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chapter 23. 분노의 심리학 (2)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회귀 전 4년차 때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던 사람이 죽는다니.
보다 나은 결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환자에게 적절한 조언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만 못한 상황.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혹시 미처 몰랐던 다른 질환이?’
생명을 위협할만한 기저질환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시청타촉의 포션.’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화아악.
시현의 홍채에 투명한 빛이 일렁였다.
정상보다 다소 빠른 호흡. 가는 어깨 떨림. 미세하게 흔들리는 시선까지.
방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생생한 감각들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특별한 점은 없어.’
심박수가 조금 높고 호흡음이 거친 면은 있었지만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다.
‘질병이 아니라면…… 혹시?’
남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던 중 시현의 시선이 이정미의 얼굴을 향했다.
흰자위의 미세한 충혈. 그리고 화장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발적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환자의 목에서 띠를 두른 듯한 붉은 자국을 확인한 순간 시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맴인가?’
심하게 조르지 않아 얼른 눈에 띄지 않았지만 분명 삭흔(끈으로 목 부위를 압박하여 생긴 흔적)이었다.
병원에 방문하기 전 각기 다른 두 가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한 셈이었다.
‘카이트만의 안경.’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남은 가능성은 하나.
거의 확실할 테지만 최종 확인이 필요했다.
“이정미 님, 잠시만요.”
“네?”
환자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시현을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으신 것 맞죠? 처음 있는 일이라 걱정이 되는데.”
“그럼요. 아까는 너무 불안해서 순간적으로 그런 거예요. 친구랑 같이 있는데 설마 별일이야 있으려고요?”
[system : 이정미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보호자님, 속상해한다고 같이 술 드시면 안 됩니다. 취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자해를 더 심하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system : 이영지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이건 좋지 않은데.’
친구 기분 풀어준답시고 술을 권할 기세였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보호자였다.
“다음 주 월요일 외래 예약입니다. 그때 꼭 뵙겠습니다.”
“네, 그때 뵈어요.”
[system : 이정미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다시 외래로 오겠다는 말도 거짓. 이 정도면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 저희 이만 가볼게요. 정미야 가자.”
환자와 보호자가 면담실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김원기 선생님 잠깐 밖에서 기다려줄 수 있어요? 보호자님도요.”
“네? 갑자기 왜?”
김원기와 보호자가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환자분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시면 돼요.”
“아, 알겠습니다.”
김원기가 보호자를 데리고 나갔다.
두 사람만 남은 면담실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 무슨 일로?”
“…….”
이정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으나 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호구처럼 당하고만 살던 환자가 안타까웠고 현실적인 조언과 함께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치료자를 연결해준 것뿐 이었다.
분명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남자친구 때문에 힘들어하고 과호흡으로 응급실에 실려 오기를 수차례. 몇 년 뒤에 수천만 원의 빚을 지게 될 환자가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환자는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왔고 입원은 거부하고 있으며 생존 확률은 크게 떨어졌다.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온다.
굳이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나비효과는 어디에나 있었다.
애초에 몇 마디 조언만으로 환자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은 교만이 아니었을까.
‘그럼, 이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두 번의 자살 시도. 생존 확률 32%.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환자는 면담실을 나선다.
그리고,
죽는다.
급성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온 환자의 생존율도 이보다는 높을 것이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 해.’
가장 안전한 방법은 병동에 입원시킨 뒤 경과를 보는 것.
문제는 어떻게 설득하느냐였다.
현실감이 전혀 없는 조현병 환자나 양극성 장애 환자라면 정신과 전문의 소견과 보호자들의 동의로 어떻게든 입원시킬 수 있겠지만, 이 경우는 또 달랐다.
시현은 애처로운 눈으로 이정미를 바라보았다.
“이정미 님.”
“네?”
집에 가기로 한 마당에 따로 면담이라니.
환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친구분은 별일 아닌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좀 불안합니다. 혹시라도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하고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정말로요.”
이정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system : 이정미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정미 님을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친구도 같이 있고 괜찮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친구분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은 전혀 모르고 계신 것 같던데요.”
“얼마 전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만히 보니 눈이 충혈된 게 아직도 안 돌아온 것 같네요.”
시현은 짐짓 모른 체하며 화제를 돌렸다.
“지난주에 좀 바빠서요. 눈이 좀 피곤했던 것 같은데. 그게…… 왜?”
“화장은 하셨지만, 피부에 붉은 기도 덜 가셨어요.”
“그건 제가 피부가 예민한 편이라…….”
“목에 끈 자국에 모세혈관이 터진 흔적도 남아 있고요.”
‘그걸 어떻게?’
이정미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목을 맨 당시에야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며칠 지나면서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정미 님이 왜 그런 선택에 내몰려야 하는지. 정작 잘못하고 상처 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도대체 왜…….”
“너무…… 괴로웠으니까요.”
이정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버림받는 게 너무 두려워요. 그런 감정으로는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아요.”
“기회가 또 있지 않을까요? 살다 보면 분명히…….”
“뭐,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또 이런 일이 반복되면요?”
이정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내 문제인가 싶어서 정신치료도 받고 고치려고 노력하는데도 왜 안 되는 거죠? 왜 항상… 외롭고 공허하고 힘들기만 한 걸까요?”
회귀 전에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
벌써 비슷한 일을 벌써 여러 차례 겪은 듯 이정미는 감정적으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응급실에서, 그리고 3년차가 된 후에는 외래 진료실에서 종종 보던 환자였기에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었다.
늘 한심한 남자친구에 대해 불평불만을 내뱉을 뿐 몇 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인.
안타깝지만 한편으론 변화에 대한 저항이 심해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환자.
애초에 바뀔 가능성이 별로 없어서 적당히 들어주고 약물 용량을 조절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그저 그런 환자.
‘전혀 모르고 있었어.’
이정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익숙함에 갇혀 환자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던 건 시현 자신이었다.
“뭘 어떻게 더 해봐야…….”
이정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겁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시현이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분 일은 유감입니다. 죄송합니다.”
“그, 그건 선생님 잘못이…….”
시현으로서는 자신이 놓쳤던 부분에 대한 미안함으로 한 말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정미는 말을 더듬었다.
“집으로 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입원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신과에요? 입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혹시 모르죠. 지금 이대로 돌아가도 달라질 게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선생님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전 이미 서류에 사인도 했고 무슨 일이 생기든 불이익은 없으실 텐데요?”
“정말 그럴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살 생존자라는 말, 혹시 들어보셨나요?”
“음.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이라는 뜻인가요? 저처럼?”
“저도 정신과를 하기 전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반대예요. 누군가의 자살에 영향을 받는 주변 사람들을 말합니다.”
시현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남겨진… 사람들을 말하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환자들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이정미 님을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 충격을 받을 겁니다.”
“처음에야 그렇겠지만 뭐, 자연스럽게 잊지 않겠어요? 저는 가족도 없는데.”
“술자리에서 바로 응급실까지 달려온 친구가 있죠. 그리고 지금은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남자친구도 이정미 님 걱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정말…… 오빠가 그런 마음일까요?”
남자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이정미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요. 예전에 응급실 같이 오셨을 때 보니까 걱정하는 게 눈에 보이던걸요.”
지금까지 해온 걸 보면 환자 걱정이라고는 1도 하지 않을 위인인 듯했지만, 일단은 이렇게라도 말해두는 것이 나아 보였다.
“다른 지인들도, 그리고 저희도 마음이 안 좋을 겁니다. 분명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살 수 있는 환자가 죽었다면서 자책할 거예요.”
시현의 말에 이정미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다른 분들 마음까지 돌아볼 여유는 없어요. 그리고 제 의지로 퇴원한다는 건 서류에 사인했으니까 선생님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벌써 마음을 굳힌 듯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
시현은 착잡한 심정으로 자의 퇴원 확인서를 내려다보았다.
“말씀하신 대로 이 서류가 있으면 법적으로 면피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맞아요. 그러니까 저는 이만…….”
이정미가 그대로 면담실을 나서려는 순간,
우우웅.
기계음과 함께 종이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뒤를 돌아본 이정미가 놀라서 소리쳤다.
자의 퇴원 확인서는 이미 세단기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어, 어째서?”
“이건 환자분께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요.”
무덤덤한 얼굴로 시현이 대답했다.
딩동!
[system : 이정미의 생존 확률이 소폭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11/100 생존 확률 32 -> 43%]
역시나.
죽기로 결심했다고는 해도 자신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보는 상황은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불편하시겠지만 며칠만이라도 입원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떻게든 만회할 기회가 있었으면 해서요.”
* * *
[정형외과 진료 후 정신과 면담. 입원 치료는 refuse.]
[월요일 오후 외래 진료 예약함.]
“괜찮을까요?”
스테이션에 앉아 차팅을 하는데 김원기가 물어왔다.
“모르지. 그래도 충분히 설명했으니까,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셈인 것 같은데.”
시현이 만류에도 이정미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마지막엔…….’
[치료 진척도 14/100 생존 확률 49%]
생존 확률이 50 퍼센트에 근접했다.
함께 간 친구가 보호자 역할만 잘해준다면 월요일 외래 진료 때까지 별일은 생기지 않을 듯했다.
“아, 선생님. 아까 환자분이 작성한 서류 가지고 계신가요?”
“아, 그거? 아까 본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
‘원기야, 미안하다.’
예비 1년차 앞에서 환자가 작성한 서류를 파쇄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아… 기록실에 보내서 스캔해야 하는데. 어디 있지?”
김원기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떠난 환자를 다시 불러다 사인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 * *
다음 주 월요일.
위이이잉.
“정신과 시현입니다.”
“선생님, 외래인데요. 진철영 교수님이 찾으세요.”
오후 진료가 한창인 시간.
‘환자가 벌써 다녀갔나?’
굳이 진료 중간에 호출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바로 가겠습니다.”
시현은 곧바로 진철영의 진료실을 향했다.
“교수님이 외래 진료 잠깐 끊고 선생님 먼저 보신다고 하셨어요.”
“네, 알겠습니다.”
매번 붐비는 외래인지라 어지간하면 진료를 마치고 레지던트와 면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 들어가세요.”
외래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진료실에는 진철영이 모니터를 응시하며 앉아있었다.
“천 선생, 왔나?”
“네, 교수님. 어떤 일이십니까?”
“지난주에 응급실 왔던 이정미 환자, 선생이 봤었나.”
예상대로 이정미에 관한 이야기였다.
“네, 손목 자해를 주소로 오신 분이고 당일 입원은 refuse 하셔서 귀가하셨습니다.”
“그래, 환자 말 들어보니 열심히 본 것 같기는 하던데….”
진철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 환자 입원하면 천 선생이 아닌 다른 레지던트가 봤으면 좋겠는데. 괜찮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