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90화 (90/195)

90화 chapter 23. 분노의 심리학 (3)

“이 환자 입원하면 천 선생이 아닌 다른 레지던트가 봤으면 좋겠는데. 괜찮겠나?”

이정미를 담당하지 말라니.

진철영의 반응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현이 놀라서 되물었다.

대체로 응급실을 통해 입원한 환자는 원래 보던 의사가 보는 것이 관례였다.

게다가 입원 환자의 담당 레지던트 배정은 의국장인 권원주의 몫.

교수가 레지던트를 따로 호출해서 특정 환자를 맡지 않았으면 한다고 권유하는 것도 이례적이다.

“환자가 그러더군. 응급실 당직 의사가 자기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것 같았다고. 그 부분은 굉장한 강점으로 보이지만…….”

진철영이 모니터에 뜬 응급실 기록을 보며 턱 끝을 매만졌다.

회진을 돌다 레지던트의 말이 석연치 않다고 여겨지면 보이던 행동이었다.

“아무튼, 이 환자는 하도영 선생이나 김석용 선생이 보는 것이 낫겠어. 의국장한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할게.”

“응급실에서 몇 차례 봤던 환자입니다. 혹 부족했던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잠시 망설이다 시현이 말했다.

진철영 교수의 성격상 괜한 트집을 잡을 리 없다.

뭔가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분명 뭔가 놓친 부분이.’

시현은 명쾌한 조언을 기다리며 진철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올해 응급실을 찾은 횟수는 4-5번이야. 그중에 천 선생이 당직이라 직접 진료한 건 3번 남짓이고. 그렇지?”

“네, 3번 다 공황발작을 주소로 오셨고 항불안제 투여 후 증상 호전되어 귀가하셨습니다. 약물 조절하실 수 있도록 설명했고, 최근에는 정신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치료 과정에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래, 그랬더군. 방금 부족했던 점을 물었지? 그런 건 없었다고 봐야지.”

부족한 점은 없었다니. 의외의 연속이었다.

“네? 그럼 왜…….”

“난 오히려 넘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진철영이 말을 이었다.

“자의 퇴원서 말인데. 환자 어떻게든 입원시켜보려고 한 행동인 줄은 알겠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건 좋지 않아. 자칫 환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유족들에게 고소당하기 딱 좋지.”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환자에게 마음의 짐을 지워주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고는 하나, 과의 관리자인 교수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을 일이었다.

“탓하려는 게 아니야. 덕분에 환자는 다시 병원에 왔고 새로운 기회도 얻었으니까.”

진철영이 따뜻한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반응은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어야겠지. 왜지? 그렇게까지 무리했던 이유는?”

“그건…….”

시현이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전에 없던 죽음을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자신이 개입하면서 틀어진 부분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사이 진철영이 말을 이었다.

“치료자로서의 덕목 중 하나는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이제 내가 선생에게 이 환자를 맡지 말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나?”

“카운터…… 때문인가요?”

카운터.

카운터트랜스퍼런스(countertransference)의 준말로 의사가 환자에게 갖는 무의식적인 반응, 즉 역전이를 의미했다.

“그래, 정확해.”

진철영이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분명 착한 환자고 사정도 딱하니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지. 하지만 지금의 천 선생한테서는 그것만 가지고는 설명되지 않는 뭔가 절박한 감정이 느껴진단 말이지. 그게 도대체 뭘까?”

“환자에게 사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살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했고 잘 치료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시현이 항변했다.

“그렇군. 그럼 이렇게 한 번 생각을 해보지. 조금이라도 더 잘 해보려고 그렇게 노력하면 결과가 좋아질까?”

“무관심한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거야 당연히…….”

다음 순간 시현의 뇌리에 이정미 환자의 얼굴이 스쳤다.

삭흔과 자해흔.

며칠 전 응급실에서 봤던 모습은 회귀 전의 어느 시점과 비교해도 좋다고 볼 수 없었다.

“대답이 어려운가? 그럼 질문을 바꿔보지. 천 선생은 스트레스가 뭐라고 생각하나?”

“심리적 또는 신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느끼는 불안과 위협의 감정입니다.”

지극히 교과서적인 대답이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살다 보면 좋은 일에도 스트레스를 느낄 수 있어. 회사에서 승진하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데도 막연하게 불안하다고 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물론 진급심사에서 혼자 탈락한 것만큼 힘들지는 않겠지만.”

진철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돌이켜보면 확실히 그랬다.

뚜렷한 불안이 호전된 뒤, 환자들은 새로운 불안을 호소했다.

이렇게 편안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다시 예전 그 증상이 돌아오면 어떡하냐고.

오랜 증상에서 벗어난 사람들마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럼 다시 묻지. 스트레스란 뭐 같은가?”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진철영이 다시 물었다.

‘좋은 일 나쁜 일을 가리지 않고 생긴다면.’

다음 순간 시현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변화를 수반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은 대답.

그 말에 진철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의욕적으로 열심히 한다는 건 그런 거야. 한편으론 환자에게 많은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지.”

“…….”

진철영의 말에 시현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현재의 삶이 스트레스라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환자들인데, 변하는 것 또한 스트레스라니.

정신과 의사 노릇 하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 번 지켜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 다른 선생님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는 것도 훌륭한 공부가 될 거야.”

“네, 교수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현은 진철영에게 꾸벅 인사한 뒤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를 잠시 멈춘 탓인지 오늘따라 대기실 환자들이 유독 더 많아 보였다.

‘감사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붐비는 외래를 뒤로 한 채 시현은 곧장 병동을 향했다.

* * *

“시현아, 너 응급실에서 무슨 사고 친 거야?”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권원주가 다가와 물었다.

“진철영 교수님한테 직접 전화가 다 오고 무슨 일이야?”

“아, 별일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윗년차 선생님들이 보는 게 낫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정말 사고 안 친 것 맞지? 너도 이제 2년차인데 응급실에서 이미 몇 번 봤던 환자 그냥 이어서 보는 게 낫지 않나?”

권원주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진철영이 따로 지시한 사항인 만큼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누가 보는 게 좋을지 상의 좀 해보고 올 테니까 일단 응급실에서 면담했던 내용 정리하고 있어.”

“네, 선생님.”

‘최대한 자세히 적는 게 좋겠지.’

자신이 직접 병동 담당의가 되었다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일단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유리해 보였다.

시현은 빈 문서창을 열고 환자 상태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방금 통화해봤는데, 하도영 선생님이 보기로 했어. 정리 끝나면 전달해드려.”

한참 만에 나타난 권원주가 말했다.

‘하도영 선생님이라…….’

권원주와 같은 3년차로 지금은 협진 담당 레지던트였다.

군의관을 마치고 레지던트를 시작한 케이스라 나이는 김민홍보다 더 많았다.

늘 웃는 인상에 농담도 곧잘 하곤 했지만, 정작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의국 생활을 몇 년이나 같이 했어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30분 뒤. 오후 회진을 10여 분 앞둔 시각.

철컥.

권원주가 말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병동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회진 때 신환 보고해야 하는데 이제 온 거예요?”

“어, 피부과 희재가 커피 한잔하자고 해서. 그런데 무슨 환자야?”

권원주의 핀잔에도 하도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응급실 기록 정리한 것 드리겠습니다.”

시현의 재빨리 정리된 자료를 출력하려는 순간.

“아냐, 그럴 것 없어. 그냥 구두로 알려줘.”

하도영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29세 여자환자이고 평소 공황발작으로 응급실 수차례 방문했던 분입니다. 기저질환은 없으며 평소 대인관계는…….”

평소 자주 보던 환자였던 만큼 따로 문서를 출력하지 않고도 시현은 환자 보고를 할 수 있었다.

‘환자 파악 제대로 하고 있네.’

응급실에서 몇 번 본 환자라고만 했었는데.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권원주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환자는 무슨 일 하는 분이야?”

반면 하도영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시현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약국에서 5년 정도 일했다고 합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알겠어.”

하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에는 자해로 응급실 방문했었고 오늘 진철영 교수님 외래 통해 입원한 거고?”

“네, 선생님.”

“나머지는 내가 천천히 면담해볼게.”

‘원래 이런 스타일이었나?’

하도영은 몇 가지 더 묻고 난 뒤, 무덤덤한 표정으로 시현에게 자기 일 할 것을 권했다.

가족은 누가 있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어떤지, 최근 스트레스는 무엇인지 더 이야기할 것들이 많았으나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 * *

며칠 뒤, 야간 당직.

“선생님, 친구 왔는데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스테이션에서 내일 자 오더를 내고 있는데 이정미가 다가와 물었다.

‘그때 그 친구인가.’

응급실에 보호자로 왔던 친구가 이정미의 옆에 서 있었다.

“잠시만요. 아, 담당의 선생님께서 보호자와 함께 원내 산책 가능으로 메모해 두셨네요.”

폐쇄병동인 만큼 환자마다 외출에 대한 허용범위가 달랐다.

이정미의 경우 입원 전 자해시도가 있었기에 보호자 동반 시에만 병동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진짜 많이 좋아졌어요! 지하에 편의점만 잠깐 들렀다가 금방 올 거예요.”

이정미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주 응급실에서 봤던 모습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철컥.

문이 열리고 이정미는 친구와 팔짱을 낀 채 병동을 나섰다.

‘확실히 안정된 것 같은데.’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에게 보이던 ‘생존 확률’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치료를 어떻게 하고 계신 것일까.

시현은 곧바로 이정미의 차트를 열어보았다.

[Lexapro 5mg HS Xanax 0.25mg AMHS]

가장 기본적인 약물들.

그마저도 최저용량이었다.

‘특별히 신경을 쓴 건 면담 쪽인가?’

적은 약물에도 환자가 호전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며칠 전 환자 인계를 받을 때 하도영의 표정을 보면 그다지 의욕적이지 않은 듯했지만,

일단 하도영의 면담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다음 순간 시현의 눈이 커졌다.

- No interval change.

- 지지적 면담 시행함.

단 두 줄로 끝난 경과 기록.

‘도대체 어떻게 치료를 한 거야?’

시현의 머리 위로 물음표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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