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91화 (91/195)

91화 chapter 23. 분노의 심리학 (4)

‘도대체 어떻게 치료를 한 거야?’

경과 기록에 특별한 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너무 간결해서 성의 없어 보인다는 인상마저 들었다.

간혹 환자가 비밀스러운 내용을 의무기록에 남기지 말아 달라고 하여 최소한의 내용만을 차팅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정미 환자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출생의 비밀이라던가 법적인 문제와 같은 예민한 부분은 애초에 없었다.

하도영이 극도로 세심한 의사라서 환자의 의무기록을 전자 차트와 종이 차트로 따로 분리해서 관리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건 그냥…….’

둘 중 하나였다.

귀찮아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거나, 아니면 정말 면담에 특별한 내용이 없었거나.

혹은 둘 다이거나.

‘그런데도 이렇게 좋아졌다고? 뭘 했다고?’

면담 내용을 엿듣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철컥.

차트를 읽어보며 혼란에 빠진 사이, 이정미는 면회 온 친구와 함께 병동으로 들어왔다.

“여기 입원하고 나니까 안색이 좀 좋아 보인다. 정말 다행이야.”

“그래? 잠을 잘 자서 그런가?”

“솔직히 걱정 많이 했었어. 폐쇄병동이라고 하길래 감옥처럼 생긴 병동 아닌가 하고. 무슨 영화에 보면 나오지 않나? 사람 가둬놓고 막 주사도 주고…….”

호러? 스릴러? 도대체 무슨 영화를 보고 온 것일까. 안타깝게도 일반인들에게 정신과 병동에 대한 인식은 실제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여기 괜찮은 것 같은데? 조용하지, 때 되면 밥도 나오지…… 너 오면 이렇게 밖에 나갔다 올 수도 있고. 아무튼, 오늘 와줘서 고마워.”

“야, 우리 사이에 고맙긴 뭘.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내 잘못이야. 너한테 그 자식을 소개해 주는 게 아니었는데…….”

이정미의 친구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에이, 오빠한테 ‘그 자식’이 뭐야?”

“오빠가 오빠다워야지. 아무리 사촌이라지만 난 그 인간 꼴도 보기 싫다.”

‘남자친구가 저 사람 친척이었구나.’

대화 내용이 시현의 관심을 끌었다.

‘시청타촉의 포션.’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두 사람이 병동 홀에 앉아 이야기하는 동안, 시현은 멀찍이 떨어진 스테이션에서 앉아 무심한 척 대화를 듣고 있었다.

“퇴원하고 정태 오빠 다시 만나볼 건 아니지?”

“모르겠어. 근데 어떻게 만나? 연락도 안 되는데.”

“하긴, 그렇지? 그나저나 오빠가 엉뚱한 짓이라도 하지 않을지 걱정된다. 내 전화도 안 받더라고.”

“그러게. 나도 걱정인데…….”

“한 번씩 연락해봐. 받을 수도 있잖아?”

“그, 그럴까?”

“그래. 오빠가 철이 없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어쩌면 네가 먼저 연락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친구의 말에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인 거야?’

같이 흉을 보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사촌오빠에게 연락을 해보도록 종용하는 태도.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 * *

8 : 30 PM

“환자분, 면회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 네…….”

병동 보호사의 안내에 이정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봐야겠네. 정미야, 잘 쉬어. 내일은 간식 뭐 사 올까?”

“어휴, 됐어. 입원하고 살만 찌겠다. 조심히 들어가.”

병동 입구에서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두 사람.

이정미의 표정이 즐거워 보인다.

“저, 선생님?”

친구를 보내고 난 뒤 이정미가 스테이션으로 찾아와 말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드시고 하세요. 간호사님들이랑.”

딸기우유, 바나나우유 그리고 커피우유.

그녀가 건넨 봉투에 음료수 여남은 개가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이거 신제품이라고 밑에 편의점에서 2+1 행사하는 거 있죠? 내일 친구 오면 또 사러 가려고요.”

이정미가 씩 웃어 보였다.

“그런데 저녁에 커피 드시면 잠 못 드는 거 아니에요?”

시현이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우유를 보며 말했다.

“아, 원래는 그랬었는데 입원하고 나서는 잘 자요. 중간에 덜 깨고요. 그러고 보니 두근거리는 것도 없네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저녁 시간에 카페인은 해롭습니다.”

“알겠어요! 오늘까지만 마실게요. 그런데 이거 진짜 맛있어요! 꼭 드셔보세요.”

신체 증상의 호전.

수면 분절 완화.

그리고 사소한 일에 대한 행복감.

시현은 머릿속으로 우울증 평가 척도 항목들에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HAM-D scale 10점 이하…… 경도 우울증인가.’

이 정도라면 며칠 안에 퇴원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완전히 좋아진 것은 아니라 당분간 외래진료는 꾸준히 받아야겠지만.

“네, 그럼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회진 때 뵙겠습니다.”

“선생님도 수고하세요.”

이정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병실로 들어갔다.

분명 기분 증상은 호전되었는데 그 과정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환자의 경과는 왜 전만 못한 것인지? 그동안 응급실에서 놓친 것은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내일 회진 때 어떻게 환자 보고를 하는지 들어 봐야…….’

병동 담당의인 하도영의 보고가 궁금해질 무렵.

“어, 이거 뭐예요? 마침 당 떨어지던 참인데 잘 됐다. 마셔도 되는 거죠?”

병동 간호사 이선지가 신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럼요. 902호 이정미 환자분이 주셨어요. 같이 드시죠.”

시현은 여전히 이정미의 차트를 응시하며 봉투를 통째로 건넸다.

“천 쌤은 뭐 드실 거예요?”

“선생님들 드세요. 저는 괜찮…….”

그때였다.

딩동!

시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알림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system : 신규 아이템이 등재되었습니다.]

‘신규… 아이템?’

알림창 내용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이선지가 들고 있던 봉투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선지 선생님, 잠깐만요!”

“네?”

반사적으로 이선지에게 주려던 봉투를 도로 펼쳐보았다.

[NEW 과즙 담뿍 딸기맛우유(E)]

- 천연 딸기 과즙이 0.5% 함유되어 있습니다.

- 소량의 비타민 C가 피로 회복에 도움을 줍니다.

[NEW 과즙 담뿍 바나나맛우유(E)]

- 천연 바나나 과즙이 0.5% 함유되어 있습니다.

- 소량의 비타민 C가 피로 회복에 도움을 줍니다.

‘역시 별다른 건 없나?’

예전에 왕백운 환자에게 받은 텀블러처럼, 환자에게 받은 물건이라 아이템 판정을 받았을 뿐 특별한 점은 없는 듯했다.

“에이, 줬다 뺏는 게 어딨어요? 거기 뭐라도 들었어요?”

이선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 아닙니다. 여기 드세요.”

“난 이게 제일 좋더라.”

그녀는 잠깐 봉투를 뒤적거리더니 음료 한 잔을 꺼냈다.

‘그런데 저것만 왜…….’

이정미가 맛있다며 꼭 마셔보라고 권했던 커피우유였는데, 유독 이선지의 손에 들린 것에서만 황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NEW 에스프레소가 제대로 들어간 커피우유(SSS)]

- 에스프레소 추출액이 20% 함유되어 있습니다.

- 다량의 액상과당과 하루 권장량 이상의 카페인이 피로 회복에 도움을 주는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시스템창을 확인한 시현의 눈이 커졌다.

‘SSS급? 고작 커피우유가?’

평소 유용하게 사용하던 포션들이 C-E급인 것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판정이었다.

“이선지 선생님! 요새 잠 못 잔다면서요? 이브닝 근무 끝나가는데 커피 마시면 어떡해요?”

옆에서 지켜보던 병동 보호사가 한마디 했다.

“그, 그런가? 그럼…… 난 이거!”

이선지는 잽싸게 커피우유 대신 딸기우유를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건 천시현 쌤 드세요!”

이선지가 무려 ‘SSS급 커피우유’에 빨대를 꽂아 시현에게 건넸다.

“네, 고맙습니다.”

“당직인데 환자 많이 보시려면 드시고 힘내셔야죠!”

쿨럭.

욕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에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거 그냥 커피인데?’

SSS급이라는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으나 커피 맛은 익히 알고 있는 그 맛.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툭.

“어? 그런데 이거 뭐예요?”

병동 보호사가 음료에서 떨어진 종잇조각을 주워들었다.

“어? 신제품 출시 기념… 경품 이벤트?”

“뭔데? 뭔데?”

“컵 뚜껑에 붙어있는 이거…… 즉석복권처럼 긁는 것 같아요. 1등한테는 고급 세단을 준다는데요!”

“진짜? 나 이런 거 엄청 좋아하는데!”

이선지가 신이 나서 경품 응모권을 긁기 시작했다.

“으앙. 꽝이네.”

“우와! 저 5등이에요. 한 병 더!”

“나도 나도. 한 병 더!”

그렇게 희비가 엇갈리는 사이.

“천 쌤도 해봐요! 한 병 더 나오면 나 줘야 해요!”

이선지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까요?”

이브닝 근무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시현은 응모권을 긁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결과를 확인한 근무자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아침 회진.

“그래, 병동에 별일은 없는 것 같고.”

진철영이 레지던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 주에 퇴원할 환자 있나? 외래에서 입원 대기 중인 환자들이 많아서.”

“902호 이정미 환자 주말쯤엔 퇴원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도영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빨리 좋아진 것 같은데. 퇴원하면 계획이 어떻게 되나?”

“당분간 외래진료 꾸준히 유지하도록 하고, 기존에 신민승 선생님과 진행해오던 정신치료도 이어서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겠어.”

하도영이 어떤 스타일로 면담을 한 것인지 궁금했으나 환자가 빨리 호전된 탓에 치료에 대해 추가 질문은 없었다.

“자, 특별한 사항 없으면 이만…….”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진철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시현이 입을 열었다.

“천 선생, 무슨 일인가?”

“어제 이정미 님이 스테이션에 음료수를 여러 잔 주셨습니다.”

“그래? 환자가 많이 좋아지긴 했나 보군. 그런데?”

“음료수 중 한 잔에서 이게 나왔습니다.”

시현이 테이블에 작은 종잇조각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뭔가?”

“경품 응모권입니다.”

“오, 뭔가 당첨된 모양이지? 상품이 뭔가?”

진철영이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그게…… 신형 그X져 입니다.”

그 말에 회의실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헉.

몇몇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진철영은 입술을 쭉 내밀며 고개를 갸웃했다.

“와, 환자가 준 음료수로 그X져 당첨된 거야? 대박이다!”

“근데 그거 환자한테 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음료수를 준 거지 경품을 준 건 아니니까?”

“아니지! 경품 응모할 기회까지 같이 준 거로 봐야지. 줬다 뺏는 게 어딨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환자가 준 거잖아. 공평하게 반반 나누는 게 맞지 않나?”

의료진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그래. 법적인 부분이야 변호사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천 선생은 어떻게 하고 싶나?”

“저는…….”

레지던트들은 숨죽인 채 시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경품은 제가 갖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회의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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