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Chapter 24. 응급 회식 (7)
‘무슨 의도지?’
최기태 교수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라서였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현의 뇌리에 흰 포에 덮여 들것에 실려 가던 이예림의 모습이 스쳤다.
- 앞으론 조심하세요. 지켜보는 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거기에 최세영이 해줬던 말까지.
‘설마… 회귀자인 걸 눈치채고?’
추운 날씨였음에도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괜히 따라갔다가 검은색 승합차에 탄 괴한들에게 납치당하기라도 하는 거 아닌가?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아,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노민혜는 시현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뒤 병원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민혜…야?
아무래도 여기 이 언니가 엄청 무서운 사람 같은데 연약한 윗년차를 남겨두고 혼자서 도망가면 어떡하니.
소리쳐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신용품 없나?’
급한 마음에 ‘의사장터’를 뒤져봤으나 마땅한 것은 없었다.
[SORA : 추천 아이템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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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한정 50% SALE!!!
[인물 관계도(A) - 환자 주변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한 관계도를 제공합니다. (50,000P -> 25,000P/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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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SORA의 추천은 터무니없는 가격이라 도저히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아이템, ‘인물 관계도’였다.
가스총이나 호신용 삼단봉도 아니고.
이걸 도대체 어디에…….
잠시 SORA의 의도를 생각하던 시현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잠깐… 이걸 역이용하면?’
만약 정유희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온 사람이라면 그 배후를 파악할 좋은 기회였다.
‘‘인물 관계도’ 사용 설명서.’
[SORA : ‘인물 관계도’는 아래의 내용을 포함합니다.]
1. 주인공 소개
2. 주요 등장인물
3. 감정선과 출생의 비밀
예시화면 (1) (2) (3)
[구매하시겠습니까? Y / N]
예시화면을 살펴보니 한 사람을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이 배치되어 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애정, 집착, 협력, 대립 따위를 나타내는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거기에 출생의 비밀까지.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보던 그 설정 그대로였다.
아이템을 설계한 사람은 드라마 마니아임이 분명해 보였다.
‘바로 구매할게.’
딩동!
[system : 25,000P를 사용하였습니다.]
[SORA : 응급실 간호사 정유희를 대상으로 ‘인물 관계도’를 사용합니다.]
출혈이 컸지만, 믿을 건 정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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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소개]
정유희 여/26
인물 정보 - 삼아대병원 응급실 간호사. 버림받는 데 대한 두려움이 크고 집착이 심한 성격의 소유자. 그러나 친구의 일이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드는 오지라퍼. 교대근무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3년째 보건교사 임용을 준비하고 있다. 남자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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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일단 특이점은 찾지 못했다.
응급실 근무로 바쁜 와중에도 3년째 보건교사 임용을 준비하고 있다니.
뭔가 나쁜 일에 동원되기에는 너무도 평범하지 않은가.
주요 등장인물에는 10병동 이수지 간호사가 있었다.
‘이수지 간호사 정보도 열어줘.’
[SORA :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정보 열람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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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이수지 여/26
삼아대병원 본관 10병동 간호사. 대학 시절 정유희의 단짝 친구였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정유희에게 많이 의지하면서도 유독 남자친구에 대해서는 숨기는 것이 많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김정현을 맹목적으로 따랐으나 지금은 완전히 분리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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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지 간호사와 친한 사이.
일단 위험인물이 아닌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25,000P는 좀 아까웠지만.
‘잠깐만.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응급실에 간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수지의 상황을 고려하면, 자세한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안 했을 터였다.
병동까지 찾아가 이수지를 만났고, 응급실에서 김정현과 싸우기도 했으니 정황상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내일 오프라서 출근 안 하는데… 한 잔 더 해요. 네?”
정유희가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사실 그녀에게 시현은 자신의 절친에게 집착하고 그 남친에게 시비를 거는 그냥 못된 놈일 뿐이었다.
응급실 내에서 평판은 괜찮은 것 같았지만, 원래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애들이 뒤에서 온갖 이상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법이니까.
- 동영상이 있는 것 같아…… 어떡해 유희야……
정유희는 언젠가 술김에 이수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끝내 말은 안 했지만, 정황상 시현과 김정현 둘 중 한 명이 분명했다.
그녀는 시현에게 한 표를 던졌고.
술 한잔하면서 잘만 구슬리면 그동안 이수지와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불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또 이런 감은 좋으니까…… 나쁜 자식! 넌 내가 꼭 감옥 보낸다!’
정유희는 슬쩍 가방에 손을 넣어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저, 술은 그만하고 싶습니다.”
시현은 소매 끝을 잡고 있던 정유희의 손을 슬며시 뿌리쳤다.
“네??”
예상 밖의 반응. 정유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신 잠깐 걸을까요?”
시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인물 관계도’를 확인하고 나서부터는 정유희를 경계하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수지 간호사…… 걱정되시죠?”
한참을 말없이 걷다 시현이 불쑥 말을 걸었다.
“네… 걱정되죠…….”
무심코 대답하던 정유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방금 뭐라고…….”
술 마시면서 해도 두 시간은 걸릴 이야기가 걷기 시작한 지 불과 2분 만에 나왔다.
“혹시 수지가 약 먹은 거 선생님과 관련된 일인가요?”
“전혀요.”
“그럼 도대체 왜…….”
“이수지 간호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시현의 질문에 정유희는 말문이 막혔다.
종종 힘들다고 하면서도 자세한 이야기는 꺼렸던 이수지였다. 남자친구 이야기만 나오면 겉도는 느낌이니 정유희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분에게 뭔가 도움이 돼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으신 것 같네요.”
인물 정보에도 나오는 오지라퍼 기질.
따지고 보면 오늘 시현을 따라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강박 아닐까요?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그게…… 그렇게 되나요?”
정유희는 약간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이수지 간호사는 좋은 친구분을 둔 것 같네요.”
시현이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저는…….”
“저희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전에 응급실에서는 김정현 선생님과 다퉜던 건 다른 일로 의견 차이가 조금 있어서였고요.”
시현은 정유희가 궁금해할 내용들을 있는 그대로 간결하게 말했다.
사실 죽이려는 쪽과 막으려는 쪽이었으니 의견 차이치곤 제법 큰 편이었지만.
“그랬었군요…….”
시현이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서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벌써 다 왔네요.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까지 도착해있었다.
“네? 그래도 나온 김에 같이 한잔하면 좋을 텐데…….”
[system : 정유희 간호사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정유희를 둘러싼 선명한 붉은 색 오라가 서서히 옅은 녹색으로 바뀌어 갔다.
부자연스러운 친근감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과장님 회진이 있어서요.”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거봐 내가 아니랬잖아 - 병원 내 스캔들 발생을 원천 차단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Just one 10 minutes - 10분 안에 상대방의 적개심을 말끔히 제거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지하철역까지 걸으며 대화한 것 치고는 짭짤한 보상이었다.
새로 들어온 포인트를 확인하는데 ‘의사장터’ 상단에 위치한 ‘인물 관계도’와 ‘카이트만의 안경’이 유독 반짝이고 있었다.
‘이 둘의 조합이라면 어떤 위협이라도…….’
미리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현은 정유희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 * *
며칠 뒤. 삼아대 병원 원장실.
원일웅은 중역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 삼아대 병원 응급의료센터 의료진 회식 중 심폐소생술로 허주현 의원 구해……
- 초반 몇 분이 생사를 가른다. 병원 밖 심폐소생술로 생명을 살려낸 삼아대병원 의사들……
- 죽어가던 현역 국회의원을 살려낸 손님들? 알고 보니 삼아대병원 응급의료센터 의료진
“지난주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더군요.”
그는 인터넷 사회면 기사를 쭉 살펴보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허주현 의원이 여당 중진들과 회동 중에 MI(심근경색)가 왔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순환기 내과에 입원 중인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입니다.”
[신경외과 교수 심철호]
또 다른 중년 남자가 회식 때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했다.
“어설픈 해외의료봉사 가는 것보다 이런 게 진짜 병원 홍보 아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홍보팀에 이야기해서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 부분은 부원장님이 맡아서 잘 처리해주세요.”
[댓글]
par*** - 식당도 병원 옆에서 하고 볼 일.
jj123*** - 역시 삼아대 클라스ㄷㄷㄷ
cprma*** - 혹시 의사가 백O혁?
ERER*** ㄴㄴ 거긴 다른 병원...
기사에 달린 댓글들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알겠습니다. 환자 일반 병실로 옮겨가면 원장단에서도 한 번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 잡겠습니다. 같이 사진도 찍고…….”
“그런데 조광필 교수는 ‘어느 쪽’ 입니까?”
“아직 확실하게 정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요? 한번 컨택 해보세요. 평판이 나쁜 인물은 아니니까.”
“네, 원장님.”
심철호는 원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전화기를 두드렸다.
[응급의학과 조광필]
‘이거 잘만 이용하면…….’
몇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매번 통화 중이었다.
‘무슨 통화를 이렇게 길게 해?’
한참을 기다린 끝에 조광필로부터 전화가 왔다.
- 부원장님, 전화 주셨습니까?
“아, 그래. 기사 잘 봤어. 좋은 일 했던데.”
“다행히 근처 건물에 AED가 있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에피네프린도 가져다 썼고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럼 그럼. 다행이고말고. 못 살렸으면 스타일 구길 뻔했지 않는가? 다른 병원도 아니고 삼아대병원인데.”
- 무슨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어? 그게…….”
조광필의 통화 스타일은 늘 ‘용건만 간단히’였다.
상대가 윗사람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는데,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무뚝뚝한 친구 같으니라고…….’
언론에도 소개되고 기자들 전화도 좀 받았을 텐데 들뜬 기색조차 없었다.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할까 하고.”
뜬금없이 식사를 같이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심철호는 유독 살갑게 이야기했다.
- 점심에 직원 식당에서 뵙죠. 12시 반 괜찮으십니까?
“아니, 거기 말고 이따가 요 앞에 일식당 청산에서 보자고. 응급의료센터 공사 때문에 상의할 일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