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chapter 23. 분노의 심리학 (6)
* * *
뚜 - 뚜 -
-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두 번째 신호음을 넘기지 않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선생님, 9병동입니다. 이정미 환자 보호자라는 분이 찾아왔어요. 선생님과 면담 원합니다.”
- 이 시간에…… 보호자요?
간호사가 벽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7 : 39 AM]
아침 회진까지 아직 한참 남은 시각이었다.
- 누가 오신 겁니까?
시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젊은 남자분인데 아침 일찍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보호자 리스트에 없는 이름인데 막무가내로 들어오겠다는 걸 간신히 말렸어요.”
이정미에게 면회 올 가족은 없었다.
있다고 해도 환자부터 찾지 의사를 먼저 보자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 허용된 보호자 외에 면회 제한하겠습니다. 원칙대로 전달해주십시오. 지금 응급실 콜 받고 있어서 시간 내기도 어렵고요.
“네, 그렇게 할게요.”
‘이 시간에 뭔 일이야?’
간호사는 얕은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즉시 인터폰을 들어 병동 밖에서 대기 중인 젊은 남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보호자님, 죄송하지만 면담은 어렵습니다.”
- 담당 의사 얼굴 잠깐만 보겠다고요!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건데요?
“그분은 이정미 님 담당이 아니세요. 그리고 지금은 응급실 환자 진료 중이시고요.”
- 이봐요!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이런 [email protected]#$%
딸깍.
간호사는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던 것 같지만, 안 듣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으니까.
병동 입구를 비추는 CCTV 화면에서 길길이 날뛰는 남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음소거 상태였음에도 말이다.
* * *
‘어지간히 급했나 본데.’
시현의 얼굴에 절로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이 시간에 병원으로 달려와 자신을 찾을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제발 전화 좀 받으라고 그렇게 연락할 때는 모르는 척하더니만.
‘이번에는 그쪽이 한 번 기다려봐요.’
아침부터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찾아왔느냐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성마른 성격이라…… 한 시간이면 충분하려나?’
속으로 타이밍을 계산하며 시현은 응급실을 향했다.
* * *
1시간 뒤, 응급실.
“항불안제 추가 주사했습니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네, 하아. 하아.”
환자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심한 초조감으로 응급실에 방문한 37세 여자.
3주 전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에서 나온 뒤 불안 증상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아내는…… 괜찮을까요?”
벌써 네 번째 같은 질문.
남편은 양손을 꼭 움켜쥔 채 아까부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산후 발병 우울증은 초조감이 심한 것이 특징입니다. 아무래도 입원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요!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야죠.”
남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분께서 지극 정성이시니 금방 좋아질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병실 알아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안정제 기운이 도는지 아까보다 환자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았다.
환자에게 근거 없이 막연한 희망을 주는 것은 조심해야 하지만 이 경우는 예외였다.
‘며칠 입원하고 바로 호전돼서 퇴원했으니까.’
“근데 우리 애기는 어떡하고 입원을 해?”
“나도 연가 쓰고 어머니하고 장모님하고 돌아가면서 보면 충분히 볼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이 우선이야.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하지.”
남편이 아내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지금 보니 배우자가 지지적이라 경과가 좋았던 것 같다.
엄마로서 책임감을 가지라는 둥 놀면서 애 하나를 못 보냐는 둥 비난은 죄책감만 자극할 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시현은 흐뭇하게 웃으며 응급실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위이이잉.
병실을 알아볼 틈도 없이 전화기가 울렸다.
“천시현입니다.”
- 선생님, 아까 그 이정미 환자 보호자라는 사람 지금 응급실로 간 것 같아요! 조심하세요!
“분명히 면담 안 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 완전 막무가내라니까요? 왜 못 들어가냐고 병동문을 발로 차서 보안요원 호출하려다가 참았어요. 선생님도 조심하세요. 일단 병원에서 내보내야…….
“괜찮습니다. 제가 해결하죠.”
걱정하는 간호사와는 달리 시현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 이정미의 남자친구가 응급실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 정신과 의사 있습니까? 천시현이라고…….”
그는 응급실 간호사 한 명을 붙잡고 다짜고짜 묻기 시작했다.
“어떤 일로 오셨을까요?”
“그건 알 것 없고. 여기 있어요? 없어요?”
“그게 저…….”
간호사가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아니, 애인이 입원해있대서! 걱정돼서 찾아왔는데!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담당 의사도 못 만나게 하고! 이게 뭡니까?”
남자는 애꿎은 사람을 붙잡고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이 사람 뭐야?’
다른 과 의사를 왜 여기서 찾아?
진상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 응급실인데.
아침 댓바람부터 독보적인 놈이 쳐들어왔다.
“그건 아마도 병동 규정상…….”
“규정은 당신네들 편의 때문에 만든 거고. 환자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라고요!”
그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아무튼, 그 의사 꼭 좀 봐야겠으니 바로 불러주세요.”
“다른 환자 진료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밖에서 충-분히 기다렸다니까요? 저도 바쁜 사람이라고요! 전화라도 좀 해주면 안 됩니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아. 오늘 무슨 날인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던 간호사의 관자놀이가 움찔거리는데.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시현이 남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당신이 천시현 선생님이셨어요? 캬! 이거 얼굴 한번 보기 힘드네!”
시현을 빤히 쳐다보며, 남자는 한껏 목청을 높였다.
“방금까지 면담 중이었습니다. 응급실에 안정 취해야 할 환자들도 많은데 목소리 낮추시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환자 생각하는 양반이 왜 환자를 등쳐먹고 그래?”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말투.
일부러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글쎄요. 누가 누구한테 해야 할 말인지 모르겠네요.”
시현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소한 그쪽이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 새x가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정미 님에게 갚아야 할 빚이 상당히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순식간에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 문제로 연락 끊긴 지도 좀 됐고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잔말 말고 그X져 돌려줘. 환자 상대로 부당한 이득 취하는 거, 그거 범죄 아냐? 내가 꼭 신고할 거야!”
‘신고’에 유독 힘을 주며 남자는 소리쳤다.
“그렇게 하시죠.”
“…….”
간결한 대답에 남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시현이 이내 주머니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신제품 출시 기념! 행운을 잡으세요!]
경품 응모권을 알아본 남자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거… 주머니에 웬 쓰레기가 들어있었네요. 아침부터 벌레 꼬이게.”
쫙쫙쫙.
갈갈이 찢긴 그X져가 바닥을 뒹굴었다.
“지금 뭐, 뭐 하는 거야? 그거 이리 내!”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더 할 말 없으실 것 같은데, 이만 가보겠습니다. ”
망연자실 바닥을 훔치는 남자를 뒤로 한 채, 시현은 응급실을 떠났다.
* * *
30분 뒤.
“아, 씨x.”
담뱃불을 붙인 남자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얼기설기 가까스로 이어 붙인 종잇조각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꽝! 다음 기회에!]
‘내가 그 자식을 가만두나 봐라.’
오만상을 찌푸리며 줄담배를 피워대는데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거기 젊은 양반…….”
환자복 차림의 노인이 조심스레 남자를 불렀다.
“저요? 뭔데요?”
노인이 가리킨 곳에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원내 모든 장소는 금연구역입니다.]
“아 씨x! 짜증나게.”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제는 지나가는 노인이 시비를 걸지 않나 되는 일이 없는 날이었다.
“할아버지, 저 오늘 기분 안 좋으니까 상관 말고 그냥 가시던 길 가세요. 예?”
그래도 일단 잘 타일러 보내기로 했다.
당신이 노인이었기에 망정이지 젊고 건강한 성인 같았으면 주먹다짐이라도 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야, 불 꺼.”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남자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아 놔. 왜 시비를 걸고 지x이야? 이것들이 미쳤나…….”
남자가 뒤를 돌아 상대를 밀치려는데, 허벅지만 한 팔뚝이 남자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멈칫.
“왜? 한 대 치시게?”
곰 같은 체구에 불독 같은 인상의 사내가 등 뒤에서 되물었다.
“아, 아닙니다.”
남자는 차마 마저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건 안 꺼?”
“바로 끄겠습니다.”
“한 대 쳐주면 고맙고. 오랜만에 ‘정당방위’ 좀 해보지 뭐.”
거구의 사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동석아, 그만하고 가자.”
“예, 아부지.”
“아아아악!”
멀어져가는 부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자는 짜증 섞인 절규를 토해냈다.
“오빠, 여기서 왜 소리를 질러? 한참 찾았잖아. 전화는 왜 안 받아?”
이정미의 친구, 이영지가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얘기는 잘 됐어?”
“…….”
“얘기 좀 해봐. 아침부터 여기 있었다면서?”
“영지야.”
“응?”
“내가 그 새x 가만히 두면 사람이 아니다.”
남자는 애써 붙인 종잇조각을 다시 구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9병동 면담실.
위이이잉.
“천시현입니다.”
- 선생님,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침에 왔던 그 남자 보호자가 병동에 들어왔어요.
“네? 가족도 아니고 면회가 허용된 보호자가 아닐 텐데 어떻게…….”
- 그 저녁마다 오시던 여자 보호자 따라서 같이 들어왔어요.
‘집요한데.’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도영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담당의신데.”
- 오늘 삼아대학교 보건소 상담 가시는 날이라 원내에 안계서서요.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이대로 면회 진행해도 될까요?
“제가 보고 말씀드릴게요.”
시현은 면담을 서둘러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 * *
“오빠가…… 여긴 어떻게?”
병동 중앙 홀에서 이정미는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가 데려왔어. 너 기분 풀어주려고.”
이영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해. 현장일 때문에 바빠서…… 너 입원한 줄도 몰랐어.”
남자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이거 받아. 같은 병실 분들이랑 나눠 먹어. 너 파인애플 좋아하잖아.”
그의 손에 과일바구니가 들려있었다.
“근데 이거 손질이 어려울 것 같은데. 여기 병동에 칼이 없어서.”
“그, 그런가? 그럼 바나나라도.”
“…….”
“어휴, 정미 바나나 알러지 있잖아. 몰랐어?”
이영지가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저, 두 분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현이 다가와 물었다.
“우리 정미 걱정돼서 왔죠. 우리끼리 이야기할 테니까 선생님은 신경 끄시죠?”
남자는 이정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