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chapter 24. 응급 회식 (3)
[정유희 여/26 응급실 간호사 3년차]
‘사람 속은 모르는 거라더니…….’
그녀의 등 뒤로 검붉은 오라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방금 웃으면서 잔 권하지 않았나?
응급실에서도 시현을 살갑게 대하던 간호사였다.
최근 몇 주 동안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특별히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우리 응급의학과 식구들, 그리고 각 과 레지던트 선생님들 항상 열심히 해주셔서 너무 든든합니다.”
조광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료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곧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실 선생님들 미리 축하드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레지던트 선생님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 쉽지만은 않은 길이지만, 그럴수록 많이 먹고 힘내서 또 많이 살립시다!”
쨍쨍쨍.
어진 조광필의 건배사 끝에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크… 시현아, 나 요즘 도망가고 싶다. 진짜로.”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며 한준식이 말했다.
“도망가서 뭐하게?”
“그냥… 잠을 좀 원 없이 자고 싶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1년차도 끝나가는 시기라 적응이 되었을 법도 한데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네가 고생이 많다.’
시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디컬 드라마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수술을 멋지게 성공시키는 주인공으로 흉부외과 서전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들 심지어 의대생들도 흉부외과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얘가 학생 때만 해도 그렇게 동안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1년 사이에 확 늙어버린 것 같았다.
“밤잠 못 자고 일해봐야 천덕꾸러기 신세에…… 나중에 일자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생명이 오고 가는 대수술을 해봐야 수가가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고 전문의가 되더라도 대형 병원이 아니면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으니 취업에도 불리했다.
그 모든 것을 알고도 흉부외과에 지원한 한준식을 시현은 동료로서 존경했었다.
“힘내…… 죽을 거 같으면 죽기 전에 꼭 얘기하고.”
“얘기하면?”
“뭐, 일단 폐쇄 병동에 입원하면 살 수는 있겠지?”
마음 같아서는 ‘회복 포션’이라도 하나 건네고 싶은데, 아쉬운 대로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나쁘지 않네. 일단 거기 가면 잠은 충분히 자고 삼시 세끼 밥은 나오니까.”
“우리 일년차들은 무슨 이야기를 그리 심각하게 해?”
어느 틈에 조광필이 다가와 물었다.
“앉아. 앉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두 사람을 만류하며 시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천 선생도 그렇고 한 선생도 우리 간호사들 칭찬이 자자해.”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래, 2년차 돼서도 잘 부탁해.”
훈훈하게 덕담을 주고받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이고, 천시현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50대 중반 정도에 다소 통통한 체구의 남자는 김민숙 환자의 보호자, 식당 주인인 김대남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곳에서 식사도 하고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무슨. 선생님 덕분에 되찾은 돈이 더 큰데요!”
김대남이 괘념치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실은 제가 ‘유명하신 분’한테 물어봤는데, 도움받은 걸 제때 갚아야 집안에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유명하신… 분이요? 화를 면한다는 건 무슨?”
“네, 강남에서 엄청 유명한 역술인이라고 하던데… 아무튼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 네…….”
그 유명하다는 역술인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불안이 높고 미신적인 생각이 강해.’
정길수와 같은 사기꾼에게 쉽게 당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환자와 보호자를 안심시키고 붙들어 주는 것도 시현의 역할이었다.
“아무튼, 오늘 평소보다 신경을 많이 썼으니 많이 드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주인은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와, 오늘 자리 시현이가 잡은 거였어?”
“어쩌다 보니… 사장님이 초대해주셔서.”
“어쩐지 평소보다 더 맛있는 것 같더라.”
한준식이 고기 맛을 천천히 음미하더니 엄지를 치켜들었다.
“천 선생이 이번에 큰일 했지. 한 선생도 요즘 고생 많지?”
조광필이 이번에는 한준식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뻔히 아는데.”
본래 흉부외과 출신인 만큼 한준식의 사정은 훤히 알고 있는 그였다.
“올해 흉부외과 지원자는 좀 어떤가?”
“한 명이지만 성실하고 일도 잘하는 친구입니다. 설현수 선생이라고…….”
“아, 설 선생이라면 중간에 정신과 한다고 하더니 결국 흉부외과를 썼네? 정말 다행이야.”
가뜩이나 비인기과인데 지원자가 줄어들면 기존 레지던트들의 부담이 커진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다 보면 더더욱 인턴들의 외면을 받는 악순환이 생겨나기 마련.
자칫 흉부외과 수련의 명맥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힘든 일 하는 만큼 서로 잘 도와야 해. 전공의 과로사 한 번씩 뉴스 나오는 거 알지? 환자도 중요하지만, 본인 건강도 잘 챙기고 술도 조금만 마시고.”
“네, 교수님.”
“아, 근데 오늘은 좀 마셔줘야겠지?”
조광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잔을 채웠다.
“하하하…….”
조광필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자 눈치를 보던 시현과 한준식도 곧바로 잔을 비웠다.
한준식이 어색하게 따라 웃는데, 그의 뒤편으로 카운터에 서 있던 식당 주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 있나?’
웅성웅성.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그는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와장창.
무언가 넘어지고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기! 여기 좀 도와주세요!”
식당 안쪽으로 연결된 통로에서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내 식당 주인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저희 손님 중에 한 분이 쓰러지신 것 같아요. 잠깐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 말에 조광필과 레지던트 몇 명이 쓰러진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괜찮으세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으으…….”
6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신음하더니 금세 의식을 잃었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엄주영이 곧바로 경동맥을 짚었다.
“펄스 없습니다!!!”
순식간에 식당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뭣들 하고 있어? 흉부 압박 시작해!!”
조광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들이 환자를 바닥에 바로 눕히고 심폐소생술 자세를 취했다.
그러는 동시에 조광필 자신은 119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최대한 빨리 와줄 것을 요청했다.
딩동!
[허주현 남/65 R3 엄주영 / Prof. 조광필]
레지던트들이 심폐소생술을 시작하자 환자의 머리 위로 정보창이 떠올랐다.
[치료 진척도 7/100 생존 확률 13%]
여전히 의식 없이 누워있는 환자.
생존 확률을 보지 않고도 초응급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 하나! 둘! 셋! 넷!
엄주영이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완벽한 자세로 강한 흉부 압박을 실시했다.
“김정현 선생! 에어웨이(기도) 확보하고 호흡 불어넣어!”
어리버리하게 옆에 서 있던 김정현이 조광필의 호통에 구조 호흡을 불어 넣었다.
병원에서는 기도 삽관을 통해 호흡을 공급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그에게도 처음이었다.
[치료진척도 13/100 생존 확률 18%]
정확한 심폐소생술로 생존 확률이 약간 올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망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치료 여건이 잘 갖춰진 병원 내에서 심정지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이런 상황에서야.
흉부 압박을 할 사람만 많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시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치료진척도 12/100 생존 확률 17%]
[치료진척도 11/100 생존 확률 15%]
[치료진척도 10/100 생존 확률 14%]
아니나 다를까 생존 확률이 실시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딩동!
다음 순간 들린 알림음에 시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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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톤 퀘스트 – 사슬의 수호자]
난이도 S
성공 조건 : 심정지 환자의 성공적인 ROSC(자발 순환 회복)
성공 보상 : ???
실패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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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에 응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키스톤 퀘스트?’
가만 보니 시스템 창도 평소와 다른 형태였다.
다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 사람들이…….’
흉부압박을 실시하던 엄주영도 김정현을 다그치던 조광필도 그 자세 그대로 멈춰버렸다.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일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또각또각.
정적을 깬 것은 바닥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였다.
“천시현 선생님.”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SORA……?’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지 않은 상황이신 것 같네요.”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계셔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중요한 선택이라면… 지금 이 퀘스트?”
시현의 질문에 SORA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일단 수락해야지. 사람이 죽어가는데 패널티라고 해봐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키스톤 퀘스트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자칫 사용자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보수적으로 접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키스톤(Keystone).
아치형 벽돌 구조의 한가운데에 끼워 구조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부채꼴 모양의 돌.
석조 구조물에서 가장 중요한 돌로 이 돌 하나가 빠지면 구조물 전체가 무너진다.
‘그만큼 중요한 환자라는 건가?’
목숨에 경중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꽤나 영향력 있는 사람인 듯했다.
“성공 보상을 받을 확률은 0에 가깝습니다. 실패했을 경우 패널티도 분명 클 거예요.”
시현의 시선이 시스템창을 향했다.
보상도 패널티도 알 수 없는 독특한 퀘스트.
‘사슬의 수호자라…….’
다음 순간 시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네. 당연히 마음이 좋지 않으시겠지만 사용자의 안전도 중요…….”
[system : ‘수락’을 선택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한번 해볼게.”
시현이 SORA를 향해 웃어 보였다.
* * *
‘내 생각이 맞는다면 퀘스트 의도는…….’
생존 사슬(chain of survival).
환자를 소생시키기 위해 연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다섯 단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중간에 한 단계라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환자는 목숨을 잃게 된다.
‘구조요청과 심폐소생술은 제대로 되고 있어.’
남은 건 제세동, 전문소생술 그리고 소생 후 치료였다.
“준식아, 잠깐 나가자.”
시현이 한준식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흉부 압박 교대해줘야지 어딜 가?”
“압박할 사람 많아.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어.”
시현은 그를 끌어당기다시피 해서 식당 문밖으로 나왔다.
“준식아, 바로 옆 건물 칠성 생명 1층에 가면 AED(자동심장충격기) 있을 거야. 그거 가져다드려.”
“거기 그런 게 있어?”
“응. 있어. 며칠 전에 거기 1층 카페에 가봤는데 로비에 비치되어 있더라고.”
카페에 간 적은 없었지만, 분명 거기에 AED가 있었다.
회귀 전의 기억대로라면 안내 데스크 맞은편 벽에 걸려있을 것이다.
“나는 응급실에 가서 에피네프린(epinephrine) 받아서 올게.”
병원까지는 직선거리로 600여 미터. 열심히만 달리면 퇴근길 구급차보다 빠르게 에피네프린을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준비해줘.’
[SORA : ‘가속 포션’을 적용합니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
팔다리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시현은 응급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