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95화 (95/195)

95화 chapter 23. 분노의 심리학 (8)

* * *

20분 전 간호사 스테이션.

“이정미 님, 괜찮으세요?”

불안발작으로 면담실에서 나온 직후 시현이 물었다.

“후우. 이제 좀 낫네요.”

이정미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항불안제 효과가 슬슬 나타나는지 표정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BP 110/80mmHg 정상입니다. 산소포화도도 괜찮습니다.”

병동 간호사가 환자 팔에 감긴 커프를 풀며 말했다.

“그래도 일단 병실에 누워계시는 게 낫겠습니다. 면회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아요.”

“괜찮아요. 저 걱정된다고 왔는데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이정미 님 없이도 두 분 이야기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시현의 시선이 스테이션의 CCTV 모니터를 향했다.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이따금 웃기도 하면서.

공황 증상으로 안정실에 들어간 환자가 걱정돼서 나올 법도 한데, 보호자랍시고 온 두 사람은 여전히 면담실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이정미가 무심코 물었다.

“내용이 궁금하세요?”

“아뇨.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이쪽으로 오시죠.”

시현이 스테이션 구석에 있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 뒤로 드러난 좁고 어두운 통로.

“거길…… 환자분이랑 들어가신다고요?”

혈압을 쟀던 간호사가 놀라서 물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따라오시죠.”

“아, 네.”

시현과 이정미가 통로로 들어서자 간호사는 주위를 살핀 뒤 곧바로 커튼을 쳤다.

* * *

짧은 통로를 지나 작고 어두운 방.

“여기는 어딘가요?”

이정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비좁은 데다 환기가 되지 않아 답답함이 올라왔다.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촤아악.

시현은 이정미에게 의자를 권한 뒤 한쪽 벽면에 걸린 커튼을 걷었다.

“여, 여긴?”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눈앞에 면담실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럼 면담실에 걸려있던 거울이?”

“원웨이미러(one-way mirror) 입니다. 저쪽에서는 여길 볼 수 없죠.”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듯, 두 사람은 말없이 보호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눈앞에 복이 굴러 들어와도 못 찾아 먹는 앤데 우리라도 챙기자고.

남자 배우의 대사가 심장을 할퀴고,

- 새 차로 우리 드라이브 한 번 가는 거야? 어디가 좋을까?

여자 배우의 웃음이 폐부를 찔렀다.

“어, 어떻게…….”

이정미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이이잉.

그리고 뒤이은 전화.

- 야! 너 어디야? 아침부터 나가서 뭐하고 돌아다녀?

“......”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이정미는 할 말을 잃었다.

“저, 괜찮으세요?”

시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천성이 여린 사람이었다.

보호자랍시고 찾아온 두 사람의 행태가 도저히 눈 뜨고는 못 볼 수준이라 데려오긴 했지만, 충격이 크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한참 만에 돌아온 대답은 시현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내가 그동안 뭘 한 거지…… 이제 정신이 좀 차려지는 것 같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여전히 두 사람을 응시한 채 이정미가 대답했다.

주먹을 꼭 쥔 그녀의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 * *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

“시간 되면 날마다 올게. 잘 쉬어.”

“아니야. 오빠도 바쁠 텐데 퇴원하고 봐.”

면회를 마치고, 이정미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병동을 나섰다.

“차 받는데 필요한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볼게. 걱정하지 마.”

“그럼 경품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받게 해달라고 할게. 어머님 치료가 급한데.”

이정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오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지? 세금이랑 수수료 이것저것 하면 천만 원은 넘을 텐데.”

“그 정도쯤이야 뭘! 어차피 너한테 빌린 돈 갚는 건데. 정 안되면 엄마한테라도 말해볼게.”

“어? 어머님은 지금 입원 중이시라고…….”

이정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랬었지? 하하하.”

“오빠, 우리 이만 가자. 정미 피곤할 텐데.”

이영지가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정미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그래, 고마워.”

이정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철컥.

폐쇄병동의 철문이 서서히 닫히고 두 사람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이정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굳게 닫힌 출입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심상치 않은 노기가 서려 있었다.

“벌써 가셨네요.”

“…….”

시현이 다가와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정미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죠?”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고 열이 올라왔다.

하지만 평소 겪었던 불안 증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도대체 나한테 왜!”

왈칵.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슬픔이나 자책 그리고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사람들인 거……. 선생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네요?”

두 사람을 보내고 다시 면담실에 앉은 이정미가 물었다.

“조금은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시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선생님이 왜 그런 ‘조건’을 내걸었는지.”

이정미가 환자복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본 계약은 천시현(이하 “갑”이라 함)이 보유한 경품 당첨권을 무상으로 이정미(이하 “을”이라 함)에게 증여하고 이에 관련된 사항의 규율을 목적으로 한다.]

증여 계약서.

며칠 전 면담실에서 시현이 건넨 서류였다.

혹여 어떤 대가를 바라고 쓴 것은 아닌지 꼼꼼히 살펴봤지만, 증여 자체에는 아무 조건도 없었다.

이정미의 눈길을 끈 내용은 문서 말미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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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약 사항]

1. 상기 계약 내용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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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권만 돌려주시면 그만인데, 왜 굳이 비밀로 하라고 하는지 궁금했었거든요.”

“의사가 환자와 금전 거래를 했다는 둥 괜한 말이 나오는 게 싫었습니다.”

“정말 그것뿐인가요?”

이정미가 반문했다.

남자친구의 무리한 요구. 공황 발작. 그리고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대화를 보게 된 것까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상황이 의도된 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연락조차 되지 않던 남자친구가 찾아온 것도 이 모든 것을 비밀로 했기 때문이었다.

여자친구가 의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도저히 볼 수 없어서 도와주러 왔다고 하는 편이 더 명분이 있었으니까.

“남자친구분 일은 유감입니다.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차가운 말투였다.

“후, 정신이 번쩍 드는데요? 내 마음 편하자고 지금껏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았던 것 같아요. 이제는 정리해야죠.”

그녀의 말에 시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보세요.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이정미가 웃어 보였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

응급실에서 힘들어하던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분노는 나의 힘 - 분노는 때때로 성장을 위한 연료가 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3,000P)]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 적절한 개입으로 예정된 스트레스가 대폭 감소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3,000P)]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알림창이 떠올랐다.

‘무슨 속셈인 건가.’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이정미가 휘둘릴 일은 더 없을 듯했다.

* * *

몇 주 뒤.

“그래, 입원 환자들은 스테이블한 것 같고.”

회진을 마친 뒤, 진철영이 레지던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요즘 퇴원한 환자들 경과도 좋은 것 같아. 얼마 전에 퇴원한 그 902호 환자도 외래 왔었는데 많이 호전됐더라고.”

진철영이 하도영을 보며 말했다.

“이정미 환자분 말씀이십니까?”

“맞아. 하도영 선생이 무슨 조화를 부린 건가? 입원할 때만 해도 다 죽어가는 얼굴이었는데 어떻게 좋아진 거지?”

“특별한 것은 없었고 퇴원 며칠 전에 떼인 돈을 돌려받았다고만 들었습니다.”

“그래? 이유가 따로 있었구먼. 허허허.”

진철영이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잘 지내는 모양이네.’

남자가 다시 이정미를 괴롭히지나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일 없는 모양이었다.

위이이잉.

회진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이 울렸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 응급실 인턴 노민혜입니다. 노티 드리겠습니다.

‘민혜?’

말만 인턴이지 사실상 차기 1년차였다.

- 32세 남자환자로 기저 질환은 없으며, 두통과 소화불량 그리고 두근거림을 호소하며 방문하셨습니다.

‘응급실 환자.’

[SORA : 응급실 내원 환자 명단을 출력합니다.]

‘초진 환자인데. 어떻게 봤는지 들어나 볼까?’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그 환자 같이 보죠.”

시현은 통화를 마치고 즉시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래, 어떤 환자인가요?”

시현이 노민혜의 차트를 쭉 살피며 물었다.

“주증상은 두통과 가슴 답답함인데 Brain CT 포함한 기본 검사상 이상 소견 없었습니다. 다만 최근 며칠 사이에 금전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하고…….”

“금전 문제라면?”

“여자친구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그 후로 상대가 연락 두절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이 내용만 보면 증상이 심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응급실까지?”

“같이 온 여자분 말로는 환자가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급히 진단서가 필요해서 왔다고 합니다. 외래 진료는 예약이 많이 밀려있다면서…….”

‘16번 베드…….’

이해할 수 없는 방문 이유에 천시현은 환자의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

[고정태 남/32세 인턴 노민혜 / R1 천시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침상에 걸터앉은 모습이 낯이 익었다.

“이 환자분은 이상 소견이 전혀 없는 것 같네요. 설명하고 돌려보내도록 하죠.”

검사 결과를 모두 확인한 뒤, 시현이 말했다.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인턴 말은 믿을 수가 없다고 담당과 선생님을 데려오라고 성화입니다.”

“글쎄요. 제가 보는 게 과연 환자분 증상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오히려 역효과일지도…….”

시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요, 환자가 머리가 아프다잖아요. 신경과나 신경외과 의사 아직도 안 내려왔어요? 진단서는요?”

다음 순간, 누군가 스테이션으로 다가와 노민혜를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 지금 오셔서…….”

“보호자님이셨군요. 오늘은 다른 환자 보호자로 오셨나 보네요?”

노민혜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시현이 되물었다.

흠칫.

시현과 눈이 마주친 보호자의 눈이 커졌다.

“아파 죽겠는데 의사는 왜 안 오는 거…….”

보호자의 등 뒤에 서 있던 환자도 시현을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안 그래도 설명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시현이 검사 결과를 띄운 모니터를 환자와 보호자 쪽으로 돌렸다.

모든 검사 결과들이 정상 범주 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상 소견은 없었다.

“……그래서 특별한 진단명이 없습니다. 진단서 발급은 어렵겠습니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원인이라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 뭐냐, 트라우마라던가 그런 거 있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트라우마요? 본인이 빌린 돈 중 일부를 갚는 게…… 언제부터 트라우마가 됐습니까?”

“…….”

시현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분명 정미가 차를 팔아서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 치료에 보태겠다고…….”

그러나 이내 남자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

“요즘은 카드 연체 통보가 중환자실로 가는 모양이죠?”

“그걸 어떻게? 야! 이 새x 너 정미랑 무슨 관계야?”

남자의 목에 핏대를 올리며 모니터를 흔들어댔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느새 남자의 등 뒤로 다가온 보안요원들.

“어? 환자분은 지난번에…….”

그들 중 한 사람이 남자를 알아보았다.

“또 뵙네요. 오늘은 ‘정당방위’ 기회 좀 주십니까?”

[보안요원 이동석]

곰 같은 체구에 불독 같은 인상의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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