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92화 (92/195)

92화 chapter 23. 분노의 심리학 (5)

9병동 스테이션.

회진이 끝나자 모닝 근무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니들 그거 들었어?”

“무슨 일인데?”

“선지가 어제 근무 끝나고 뒷목 잡고 나갔다잖아.”

간호사 중 한 명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뒷목은 왜?”

“그 커피…… 원래는 선지가 먼저 딱 찍었었대.”

“진짜? 그럼 왜 그걸 천시현 선생님이 갖느니 마느니 하는 거야?”

“그게…… 보호사님이 퇴근하면 바로 잘 거면서 커피 왜 마시냐고 핀잔을 줬다는 거야. 그래서 남은 커피를 당직이 먹기로 했는데 그게 시현쌤이었던 거지.”

“어머, 그럼 선지 지금쯤 앓아누워있는 거 아니에요? 완전 아쉬울 것 같은데.”

뒤늦게 사정을 안 간호사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걸 말이라고? 그게 얼마짜리 찬데…….”

“근데, 아까 시현쌤 말하는 거 좀 그렇지 않았어?”

“맞아.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환자한테 돌려주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긴 했지?”

“의외라니? 당연한 거지! 막상 그 입장 돼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차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간호사 한 명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부럽다. 부러워. 나도 누가 차 한 대 사줬으면.”

그녀의 모니터에는 벌써 신형 그X져 광고가 재생되고 있었다.

“지금 스테이션에서 뭣들 하는 거야?”

언제나처럼 수간호사는 등 뒤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Alt + Tab]

“수쌤… 오셨어요?”

“잡담에 인터넷 서핑에…… 일 안 해?”

그녀의 일갈에 근무자들은 각자 맡은 일로 재빨리 복귀했다.

수간호사의 시선이 병동 CCTV 화면을 향했다.

‘아직도 면담 중이네.’

시현과 하도영 그리고 이정미 환자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회진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한 면담이 어느덧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이러다 어디 신문에 나는 것 아냐?’

친구가 준 복권이 당첨되어 민사 소송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았다.

일반적인 상담이라면 모를까, 길어서 좋을 것이 없는 대화.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 * *

같은 시각 면담실.

“환자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제 뜻은 변함없습니다.”

전에 없던 완고한 태도였다.

“시현아, 네 뜻은 알겠다만 그래도 환자분이 주신 건데 적당히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맞아요. 다 달라는 말은 안 할게요. 그래도 상품 가격의 일부는 주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요즘 형편이 어려워서…….”

“힘드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정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현이 대답했다.

“설령 제가 모든 걸 양보한다고 해도 그게 정말 환자분께 도움이 될까요?”

“그거야 당연히…….”

“아니면 같은 일이 반복될까요?”

“…….”

같은 일이라니.

이정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응급실에서 시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 집요하게 졸라대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 인연 끊고 사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검사 결과를 설명한 뒤 떠나려다 말고 자신에게 했던 말.

- 요즘 경기가 안 좋은지 돈 빌리고 잠수타는 인간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안 그렇습니까? 보호자님?

그리고 함께 있던 남자친구에게 했던 말.

지금까지의 일들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생각해보면 시현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건가?’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그러니까… 저한테 줘봤자 소용없다는 말씀이시죠?”

이정미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제가 그동안 해온 게 있는데……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네요.”

팩트로 때리니 더 아픈 느낌이었다.

‘하긴, 내가 얼마나 답답하게 보였겠어. 아…… 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

후우.

내쉬는 한숨과 함께 자괴감이 몰려왔다.

“선생님이 가지는 게 맞겠어요.”

“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참을 이야기했지만, 결과는 원점이었다.

“아, 벌써 외래 내려가 볼 시간이 됐네요.”

하도영이 힐끗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 네…….”

“아직 입원 기간이 남이 있으니까 두 분이 서로 기분 상하지 않게 잘 상의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정미 님, 면담은 오후에 이어서 하시죠.”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하도영은 면담실을 떠났다.

“저도 이만 나가볼게요…….”

이정미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도영과 함께 설득했어도 요지부동인데, 혼자서 더 말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환자분, 잠시만요.”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이정미가 나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이거 가져가세요.”

시현이 손에 종이쪽지 하나가 들려있었다.

아까부터 줄곧 이야기하던 1등 당첨 응모권이었다.

“이걸 왜?”

이정미가 얼떨결에 응모권을 집어 들었다.

“이정미 님이 운이 좋아서 당첨된 게 맞아요. 돌려드리겠습니다.”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 것을 보면 그 또한 그녀의 운 아니겠는가.

“이걸 저를 주신다고요? 아까는 분명…….”

“그냥 드리는 거 아닙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이정미를 향해 시현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사인하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해주세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 * *

그날 저녁.

“뭐? 어제 산 음료수에서 1등 경품이 나왔다고?”

이정미를 찾아온 친구가 놀라서 소리쳤다.

“축하해! 그래서? 우리 차… 아니, 네 차는 언제 나오는 거야?”

“저…… 그게 사실은 병동 선생님들 준 게 당첨된 거야.”

이정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음료수를 주면서 경품 응모권도 같이 준 셈이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아니! 그래도 네가 사준 건데 그게 말이 돼?”

“나 같았으면 귀찮아서 응모권 그냥 버렸을 거야. 애초에 내 몫이 아니었던 거지.”

“돌려달라고 해야지! 최소한 반반이라도!”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는 친구의 뒤편으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정이 필요한 환자들이 있습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정신과 천시현]

익숙한 명찰. 얼마 전 응급실에서 보았던 바로 그 의사였다.

“선생님, 정미 소식 들으셨죠? 얘가 산 음료수가 1등이었다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당첨되신 분한테 잘 좀 얘기해서 돌려달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친구는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렵겠습니다.”

“아니, 왜요? 왜 어려운 건데요?”

“정말 죄송하지만…… 그 당첨자가 저라서요.”

시현은 싱긋 웃으며 가운 주머니에서 꺼낸 경품 응모권을 흔들어 보였다.

‘저 쪽지 한 장이… 차 한 대라고?’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거리.

힘으로라도 뺏고 싶은 충동이 기어 올라왔다.

“아니, 이것 보세요. 환자가 산 건데 병원에서 뺏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한두 푼 하는 물건도 아니고!”

보호자가 목에 핏대를 올렸다.

“뺏은 거 아닙니다. 듣기 불편하네요.”

시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저도 법을 잘 모르다 보니 병원 법무팀에 문의를 해봤습니다.”

“버, 법무팀요?”

“절차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음료수를 받은 시점에서 관련된 권리 일체가 한꺼번에 양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요.”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문제 제기하시려거든 정식으로 해주십시오. 계속 소란 피우시면 면회 중단하겠습니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정미야,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어? 그래.”

“저쪽 빈 면담실로 들어가서 하시면 됩니다.”

시현이 복도 끝을 가리켰다.

“환자분들 곧 주무실 시간이라서요. 최대한 조용히 부탁드립니다.”

‘까칠하기는.’

이정미의 친구가 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1등 경품을 뺏은 주제에 환자 생각하는 척이라니.’

그녀는 씩씩대며 면담실로 들어갔다.

“오빠, 지금 통화 괜찮아?”

- 짧게. 나 지금 바빠.

수화기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게임 효과음이 흘러나왔다.

“오빠, 지금 게임이 급한 게 아니야!”

- 무슨 일인데? 야! x발! 막타 제대로 안 챙겨?

남자는 통화내용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미 때문에. 걔가 지금 정신과에 입원했잖아.”

- 그게 왜? 나 때문이라고? 내가 돈 갚는다고 했잖아! 왜 너까지 연락하고 지x이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정미가 경품에 당첨됐어. 그것도 1등이래!”

- 그래? 뭐 TV라도 주나? 아니면 냉장고?

“아니 자동차야. 그X져 한 대.”

- …….

다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오빠? 듣고 있어?”

- 야, 그거 팔면 얼마나 나와? 안 그래도 돈이 좀 급한데 정미한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분명 정미가 당첨된 건데 그거 뺏기게 생겼다고! 얼른 오빠가 와서 해결 좀 해!”

- 그게 무슨 소리야?

친구는 열을 내며 병동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아무튼, 알겠지? 여기 의사가 말이 안 통하니까 오빠가 와서 좀 설득해보라고. 정미는 순둥이라 말도 제대로 못 해!”

- 아, 알았어. 바로 갈게.

“잘못하면 ‘오빠 차’ 뺏기게 생겼어! 어떡해?”

- 그런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되지.

“그럼 최대한 빨리 와. 알았지?”

-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하지 마.

보호자는 서둘러 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더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똑똑.

통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면담실로 들어왔다.

“오늘 면회 끝났습니다. 이만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내일 올게요.”

보호자는 민망해하며 즉시 면담실을 나갔다.

딩동!

[system : ‘시청타촉의 포션’ 효과가 종료됩니다.]

‘분명 ‘오빠 차’라고 했어.’

이정미의 것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는 태도.

친구든 애인이든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아무리 엉망진창이어도 사촌 오빠 편이라는 건가?’

떠나는 보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현은 턱 끝을 매만졌다.

‘그런데 이거… 알려줘야 하나?’

친구랍시고 찾아온 보호자의 태도에 기가 막힌 나머지 통화내용을 이정미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

연락이 안 된다던 남자친구는 PC방에서 게임이나 하며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함께 남자친구 욕을 했던 친구는 사실 네 편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당신은 그저…….’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모르느니만 못하다.

입원 후에 겨우 안정을 찾은 상태인데 굳이 자극을 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일단 남자친구를 병동으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했고.’

의도야 불순하기 짝이 없겠지만, 이정미는 잠시나마 안정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또 그런대로 생을 이어갈 것이다. 회귀 전과 비슷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정도가 최선인 건가?’

변화를 추구했다가 생존 확률이 떨어지는 것까지 확인한 이상 섣부른 시도는 금물이었다.

‘분명 방법은 있을 텐데.’

다음 순간, 면담실 전체를 비추고 있는 대형 거울이 시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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