[SORA : 중환자실 환자 리스트를 출력합니다.]
[김종수 남 / 32 담당의 R3 유근웅 / 담당 교수 Prof. 강백혁]
‘외상 외과로 전과했고…… 의식은 아직도 혼미한 상태.’
담당 레지던트가 작성한 의무기록에 따르면, 바이탈은 대체로 안정적이지만 저산소증으로 인한 뇌손상이 의심된다고 했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일과 중 잦은 의식 수준의 변화.
그리고 거기에 동반된 심한 초조감.
일단은 섬망(delirium)을 의심할 만한 소견이었다.
* * *
중환자실에 도착했을 때, 김종수는 다시 의식이 저하되어 누워있었다.
당장은 면담이 불가능한 상태.
‘벤틸레이터(인공호흡기)는 이미 뗐고 바이탈도 대체로 안정된 것 같읕데…….’
아직 염증 수치가 다소 높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감소 추세였다.
‘김종수 환자 검사 기록 출력해줘. 투여 중인 약물도.’
[SORA : 김종수 환자의 의무기록을 출력합니다.]
시스템창을 통해 환자 상태를 살펴보고 있을 때 저쪽에서 환자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 으으…….”
허공으로 손을 내젓더니 곧장 왼팔에 잡힌 수액 라인을 뜯으려 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수액 뽑으시면 안 돼요!”
그 모습에 담당 간호사가 다가가 환자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으… 아아…….”
그러나 환자는 진정되지 않았고, 이번에는 반대편 손으로 비위관(코를 통해 위로 연결된 관)을 뽑으려 했다.
“환자분, 진정하세요. 여기 병원입니다. 콧줄 뽑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중환자실 인턴이 환자의 반대편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여전히 의식이 명료하지 않아.’
시현이 걱정스레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오늘 오후부터 의식 변화가 더 심한 것 같은데. 어떤 것 같아?”
환자의 담당의인 외과 3년차 유근웅이었다.
“검사 결과를 쭉 봤는데 당장은 섬망이 악화될 만한 원인은 관찰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고 당시 생긴 뇌출혈이 아직도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이왕 환자 보러 왔으니까 면담해보고 노트 남겨줘.”
‘정신과적 면담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근웅이 부탁한 것도 있고, 일단은 면담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저, 김종수 환자분.”
“으… 으으…….”
“정신이 드세요?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으… 아아…….”
지남력(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인지)을 확인하기 위한 기본적인 질문조차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저는 정신과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외과에서 협진 의뢰해주셔서 왔습니다.”
“…….”
역시나 별다른 반응이 없어 면담을 종료하려던 찰나.
“정신… 과요?”
갑자기 눈에 초점을 찾은 환자가 시현에게 반문했다.
“아, 네. 의식 변화가 있어서 정신과에서 왔습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저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기록… 남기지 마세요.”
그저 다가가 말을 걸었을 뿐인데 의식을 잃었던 환자가 깨어나다니.
그냥 깨어난 것도 아니고 또렷한 음성으로 대화까지 가능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근웅과 담당 간호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종수 님, 저 알아보시겠어요? 외과 담당의 유근웅입니다.”
“…….”
하지만 의식을 찾은 것도 잠시.
유근웅이 묻는 말에 환자는 다시 눈을 감고는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나는 못 알아보시네……. 방금 뭐였어? 어떻게 면담한 거야?”
유근웅이 풀이 죽은 얼굴로 시현에게 물었다.
“옆에서 보셨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렇지? 환자가 갑자기 깨어나길래 무슨 특별한 기술이라도 있나 해서. 환자분이 잠시 정신이 드셨나 보네.”
“네. 초조감이 있을 수는 있는데 그래도 벤조디아제핀(진정제의 일종)계열의 약물은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현은 주의할 점들 몇 가지를 협진 노트에 남기고 섬망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약물들을 처방했다.
‘독특한 케이스네.’
내내 혼미한 의식 상태를 보이다가 정신과 의사가 왔다는 말 한마디에 의식을 찾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환자.
회귀 전에도 협진 담당 레지던트로서 섬망 환자들을 많이 봤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의식 돌아오면 다시 와봐야겠어.’
채종우가 보기에도 뭔가 우울하고 불안해 보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시현은 속으로 다음 면담을 생각하며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그것이 김종수 환자와의 마지막 면담이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 * *
일주일 뒤.
“904호 김수민 환자 복부 x-ray 추가 처방할게요.”
스테이션에 앉아 처방을 입력하는데 모니터에 팝업이 떠올랐다.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병원 OCS(처방전달시스템, Order Communication System)를 통해 들어온 메시지들이었다.
총 두 건. 발신인은 각각 채이진과 유근웅이었다.
[아빠 상태가 많이 호전되셔서 오늘 퇴원하세요. 선생님 덕분입니다. 다음에 꼭 같이 식사하자고 하셨어요.]
채이진이 보낸 메시지에 반가운 마음이 든 것도 잠시.
[지난번에 협진 봐줬던 김종수 환자 새벽에 expire 하셨다. 그 뒤로 계속 의식이 돌아오지 않더니만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돌아가셨어.]
뒤이은 유근웅의 메시지를 확인하자 착찹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분명 대화가 됐었는데…….’
유근웅에 따르면 줄곧 상태가 안 좋았는데 그때만 잠깐 정신이 든 것 같았다고 했다.
같은 날 같은 차 안에서 사고를 당한 두 사람의 경과가 이렇게나 달랐다.
“예비 3년차 선생님들 외래 진료 준비는 잘하고 있나요?”
회진을 마치고 이광섭 교수가 말했다.
어느덧 전문의 시험이 코앞.
김민홍과 최지훈이 외래 진료를 하지 않게 되면서 빈 진료 시간을 이제 곧 3년차가 되는 김석용과 권진은이 맡게 되었다.
“네, 과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처음 해보는 외래 진료에 약간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제 시니어 레지던트가 되었다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리고 천시현 선생은…… 생각 좀 해봤습니까?”
이광섭의 시선이 이내 시현을 향했다.
정신과 과장으로 부임한 이래 아니, 지금은 명예 교수가 된 전대 과장 시절부터 따져봐도 1년차에 외래 진료를 시작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현에게 외래 진료를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시현의 외래 진료가 언제 열리는지 문의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물론 입원 중에 담당했던 환자들이 대다수였지만, 더러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 여기 천시현이라는 의사가 잘 본다고…… 다른 데 없는 좋은 약도 써준다던데 어디 가면 볼 수 있을까요?
조현병 치료제 ASP-9022에 대한 이야기였다.
알고 보니 이말순 환자의 딸이 환자 커뮤니티에 삼아대병원에서 새로 시작한 임상연구에 대한 글을 올렸던 것.
잘 낫지 않는 환청과 우울증이 확연히 개선되었다는 글에 무려 ‘천시현 교수님’의 진료 일정을 문의하는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 이번 연구 천시현 선생하고 진행해보고 싶은데 아직 진료실이 없어서…… 본격적으로 피험자 모집을 하게 되면 연구 담당 레지던트 전용 진료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리서치 센터장 강병우가 파격적인 제안을 해온 것.
- 외래 진료동에 정신과 진료실 하나를 추가 편성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필요한 의료기기가 있다면 저희 예산으로 구매해드리도록 하지요.
돈 되는 과가 아니라 멀쩡히 잘 돌아가던 진료실도 내놓으라는 둥 늘 찬밥신세 아니었던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이광섭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본인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시현 덕분에 정신과에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연구 실적이나 병원 내 정치에 욕심이 있는 과장이었다면 레지던트 따위는 갈아 넣어도 된다는 식으로 무조건 밀어붙였을 테지만, 이광섭은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꼭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부담스러우면 3년차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심 기대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저는…….”
의국원들의 시선이 시현에게 집중되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맡겨주신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 대답에 이광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요. 잘 생각했습니다. 힘든 점이 있으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도록 하고…….”
그리고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일단 일주일에 2타임 정도 그때그때 빈 진료실에서 시작해보도록 하고, 임상연구 전용 진료실이 확충될 예정이니까 거기서 진료하면 되겠습니다.”
‘연구 전용… 진료실?’
시현으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대학병원에서 진료실 한 칸이 갖는 경제적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과별로 다르기는 하겠지만, 하루에도 최소 수십 명 이상의 환자들이 진료받는 곳 아닌가.
같은 진료실도 정형외과에 주어졌다면 MRI나 근전도검사와 같은 고가 검사 처방들이 많이 나와 병원 재경영에 도움을 줄 터였다.
하지만 정신과는?
타과에 비해 많은 환자를 볼 수 없는데도 면담 수가는 낮게 책정되어있다. 게다가 심리검사 몇 가지를 제외하면 고가의 검사는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이고.
한 마디로 돈이 안 되는 과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회귀 전에는 없던 일에 자초지종이 궁금한 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