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chapter 23. 분노의 심리학 (7)
“우리 정미 걱정돼서 왔죠. 우리끼리 이야기할 테니까 선생님은 신경 끄시죠?”
남자는 이정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2시간 전.
“……그래서 아무 소득도 없었다는 거야?”
“그 응급실에서 봤던 의사 말인데. 보통내기가 아니더라고. 고소한다고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더라. 내 눈앞에서 응모권을 찢는데…….”
“응모권을 어떻게 했다고?”
이영지가 화들짝 놀라서 되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쪼그려 앉아 종잇조각 모았던 건 다시 생각해도 굴욕적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한 푼도 못 주겠다고 하면 뾰족한 수가 없는 거 아닌가?”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아무튼, 그쪽으로는 안 되겠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이야.”
남자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정미 자해했던 날 응급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이영지가 그 날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응급실에서 따로 불러놓고 한참을 설득했다는 거지? 기껏 작성한 자의 퇴원서도 없애버리고?”
“응. 나도 듣고 좀 놀랬다니까. 그 의사가 정미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사적으로 환자에게 추근댈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고지식한 성격에 원칙주의자라면 모를까.
“왜 의사들 중에 그런 사람들 있잖아? 원래 성격은 엄청 까칠한데 환자한테는 그런대로 친절한 타입.”
“오, 혹시 그런 과인가? 그럼 어떡하면 돼?”
“어떡하긴! 이 오빠만 믿어봐. 다 방법이 있으니까.”
남자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 * *
다시 병동.
‘걱정돼서 왔다고?’
돈 갚기 싫다고 잠수탈 때는 언제고?
피식.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환자가 응급실에 왔을 때 코빼기도 안 비친 사람이다.
‘카이트만의 안경’ 없이도 순도 100프로의 거짓말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 거야?’
남자를 바라보던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리 좀 피해주시죠. 오랜만에 만나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알겠습니다. 대신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됩니다. 안정이 필요한 환자분들이 있으니까요.”
“그럼 어디 빈방 같은 곳 없어요? 여기 괜찮죠?”
남자가 빈 회의실 문을 열어보며 물었다.
“그 방에서는 잠시 후에 컨퍼런스가 있습니다. 저쪽 끝 방으로 가시죠.”
세 사람은 시현의 안내에 따라 병동 끝에 위치한 면담실로 향했다.
‘할 말이란 건 뻔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며 시현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나 들어는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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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실을 비추는 CC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현은 알림창을 터치했다.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 * *
“정미야,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미안해.”
“…….”
“네 돈 못 갚은 것도 너무 미안한데……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어.”
“오빠, 그 얘긴 안 하기로 했잖아. 괜히 정미 부담되게.”
이영지가 손사래를 치며 남자를 만류했다.
“아니야. 그래도 우리 ‘가족’이 될 사람인데 미리 알고는 있어야지.”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실은 엄마가 좀 많이 아프셔. 교통사고가 크게 나셔서 뼈도 여러 군데 부러지고…….”
“어머님이? 지금은 괜찮으셔? 생명에 지장은 없고?”
이정미가 놀라서 되물었다.
“모르겠어. 뇌출혈도 있고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통에 의사도 장담을 못 하겠대.”
남자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상태가 안 좋아서 일반 병실로 옮기지도 못하고…… 중환자실 병실료가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야? 돈이야 어떻게든 구하면 되는 거 아니야?”
“지난번에 투자했던 것도 잘 안되고…… 아, 친구 말만 듣고 들어가면 안 되는 거였어.”
남자가 고개를 떨군 채 끅끅거렸다.
“이게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무리한 투자만 안 했어도!”
“아니, 이모가 뺑소니 차에 당한 게 왜 오빠 탓이야?”
“그게 아니야! 내 빚 갚는다고 일하러 나가시다가…….”
이영지가 남자를 달래듯 말했으나 남자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
‘나 때문에 어머님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이정미는 점점 가슴이 죄어오는 느낌이었다.
“이거 말하러 온 건 아니었는데 괜한 얘길 했네. 실은 영지한테 다 들었어. 네가 억울하게 차 뺏기고 힘들어한다고 해서…… 혹시 도울 건 없을까 해서 온 거야.”
남자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나는 괜찮…….”
“정미야,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가 갖는 게 맞는 것 같아. 그거 담당 의사한테 말 좀 잘해서 일부라도 돌려받을 수 없을까?”
이정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영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그것만 잘 챙겨도 오빠 빚은 천천히 받아도 되는 거잖아?”
“…….”
“이모도 지금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는데. 생판 남남인 저 의사는 그렇게 배려하면서 왜…….”
이영지는 울먹이며 이내 말을 잇지 못했다.
‘나 때문에 오빠 어머니가?’
딱히 잘못한 건 없었지만, 순식간에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남자의 어머니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괜히 빚 독촉을 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두근두근.
아까부터 조금씩 빨라지던 맥박이 이제는 머릿속에서 뛰는 것 같았다.
‘어지러워.’
면담실 공간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몸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헉헉.
목이 조여오는 느낌과 함께 이내 숨이 막혔다.
“정, 정미야 괜찮아?”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영지가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숨, 숨이 안 쉬어져…….”
이정미가 괴로운 듯 몸을 꼬았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바로 그때.
면담실 문이 벌컥 열리고 시현이 황급히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그게 저…….”
이영지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진짜 별 얘기 안 했어요. 그냥 집안에 힘든 일이 있어서 조금 얘기한 건데…… 갑자기 왜 이런 거예요?”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양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너튜브 보니까 공황장애는 약만 제대로 쓰면 바로 좋아진다던데. 병원에서 그거 하나 치료를 제대로 못 하나요?”
“…….”
속상하다는 듯 말하는 그의 표정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이정미 님, 일단 이거부터 드세요.”
[Alprazolam 0.5mg]
시현은 별다른 대꾸 없이 이정미에게 핑크색 알약과 물을 건넸다.
“숨 천천히 내쉬세요. 지금도 빠릅니다. 조금 더 천히…….”
“후우. 선생님, 그런데 제가 그때 그냥 드리기로 했던 거 있잖아요. 그 자동차 경품.”
“네, 말씀하세요.”
“그거 다시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네? 그게 무슨?”
“전부가 안 된다면 일부라도요. 제가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요.”
시현이 반사적으로 보호자들을 바라보았다.
이정미의 말에 순간 들뜬 표정을 짓던 그들은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홱 돌렸다.
“이정미 님, 그건 나중에 따로 상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은 안정실로 가시죠.”
여전히 기대감에 찬 보호자들을 뒤로한 채, 시현은 이정미를 데리고 면담실을 나왔다.
* * *
“거봐! 이렇게 하면 된다고 했잖아?”
두 사람만 남은 면담실.
남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올.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야?”
“그럼 당연하지. 눈앞에 복이 굴러들어와도 못 찾아먹는 앤데 우리라도 챙기자고.”
“새 차로 우리 드라이브 한 번 가는 거야? 어디가 좋을까?”
이영지는 신이 난 듯 남자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위이이잉.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야?”
[엄마 010 - 40xx- 26xx]
남자는 대답 대신 수신 화면을 내밀었다.
“어휴, 얼른 받아! 정미 다시 들어오기 전에.”
“알았어. 알았어.”
남자가 여유롭게 웃으며 수신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 야! 너 어디야? 아침부터 나가서 뭐하고 돌아다녀?
중환자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아 또! 왜 그러는데?”
- 너, 지난번에 카드값 갚는다고 가져간 돈 어떻게 했어? 왜 연체 통보서가 또 날아오는데?
“…….”
- 형태 엄마한테 전화 왔어. 형태한테 빌린 돈 안 갚으면 투자 사기로 고소한다는데.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엄마! 그건 가만히 놔두면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돈 들어올 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 아이고 이놈아. 내가 너 때문에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다. 엉뚱한 일 꾸미지 말고 얼른 들어와! 안 그러면……
뚝.
오만상을 구긴 남자는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 짜증나. 내가 저 잔소리 듣기 싫어서 나가 살던가 해야지 진짜.”
철컥.
답답함에 면담실을 나가려던 차에 문에 열리고.
여전히 창백한 표정의 이정미가 다시 돌아왔다.
“저, 정미야 괜찮아?”
“응. 안정제 먹고 좀 나아졌어.”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는 여전히 가늘게 손을 떨고 있었다.
“퇴원하면 다른 병원부터 알아보자. 여긴 영 신뢰가 안 가는 것 같지 않아?”
“응? 여기도 나쁘지 않은데…….”
“그런데 아까 하던 이야기는 어떻게 됐어? 의사가 좀 생각해보겠대?”
이정미의 상태보다 궁금한 것이 시현의 반응이었다.
“당첨권 다시 돌려주신다고 했어. 법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로 구설수에 올라서 좋을 거 없다고.”
이정미가 희미하게 웃으며 1등 당첨 응모권을 내보였다.
“이거 빨리 정리해서 어머니 병원비에 보태자. 비싸더라도 치료도 제일 좋은 곳에서 받으실 수 있게 하고.”
“정말?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한데.”
남자는 머쓱한 듯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내뱉었다.
“평소에 딱히 차 탈 일이 없으니까 괜찮아. 그런데 이거 받으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좀 있어.”
“그게 뭔데? 말만 해! 내가 다 처리해줄게.”
남자가 의욕적으로 눈을 빛냈다.
“그게…….”
이정미가 말끝을 흐리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제세공과금 차량 가액의 22% / 취등록세 7% / 보험료]
“경품이라 그런지 세금이 많이 나오더라고. 혹시 오빠 내가 전에 빌려준 돈 중에 일부라도 갚아줄 수 있어? 이걸 먼저 해결해야 차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돈이 꽤 들 것 같은데?’
속으로 내야 할 돈을 계산하던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돈이야 다시 빌리면 되고. 차는 조금 타다가 팔면 그만이니까.’
어디까지나 차량 소유주는 이정미였지만, 남자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언제든 그 돈을 제 주머니로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
“그래! 이 정도는 금방 구할 수 있지. 걱정하지 마.”
“고마워, 오빠. 그럼 경품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즉시 받는다고 할게. 어머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이정미는 남자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