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Chapter 24. 응급 회식 (6)
‘아이템 샵 열어줘.’
[SORA :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반영하여 아이템 샵이 새단장 하였습니다.]
[SORA : 새로운 아이템 샵 ‘의사장터’에 로그인하였습니다.]
‘의사… 장터?’
작명 센스가 좀 아니다 싶었지만, 인터페이스는 확실히 개선된 것 같았다.
시현은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의사장터’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NEW’ 표시가 된 신규 아이템들과 프로모션 특가 이벤트가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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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한정 50% SALE!!!
[인물 관계도(A) - 환자 주변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한 관계도를 제공합니다. (50,000P -> 25,000P/1장)]
[환국어 번역기(B) - 환자의 언어와 의학 용어 사이의 간극을 상당 부분 해소합니다. (10,000P -> 5,000P/1회)]
[스크리닝 포션(B) - 환자의 병변 부위를 대략적이지만 신속하게 표시합니다. (10,000P -> 5,000P/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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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포인트?’
어처구니없는 가격에 눈이 번쩍 뜨였다.
사람 목숨을 구할 정도의 공헌을 해야 1만 포인트인데, 아무리 할인 전 가격에는 인플레가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일일 퀘스트’를 한 달 내내 해도 못 살 아이템이었다.
‘카이트만의 안경을 10번 쓰고 말지 저건…….’
쿵쿵쿵.
‘의사장터’를 좀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누군가 테이블을 치는 소리에 주의를 빼앗겼다.
“아, 선생님! 잘 좀 해봐요!”
김정현이 인턴들을 시켜 폭탄주 도미노를 만들고 있었다.
“자, 이제 한 잔씩들 합시다.”
“아… 네…….”
“원샷입니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받는 인턴들.
그중 한 명이 시현의 시선을 붙잡았다.
‘민혜?’
시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 * *
시현이 자리에 앉자 응급의학과 치프 엄주영이 반갑게 맞았다.
“인턴 선생님… 아니, 이제 엔피(NP, 정신과) 2년차네?”
엄주영에게는 아직도 인턴 호칭이 익숙한 듯했다.
“안녕하세요. 교수… 아니 선생님.”
회귀 전의 엄주영은 삼아대병원 응급의학과에서 펠로우를 마친 뒤 임상조교수가 되었다.
이전 호칭이 익숙하기는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일은 할 만해?”
“덕분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레지던트로 합격한 데는 응급실 점수가 잘 나온 것도 한몫했기에 그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
“우리 과 돌 때 붙잡았어야 했는데…… 자자 한 잔씩들 하자고.”
훈훈한 덕담이 오고 가는데 유독 김정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억지로 잔을 끝까지 비우더니 애꿎은 인턴에게 한마디 했다.
“우리 인턴 선생님은 왜 마시다 말아?”
노민혜의 잔에 술이 반쯤 남아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노민혜가 다급히 남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과에 이미 합격했으니 적당히 무시할 만도 한데 아무래도 상대를 잘 못 만난 것 같았다.
시현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민혜 여/23세 삼아대병원 인턴]
빠른년생으로 학교를 일찍 들어온 데다 과학고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온 독특한 케이스.
똑똑한 데다 환자들에게도 잘해서 의국 생활 내내 예쁨을 많이 받았던 후배였다.
‘저렇게 마시면 안 되는데…….’
문제는 노민혜의 주량이었다.
얼마 후 있을 정신과 입퇴국식에서 그녀는 소주 다섯 잔에 의식을 잃고 황진호에게 업혀 응급실에 방문할 예정이다.
레지던트 기간 동안 부단한 노력을 했지만, 시현이 4년차가 되도록 그녀의 주량은 전혀 늘지 않았다.
“어휴. 술 좀 그만 줘요. 우리 인턴 선생님 술도 못하는 것 같은데…….”
노민혜 옆에 앉아있던 차지 간호사가 김정현을 말렸다.
“에이…… 아직 2차인데 뭘. 우리 때는 선배가 글라스에 양주를 줘도 군말 없이 다 받아 마셨다고.”
꼰대 기질까지. 새삼 저런 윗년차 밑에서 수련 받는 이철원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여기 선생님은 정신과 픽스니까 천시현 선생님이 좀 챙겨봐요. 흑기사라도 좀 해주던가. 하하하.”
“…….”
김정현이 시현을 힐끔 보더니 다른 사람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노민혜 선생님은 억지로 드시지 마세요.”
시현도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과는 알코올 사용 장애(Alcohol use disorder)를 치료하는 과인데, 과음하고 인사불성이 되면 환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중간에 낀 노민혜는 가시방석에 앉아 어쩔 줄을 몰랐다.
“이게 미쳤나? 2년차 된다고 이젠 선배도 눈에 안 보여?”
“…….”
취기가 오른 김정현이 급발진했으나 시현은 무시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왜 그래? 분위기 좀 풀어.”
보다 못한 엄주영이 나섰다.
“자자 한 잔씩들 해.”
시현은 엄주영이 만들어 준 폭탄주를 단숨에 마시며 김정현을 노려보았다.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건가?’
김정현도 잔을 말끔히 비웠다. 엄주영의 의도와는 달리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둘이 또 왜 저러는 거야?”
“저기 가운데 인턴 선생님이랑…… 그 삼각관계? 그런 거 아니야?”
“야! 너 저번엔 이수지랑 삼각관계라며?”
“그, 그랬나? 아니면 말고.”
병원 소문이라는 게 다 이런 식이다. 본의 아니게 또 이목을 끌게 되었다.
김정현과 폭탄주 몇 잔을 주고받자 취기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딩동!
[system : 사용자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유의하십시오.]
‘어지럽다…… 이젠 시스템이 몸 생각도 해주네.’
[system : 지나친 알코올 섭취는 다음 날 진료에 방해가 됩니다.]
‘그럼 그렇지…….’
살짝 감동할 뻔했으나 시스템의 의도는 명확해 보였다.
시스템 관리자, 강성진은 시현이 공부 열심히 하고 환자 잘 보는 것에만 유독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SORA : 추천 아이템이 있습니다.]
[해독 포션(C) - 해로운 물질 사용으로 인한 부정적 효과를 선택적으로 제거합니다. (2,000P)]
‘해독… 포션?’
미처 확인하지 못한 신규 아이템이었다.
‘선택적 제거라면 설마…….’
숙취 해소?
익숙한 네 글자가 뇌리를 스쳤다.
고가긴 했지만, 망설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나름 신상인데 써보고 싶었다.
[SORA : ‘해독 포션’을 적용합니다.]
다음 순간 취기와 졸음이 사라지고 메스꺼움이 가라앉았다.
반면 약간의 들뜸과 행복감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
알코올의 긍정적 효과만 남은 셈.
상대가 아무리 술이 세더라도 이런 상태라면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러니 사람들이 술을 못 끊지.’
진료실에서 만난 알코올 중독 환자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시현의 예상대로 몇 차례 술이 더 돌자 김정현의 잔에도 술이 남기 시작했다.
“선생님, 왜 술을 드시다가 마세요?”
시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적하자 김정현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얼굴이었다.
그는 남은 술을 들이키려다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짓더니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제압되었습니다 - 폭음을 일삼던 빌런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1,000P)]
시현이 의아해하는 사이 조광필 교수가 전화 통화를 마치고 건배사를 제의했다.
“환자분 의식 완전히 회복했다고 연락 왔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살려봅시다!”
의식 회복.
경과는 더 지켜봐야 했지만, 일단 심한 뇌손상을 입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와아아아.”
한껏 들뜬 분위기로 잔들을 부딪치며 회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병원 앞 건널목.
“선생님, 괜히 저 때문에 술 많이 드시고 죄송합니다.”
노민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뭐, 김정현 선생님하고 한잔하고 싶었는데 잘 됐죠. 그런데 선생님은 다른 과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정신과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시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 왜 우리 과에 지원했나요?
인턴 시절 수십 번도 넘게 들었을 질문이지만, 정작 본심을 말하기란 쉽지 않다.
정신과야 응급도 많지 않고 다른 과에 비해 육체적으로는 편한 것이 인기 요인이긴 하지만, 면접에서 그렇게 말했다가는 매우 높은 확률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미 합격도 했겠다 어느 정도 취기도 있으니 진짜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는 걸……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system : 인턴 노민혜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혈액종양내과 돌 때 너무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분명 아침까지도 샘플 하면서 인사를 나눴던 환자분이 저녁에 갑자기 돌아가시는 걸 보는 게…….”
‘죽음을 보는 게 힘들다, 라.’
예과 시절 동물 해부 실습부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실험동물의 심장이 멈추고 사체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게 특히 힘들었다고.
그렇게 보면 그녀에게는 애초에 선택지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아픈 사람을 진료하는 직업 특성상 환자의 죽음을 접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런 이유라면 정신과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많을 텐데요? 영상의학과나 진단검사의학과도 있을 거고…….”
“서비스 파트도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직접 환자를 보는 과를 하고 싶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그랬… 군요.”
굳이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정신과라고 해서 환자의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을.
‘그래도 최대한 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
시현은 회귀 전 노민혜가 담당했던 환자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직접 면담을 한 것은 아니라 기억나는 것은 단편적이었지만, 어려운 환자들은 늘 윗년차들에게 묻곤 했었다.
이번만큼은 허망하게 놓치는 환자가 없도록 더 잘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참, 입퇴국식 때도 억지로 술 드시지 마세요.”
“네?”
노민혜가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교수님들도 술 별로 안 좋아하세요. 오히려 술 마시고 정신 잃으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노민혜의 표정이 밝아졌다.
‘앞으로 3년 내내 볼 사이인데 미리 잘 지내두는 것도 좋겠지.’
딩동!
[system : 인턴 노민혜가 사용자에게 상당한 신뢰를 보입니다. (어려움 난이도 +1,000P)]
누적 포인트를 보던 시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뿌듯한 하루였어.’
환자도 한 명 살렸고 퀘스트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정유희 간호사는 왜 나를 싫어할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천시현 선생님.”
녹색 불이 켜지고 길을 막 건너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시현을 불러 세웠다.
정유희 간호사였다.
‘아니 이 사람은 왜 여기까지 와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저… 한 잔 더하러 가실래요?”
“…….”
시현의 전두엽이 거절할 말을 찾는 사이,
정유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시현의 재킷 소매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