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88화 (88/195)

88화 chapter 23. 분노의 심리학 (1)

* * *

같은 날 저녁.

위이이잉.

일과 시간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이 울렸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오늘 당직이죠? 통화 괜찮아요?”

언제 들어도 발랄한 목소리.

리서치 센터 연구원 강서현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오랜만에 연락 드려요! 이번 주에 시간 어때요?”

“무슨 일입니까?”

“다른 건 아니고…… IM바이오 대표님하고 식사 한번 했으면 해서요.”

‘곽정수 대표가 왜?’

적대적 M&A를 면하게 되면서 시현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기는 했으나, 따로 식사를 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ASP-9022를 항정신병약으로 개발하려던 프로젝트…… 폐기하기로 했거든요.”

“그렇게… 됐군요.”

리서치 미팅에서 시현이 지적했던 건으로 임상연구가 중단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한편으로 마음이 무겁긴 했다.

하지만 그대로 뒀어도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을 연구 아니던가. 길게 보면 연구에 들어가는 시간과 자본을 줄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선생님이 ‘책임’을 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책임?

아무리 생각해도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구가 중단된 것은 안타깝지만 그건…….”

단지 IM바이오에서 만든 약이 항정신병약으로서는 별로라서이지 자신 때문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ASP-9022는 이제 새로운 ‘항우울제’로서 연구 디자인을 다시 하고 있는데요. 그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이 당연히 연구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된 거였어.’

강병우와 강서현 그리고 현 원장의 관계를 생각하자 이내 답이 나왔다.

두 사람은 직계 로열패밀리이고 원일웅은 회장님의 사위가 아니던가.

“외래 진료실…… 센터장님이 만드신 겁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정신과에서도 1년차 외래 열까 고민한다고 하시길래 마침 잘됐다 싶어서…….”

역시나 강병우의 작품이었다.

병원 경영에는 도움이 안 될 일이지만, 리서치 센터 실적을 생각해서 압박을 넣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일정 정해지면 알려주십시오.”

“네. 조만간 봐요!”

‘나쁠 건 없기는 한데.’

아직 예비연구 수준이기는 하지만, 항우울제로서 ASP-9022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기존 용량의 10분의 1수준으로 시작했기에 부작용도 많지 않아 보였고.

연구 실적을 차지하더라도 정신과에서 쓸 수 있는 진료실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에 없던 일인 탓이었을까?

가슴속에 막연한 불안감이 일기 시작했다.

“레지던트 합격 발표 나온 것 같은데?”

“정말? 누구누구 된 거야?”

통화를 마치자 스테이션에서 간호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이었지…….’

어느덧 12월도 중순을 지나고 있었다.

레지던트 선발 결과가 나오는 시기.

시현은 본인이 수험생이 된 양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 홈페이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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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아대병원에서 환자 중심 진료를 실천하실 예비 레지던트 선생님들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201x 삼아대병원 레지던트 합격자

안과 - 20108 하소영 20109 한민욱

정신과 - 20110 김원기 20111 노민혜

정형외과 - 20112 오희승 20113 이윤태

흉부외과 - 20114 설현수

...

...

* 아울러 지원해 주신 많은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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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무사히 합격했구나.’

결과를 확인한 시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혹여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을까 우려했으나, 회귀 전과 같이 김원기와 노민혜가 정신과에 합격했다.

외부 지원자들도 몇 명 있었다고는 하는데 원내 인턴을 선호하는 분위기상 실제 경쟁률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설현수 선생님도…….’

그 또한 예전과 같은 선택을 했고, 흉부외과의 유일한 신규 레지던트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회귀 전과 별다른 변화가 없음에 안도하던 찰나.

위이이잉.

결과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울렸다.

- 응급실 인턴 김원기입니다. 노티드리겠습니다. 29세 여환, 1시간 전부터 시작된 불안과 자해를 주소로…….

‘응급실 환자 출력해줘.’

[SORA : 응급실 재원 환자 리스트를 출력합니다.]

[이정미 여/29 인턴 김원기/ R1 시현]

‘이 환자가… 자해를?’

돈 문제로 사고를 자주 치는 남자친구 때문에 공황 증상을 종종 호소하긴 했어도 자해를 한 적은 없던 환자였다.

“알겠습니다. 응급실에 가서 마저 들을게요.”

노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시현이 말했다.

- 네, 감사합니다.

“상처 심하면 정형외과도 컨택 해주세요.”

-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합격 축하해요. 이제 예비 1년차가 됐으니 제대로 해봅시다.”

통화를 마친 뒤 시현은 곧장 응급실을 향했다.

* * *

“선생님, 환자 정형외과에서 보고 있습니다. 손목 열상이 있어서 봉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김원기가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껏 자해는 없던 환자였는데…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일단은 남자친구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원기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매번 그 인간이 문제군.’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로 돈을 빌리고 잠수를 탄 건지 레퍼토리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상처가 어떤가요? 깊이는?”

“왼쪽 손목에 Clean wound이고 Subcutaneous level입니다. Ligament injury는 없어 보입니다.”

피하 지방이 드러났지만 인대 손상은 없다.

일단은 정형외과에서 봉합과 드레싱만 마치면 면담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점점 더 위험한 방법으로 자해를 시도하다 뜻밖의 사고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전에 없던 걱정으로 시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휴, 수처 끝났다.”

[정병수 남/29 정형외과 1년차]

정병수가 다가와 라텍스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그래도 혈관이랑 인대는 비켜 갔어. 바로 보면 돼.”

“다행이네요. 형, 수고하셨어요.”

“다쳐서 온 환자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자해는 진짜 싫다. 면담 잘해서 다시는 안 오게 만들어줘.”

정병수가 넌덜머리를 냈다.

“보니까 진짜 죽으려고 한 건 아닌 것 같지 않아? 여러 번 긋기는 했어도 치명적인 건 없었어. 자기 힘들다고 쇼하는 거 아냐?”

‘주저흔인가?’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라도 가볍게 볼 수만은 없다.

자살 의도가 강하다고 해도 한 번에 치명상을 만들지는 못하니까.

“설마요. 뭔가 사정이 있었겠죠.”

“그런가? 난 차라리 몸이 힘들고 말지 정신과 환자는 죽어도 못 보겠더라고.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아무튼, 시현이 너도 고생이 많다. 김원기 선생도 합격 축하(?)해요.”

격려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정병수는 스테이션을 떠났다.

“정형외과는 끝난 것 같으니까 우리도 가보죠.”

“네, 선생님.”

[이정미 여/29 인턴 김원기 / R1 천시현]

면담실에 들어갔을 때, 환자는 이마를 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정미 님?”

“아, 선생님.”

시현을 보자마자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잘 지냈어요. 잘 지냈었는데…….”

이정미는 언제나처럼 직장도 꾸준히 다니고 얼마 전부터는 시현의 소개로 주기적으로 정신치료도 받고 있다고 했다.

“외래에서 신민승 선생님하고 상담하면서 정말 괜찮았었거든요.”

정신과 펠로우 신민승.

소아정신과 분야를 전공하고 있지만, 정신치료(psychotherapy) 쪽으로도 관심이 많았던 선배였다.

얼마 전 이정미를 의뢰했을 때도 흔쾌히 수락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친구가 또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혹시 이번에도 돈을 빌려주셨나요?”

“아니요. 상담 때 거절하는 법도 좀 배워야 한다고 해서 이번에는 끝까지 거절했어요.”

‘오호.’

예전부터 이정미를 봐왔지만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정신치료 자체는 괜찮았던 모양인데. 도대체 왜?’

안 하던 자해를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건 굉장히 잘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계속 거절을 하니까 남자친구도 지쳤는지 더는 말하지는 않더라고요. 그런데 며칠 전에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더니 연락이 완전히 끊겨버렸어요.”

“아니, 그건 오히려 잘된……. 흠흠.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순간 본심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가 이야기 좀 해보자고 해도 말이 없어요. 어디 간 걸까요?”

‘보나 마나 어디 PC방에 널브러져 있겠죠.’

“자취방 보증금 올려줘야 해서 예전에 빌려준 돈 일부라도 돌려달라고 했는데도 묵묵부답이에요.”

‘돈 갚으라고 하니까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절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환자 대신 소송이라도 걸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어디 가서 잘못된 건 아니겠죠? 실종신고라도 해야 할까요?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러다 또 돈 떨어지면 연락 와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상황에서 남자친구 걱정이라니.

시현은 애처로운 마음으로 이정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조치라고는 불안 증상에 대해 안정제를 투여하는 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주기적으로 면담하면서 의지할 수 있는 치료자를 소개했음에도 증상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똑똑.

시현의 고민이 깊어갈 무렵,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 면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미야! 괜찮아?”

20대 후반의 여성. 샛노란 염색 머리에 짙은 화장, 반짝이는 큐빅 네일이 인상적이었다.

“어떡해! 어떡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이정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누구…… 세요?”

“아, 친구예요. 정미는 괜찮은가요?”

‘술 냄새가…….’

술자리에 있다가 친구가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네, 다행히 인대 손상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선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정미야,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자자. 응?”

“응. 그럴까?”

“그럼. 그래야지. 집에 가면 혼자 있을 거잖아? 내가 불안해서 못 보내.”

그래도 옆에서 챙기는 친구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저 선생님, 정미 이제 데리고 가도 될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묻는 친구의 말에 시현의 속내가 복잡해졌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지만, 일단은 자해로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였다. 자살 위험도를 평가하고 심한 경우엔 입원 치료를 권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정미 님, 며칠만이라도 입원하시는 게 어떠세요?”

“…….”

“네? 입원이요? 제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환자가 망설이자 친구가 대신 대답했다.

“치명적이지 않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은 아닙니다. 가족분들과도 상의해보고 싶은데, 혹시 오실 수 있는 분이 계실까요?”

과거 몇 년간 한 번도 없었던 일. 분명 평소와 다른 뭔가가 있어 보였다.

“…….”

시현의 질문에 이정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정미가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딱히 없어서요. 할머니가 계셨었는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호자 할게요.”

“급하게 나오느라 입원 준비도 못 하고 왔어요. 오늘은 그냥 갈게요.”

친구도 왔고 일단 집으로 가고 싶은 듯했다.

‘어쩔 수 없나…….’

시현이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여기 서류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자의 퇴원 확인서.

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자의로 퇴실을 원할 때 책임 소재를 위해 사인을 받도록 한 서식이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한데.’

전에 없던 자해 행동. 그리고 반쯤 취해 못 미더운 보호자.

하지만 본인이 퇴실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억지로 붙들 수는 없었다.

“여기 했어요.”

이정미가 서류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는 덧나지 않게 주기적으로 소독해야 합니다.”

“네.”

“정신과 외래 진료는 최대한 빠른 날로 잡아드릴…….”

딩동!

퇴실 처방을 넣는데 별안간 들려온 알림음.

그리고 떠오른 알림창에 시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system : 이정미 환자의 생존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치료진척도 0/100 생존 확률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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