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chapter 24. 응급 회식 (1)
“또 뵙네요. 오늘은 ‘정당방위’ 기회 좀 주십니까?”
[보안요원 이동석]
곰 같은 체구에 불독 같은 인상의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시현이 보안요원들에게 말했다.
무슨 의도인지 조금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뜬금없이 응급실에 나타나 환자 코스프레를 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돈 떼이고 나서 우울하고 힘들다고요. 있는 그대로 좀 적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예?”
보안요원들이 물러서자 고정태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아무 증상이나 말하고 소견서라도 챙겨 오랬지.’
고정태는 며칠 전 변호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이정미 씨가 고정태 씨를 투자 사기로 고소했습니다. 돈도 돈인데 정신적 충격이 워낙 커서 입원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면피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소견서라도 받아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인 간에 다툼으로 이쪽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뭐, 그런 내용이면 될 것 같은데요. 대학 병원이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고요.
그렇게 부랴부랴 응급실에 왔는데 하필이면 당직이 시현이었다.
‘하필이면 이 녀석이 또 나올 게 뭐람.’
고지식한 데다 이정미의 편임이 확실한 사람.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별다른 이상 소견이 없습니다. 진단서 작성은 어렵겠습니다.”
역시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럼 다른 과 의사라도 보게 해줘요! 응급실에 의사가 선생님밖에 없어요?”
“아까 진료 봤던 노민혜 선생도 의삽니다. 이미 다른 과를 호출했지만, 해당 사항이 없으셔서 저희 과를 호출한 거고요.”
“인턴 나부랭이 말고 진짜 의사 데려오라고요! 머리도 아픈데 신경외과 의사 없어요? 내 돈 주고 내가 진료 보겠다는데 뭐가 문제죠?”
원하는 서류를 받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기세.
“그리고 응급실이 이렇게 느리면 안 되지! 환자가 원한다는데 얼굴 한 번 보여주면 되는 걸 뭘 그렇게 비싸게 굴어? 입구에 보니까 국내 최고의 의료 서비스 어쩌고 하더니만 서비스 정신은 밥 말아 먹었나?”
“…….”
이제는 서비스를 운운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요. 고정태 씨.”
시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그거야 당연히…….”
고정태가 천시현의 시선을 따라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드르르륵.
- 환자 의식 떨어집니다!
- 야, CT실 바로 내려가! 수술방에는 연락해둘게!
삐삐삐삐.
- 산소포화도 유지 안 되는데요?
- 인튜베이션 할게요. ICU 병실 준비 아직 안 됐대요?
- 선생님, 환자 BP도 안 잡혀요.
- 수혈 준비해주세요. 수액 풀드립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 사이로 문자 그대로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때로는 심장이 멎고 숨길이 막혀서.
더러는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로 많은 피를 흘려서.
빠른 진료를 원해서가 아닌, 그저 살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여기서는 담당과도 진료 순서도 우리가 정합니다. 환자 상태에 따라서요.”
“…….”
고정태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보았다.
유난히 중증 환자가 많았던 탓인지, 명료한 의식으로 스테이션에 걸어 나와 컴플레인할 수 있는 환자는 자신뿐이었다.
“신경외과 의사 찾으시던데, 지금 응급수술 준비하느라 좀 바쁩니다. 진료 지연에 대한 정당한 사유로 보이는데요. 설마 뇌출혈로 의식 떨어지는 환자 제쳐놓고 먼저 봐달라는 말입니까?”
“뭐 이런 병원이 다 있어? 민원 넣을 거니까 여기 책임자 나오라고 해! 응급실에서 젤 높은 사람 누구야? 어디 있어?”
말문이 막히자 고정태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현과 노민혜의 눈이 커졌다.
주위를 둘러싼 보안요원들도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당황하는 꼴 하고는.’
후훗.
회사나 병원이나 높은 사람 불러오라는 말은 통하는구나.
고정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환자분,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정태는 고개를 돌렸다.
보안요원만큼 큰 체구의 중년 의사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중년 의사가 고개를 돌려 시현과 노민혜를 향해 물었다.
“32세 남자 고정태 님, 비특이적인 두통과 흉부 불편감을 주소로 방문하셨는데 검사상 이상 소견은 없어서 일단 정신과로 의뢰되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진단 가능한 병명은 없고 특별한 처치 요하지 않을 것으로…….”
노민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정태가 따지고 들었다.
“아니! 여기는 선생님들이 진찰도 제대로 안 해주면서 다른 과 의사는 불러주지도 않고 진단서도 못 써주겠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진단서를 요청받았을 때 거부하면 안 되는 걸로 아는데요. 의료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응급실에 방문하기 전 변호사가 말해준 그대로였다.
“이런, 이제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습니다. ‘고객’ 응대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군요.”
고정태의 말을 듣고는 중년 의사가 씩 웃어 보였다.
“그렇죠? 역시 연륜이 있으신 분이라 말이 통하네요. 그러니까 제가 말한 대로…….”
“앞으로 비슷한 경우가 생기면 선생님들이 직접 상대하지 마시고 법무팀 통해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세요.”
중년 의사가 시현과 노민혜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안전이 중요하니 보안요원도 미리 부르시고요. 절대로 진료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그의 반응은 완전히 고정태의 예상 밖이었다.
“진료거부라고 하셨습니까? 까짓것 해보죠. 환자분은 일단 퇴실하도록 하십시오.”
“저더러 지금 나가라고요?”
“네, ‘진짜 환자’ 보기도 바쁜 사람들 고생시키지 마시고 따로 상의하자는 말입니다.”
“뭐요?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해요?”
“좀 전에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 찾지 않았습니까?”
고정태는 그제야 중년 의사의 명찰을 확인했다.
[응급의료센터장 조광필]
“…….”
“그리고 진단서 운운하시던데. 검사가 부족한 것 같으니 추가 검사 결과를 보고 결정하도록 하죠.”
“어떤… 검사 말씀이세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이영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통이 있다고 하시니 뇌척수액 검사나 뇌 MRI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단, 검사 후 별다른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을 시엔…….”
“아무 이상이 없으면 된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조광필이 말끝을 흐리자 고정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검사 결과 이상이 없을 시엔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검사비 ‘전액’을 본인 부담으로 하셔야 합니다.”
“…….”
“원래는 검사 예약하고 촬영까지 몇 주 걸리는데, 특이… 아니, 특별한 환자분 같으니 검사실에 이야기해서 당일에 처리할 수 있도록 해드리죠.”
‘소견서 한 장 받겠다고…… 그 돈을 더 쓴다고?’
애초에 ‘응급실 진료가 필요한 심한 스트레스’로 통원 확인서 정도 받아볼 요량으로 찾아왔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명백하게 업무 방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이 건에 대해서는 별도로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광필이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이게 무슨 난리야? 적당히 하고 그만 가자.”
“아니, 잠깐만!”
고정태는 이영지에게 끌려 나가듯 응급실을 떠났다.
* * *
“요즘 응급실은 좀 어때요?”
두 사람이 떠나자 조광필이 스테이션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센터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오늘은 비번인 날 아닌가?
응급실 수간호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그냥 와봤어. 퇴근하는 길에 잠깐. 나 없이도 잘 돌아가나 확인하러 왔지.”
“아…… 저희 일 잘하고 있는지 감시하러 오신 거예요?”
수간호사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격려차…….”
“에이, 격려차 방문인데 빈손으로 오시면 어떡해요? 커피라도 사 오셨어야죠!”
법인 카드 뒀다가 어디다 쓰시게요.
수간호사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피식.
“다음번엔 우리 수선생님 좋아하는 걸로 꼭 사올게요. 어려운 일 있으면 그때그때 얘기해요. 엄주영 선생도 수고해.”
“네, 과장님.”
“그래…… 연초니까 특별히 더 신경 써야 할 거야.”
이 무렵의 인턴들은 이른바 ‘말턴’으로 진로가 어느 정도 정해진 시기.
인턴 점수를 잘 받아야겠다는 동기도 없으니 아무래도 근무 기강은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전하시네.’
센터장이면서도 인턴 레지던트들을 손수 챙기는 모습이 주니어 스텝 못지않았다.
“정신과 선생님들도 고생 많아.”
조광필이 이번에는 시현과 노민혜를 보며 말했다.
“까다로운 환자였는데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긴. 이런 거 처리하는 게 관리자들 일이지.”
저쪽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레지던트들을 바라보며 조광필이 말했다.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환자 성실하게 보고 공부 열심히 하면 그걸로 된 거야. 다들 잘하고 있는 것 같구먼.”
“1월이니까요.”
각자의 연차에서 1년이 지난 시점.
맡은 업무에 가장 익숙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겠구먼. 그리고 천 선생은 조만간 밥 한번 먹자고.”
“네? 어떤 일이십니까?”
“인턴들하고 우리 간호사들이 응급실 근무 성실하게 한 레지던트들 뽑았는데, 천 선생도 순위권이야. 그래서 우리 회식에 초대할까 하는데.”
“응급실 회식이라면…….”
“우리 입퇴국식 때 시간 괜찮으면…… 아니, 필참이니까 꼭 오도록 해. 이광섭 과장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릴게.”
조광필이 흡족한 표정으로 시현을 보며 말했다.
입퇴국식.
입국식과 퇴국식을 합친 말로, 신규 레지던트가 의국에 들어오고 4년차 레지던트가 졸국하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뭐, 천시현 선생님이야 노티가 끝나기도 전에 도착하는 편이라…….”
수간호사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고.
“축하드려요! 선생님 순위에 드실 줄 알았어요!”
노민혜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망… 했다.’
반면 시현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과별로 분위기 차이는 있겠으나, 입퇴국식이라고 하면 연중 가장 큰 행사가 아니던가.
바꿔말해 1년 중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자리라고 보면 된다.
입국하는 사람과 졸국하는 사람은 거의 인사불성이 된다고 보아도 좋았다.
‘부담스럽긴 한데.’
눈을 빛내는 노민혜를 보니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회귀 전보다 1년차를 훌륭하게 해낸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응급실 콜을 잘 받아주는 것도 나름 좋은 전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과장님, 입퇴국식 ‘어디서’ 해요?”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자고 마음을 돌리는 사이 수간호사가 물었다.
“설마… 올해도 ‘그 집’은 아니겠지요?”
뜨끔.
그녀의 질문에 조광필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고.
이내 수간호사는 모든 걸 눈치챘다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어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우리도 좀 다른 데 좀 가면 안 돼요?”
“아니, 수선생님. ‘그 집’이 어때서 그래요? 병원에서 가깝기도 하고 삼겹살도 먹을 만…….”
“가까운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수간호사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었다.
“저도 삼겹살 좋아해요! 그런데… 몇 년째 같은 메뉴는 좀 아니잖아요! 이러다 우리 엄주영 선생님 4년 내내 삼겹살에 소주만 먹다가 졸국하게 생겼다고요!”
그녀의 시선이 응급의학과 치프인 엄주영을 향했다.
“치프 선생님, 말씀 좀 해보세요! 제 말이 틀렸어요? 다른 과는 우아하게 칼질도 하고 그러던데…… 우리 식구들도 고생 많이 하잖아요? 이번에는 우리도 제발…….”
시현으로서도 저런 수간호사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평소 묵묵하게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반복적으로 삼겹살과 소주에 노출되다 보니 과격해진 것 같았다.
“흠흠…….”
치프 레지던트인 엄주영은 조광필과 수간호사 사이에 끼어 좌불안석이었다.
“아니, 제가 꼭 맛있는 거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사기 진작을 위해서…….”
“수선생님,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중에 제가 사비로라도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하지만 가뜩이나 적자 과라고 눈치 보이는데 회식비 집행까지 많이 해버리면…….”
조광필이 난처한 표정으로 수간호사를 달래듯 말하는데.
딩동!
별안간 떠오르는 알림창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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