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08화 (108/195)

108화 chapter 26. 완전 내 스타일이야 (3)

“혹시 그 환자…… PSVT는 아닐까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신입 인턴 고채연.

타교 출신이지만 워낙 싹싹하고 일도 잘해서 기억에 남는 친구였다.

‘그걸 어떻게?’

아직 추가 검사를 낸 것도 아닌데.

시현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응급실 인턴 고채연입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말씀해보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일단 정답이었다.

궁금한 것은 그렇게 판단 내린 근거였다.

“공황장애일 수도 있지만, 두근거림 말고는 다른 뚜렷한 증상이 없어서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심전도 검사 전에 맥을 짚어 봤는데 촉지가 잘 안됐습니다. 막상 심전도 찍을 때는 괜찮았고요. 혹시 빈맥이 극도로 심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그녀의 말에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 환자도 아닌데 선생님이 심전도를 찍었다고요?”

김원기는 의외의 포인트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 네. 심소현 선생이 다른 일로 바빠서 대신 찍었습니다.”

다른 일로 바쁠 리가. 귀찮으니까 떠넘겼겠지.

김원기는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PSVT라…… 충분히 그럴 수 있겠어요.”

잠깐 고민한 끝에 시현은 외래로 전화를 걸었다.

당장 응급상황도 아닌데 어설픈 내과 1년차에게 진료를 보게 하느니 정식으로 내과 외래를 보게 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 순환기 내과 외래입니다.

“정신과 2년차 천시현입니다. 응급실 내원하신 환자분 오늘 이종관 교수님 외래 진료 잡을 수 있을까요?”

이종관 교수.

순환기내과 과장으로 부정맥 분야의 권위자.

차기 원장 후보로 거론될 만큼 명망이 두터운 이였다.

- 저, 과장님 외래 진료는 마감인데요. 다음 진료 예약 잡으려면 최소한 1달은……

외래 간호사가 난처한 듯 말했다.

“그럼 당일 접수하시라고 할게요. 중간에 예약 취소되는 분 계신지 봐주세요.”

- 네. 최대한 그렇게 해보겠지만 진료 가능한지 확답은 못 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환자는 오늘 내로 진료를 보게 될 것이다.

이종관 교수의 성격상 당일 자신을 찾아온 환자는 모두 보고 진료를 마칠 가능성이 컸다.

“응급실 퇴실 하신 뒤에 순환기 내과 이종관 교수님 진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약된 것은 아니라 대기가 있겠지만, 그래도 오늘 진료 보시면 안심이 될 겁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이분이 진리 - 시행착오 없이 분과 최고의 의사에게 환자를 의뢰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2,000P)]

‘이 환자, 고생 좀 했었지.’

회귀 전 환자가 이종관 교수를 찾아가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단 심소현이 심전도상 이상이 없다는 이유로 환자를 김원기에게 떠밀다시피 넘겼다.

당장은 특이 소견이 없었으므로 김원기 또한 공황장애나 건강염려증을 의심하여 정신과로 외래 예약을 잡았다.

몇 주간의 진료에도 차도가 없자 환자는 결국 순환기 내과를 방문했고, 그 이후로도 몇 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부정맥을 진단받았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진료 잘 보고 갈게요.”

“별말씀을요. 그리고 설령 부정맥이라고 해도 모든 부정맥이 치명적인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현은 환자에게 오후 진료 일정을 설명한 뒤 응급실을 떠났다.

* * *

당일 늦은 오후.

위이이잉.

“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 순환기 내과 외래인데요. 아까 응급실에서 올려보낸 환자 때문에 이종관 교수님께서 보자고 하시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교수님이 왜?’

이종관 교수와의 독대는 전에 없던 일이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이종관이 따로 찾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현은 약간 긴장한 채로 순환기 내과 외래를 향했다.

“방금 마지막 환자 나오셨어요. 들어가시면 됩니다.”

외래 간호사의 안내에 시현은 이종관의 진료실로 들어갔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정신과 2년차 천시현입니다.”

“그래, 거기 앉지.”

이종관은 시현이 자리에 앉은 뒤에도 한참 동안 진료실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저, 교수님. 어떤 문제라도?”

“이 환자, 자네가 당일 접수로 의뢰했다면서? 응급실 노트 보니까 PSVT(심실상성빈맥)가 의심된다고 썼던데.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뭐지?”

이종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령 내과 질환이 의심된다고 하더라도 응급실 당직을 불러야지 굳이 나한테 바로 보낸 이유도 궁금하군.”

‘혹시 검사상 정상인 환자를 보내서 언짢으신 건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저… 그게…….”

시현이 이종관 교수에게 답하려는데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이종관 교수가 사용자의 진단 과정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호기심이라.’

이종관은 타과 레지던트를 불러 진료 절차에 대해 시비를 걸 위인은 아니었다.

다만 시현이 별다른 평가 없이 PSVT를 진단하고 자신에게 보낸 과정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예전에 겪어 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시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정신과 의사로서는 불안발작을 먼저 의심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이종관은 환자에 대한 감별 진단을 어떻게 했는지를 묻고 있었다.

당장은 증상을 보이지 않는 환자가 순환기 내과에서 제대로 치료받게 하기 위해서도 그를 설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PSVT 과 Panic disorder 리뷰 논문 띄워줘.’

[SORA : ‘의학 정보실’에 접속합니다.]

시현은 정공법을 선택했다.

“말씀하신 대로 불안발작은 인구 중에 10% 이상이 경험할 만큼 흔하지만, PSVT의 유병률은 0.2% 정도로 상대적으로 드문 병인 것이 맞습니다.”

“그래, 계속해봐.”

“하지만 환자의 경우에는 불안보다는 두근거림이 선행하고 있고, 그 외에 다른 증상은 별로 없어 공황 발작의 DSM(정신과 진단 체계) 진단 기준을 충족하지 않습니다.”

“음. 일단 공황장애 진단 기준은 충족하지 않는다는 거고.”

이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과 당직 레지던트를 부르지 않고 이쪽으로 보낸 이유는?”

“부정맥에 대해 평가해야 하는데 ER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24시간 심전도와 EP study(전기 생리학 검사)를 응급실에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음. 그렇긴 하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응급실 당직이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이종관 교수의 외래를 잡아주는 것 말고는 딱히 해줄 것이 없었다.

“실은 방금 환자가 외래 진료를 보는 중에 갑자기 두근거림을 호소해서 바로 심전도를 찍었어. 그랬더니 전형적인 PSVT가 나온 거야.”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증상이 없을 때는 심전도가 정상으로 나오니 진단하는데 몇 주 걸리기도 하거든. 여기 이것 좀 보게.”

이종관은 방금 찍은 심전도를 보여주었다.

분당 250회 이상의 빠른맥.

전형적인 PSVT였다.

응급실에서 찍은 정상 심전도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판독할 수 알겠나?”

“P파(심방파)가 완전히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AVNRT(Atrioventricular nodal reentrant tachycardia, 방실결절 회귀성 빈맥)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맞아. PSVT 중에서도 AVNRT야! 심전도 보는 법 잊지 않고 있었군. 가르친 보람이 있어.”

“학생들 사이에서 교수님 심전도 강의는 워낙 유명했었으니까요. 덕분에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시현 또한 한때는 의대생이었다.

이종관은 옛 제자가 자신의 교수법을 칭찬하자 흐뭇하게 웃었다.

딩동!

[커 보이는 남의 떡 - 타과 과장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2,000P)]

“고맙네. 아무튼, 타이밍이 좋았어. 우리 1년차들도 천시현 선생만 같았으면 좋겠는데…….”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시현은 이종관에게 깍듯이 인사한 뒤 진료실을 나왔다.

조광필은 말할 것도 없고, 타과 교수들과 안면을 트게 된 것도 회귀 후 생긴 변화들 중 하나였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회원님!”

이예진이 서혁상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 주 내내 뵌 것 같아요. 요즘 아침 운동 매일 나오시는 거 맞죠?”

“아, 그런가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서혁상이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우와. 정말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오늘도 파이팅하세요!”

딩동!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6-> 8로 상승하였습니다.]

‘아… 원래 호감도가 6이었구나.’

퀘스트 성공 조건은 호감도 50 이상 상승인데.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아, 감사합니다.”

텐션 넘치는 이예진과는 다르게 서혁상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혁상아…… 힘내라!’

그나마 아침마다 운동을 꾸준히 나오면서 트레이너의 호감도가 조금 올랐다는 건 긍정적이었다.

“아 놔, 뭐라도 말을 좀 해야 하는데 왜 입이 안 떨어지냐?”

이예진이 저만치 멀어진 뒤에 서혁상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시현아, 이거 혹시 사회불안장애 아니냐? 이 정도면 치료가 필요한 거 맞지?”

사회불안장애.

불안장애의 일종으로 특정 사회적 상황에서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는 등 다양한 증상이 발상하는 질환이다.

무대에 서거나 면접장에 들어갈 때 상사와 면담할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서혁상의 경우에는 이성과 1:1로 대화할 때 특히 증상이 심해지는 타입이었다.

“괜찮아. 치료는 무슨… 낯선 사람하고 처음 얘기하는데 긴장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시현이 서혁상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불안 증상이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것을 큰 문제라고 인지하는 순간 오히려 증상은 심해질 수 있었으니까.

역설적으로 누구나 처음 보는 사람과 대면하면 긴장할 수 있다고 일반화하는 것이 더 좋은 치료였다.

“그렇지? 괜찮겠지?”

별 것 아닌 말이었지만, 서혁상은 묘하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시현아, 이예진 트레이너님 말이야…… 유독 나한테 밝게 인사하는 것 같지 않냐?”

“글쎄. 호감도가 소폭 오른 것 같기는 하다만. 내가 보기엔 그냥 자본주의 미소……”

무심코 대답하던 시현이 말끝을 흐렸다.

“응? 호감…… 방금 뭐라고 했어?”

“아냐, 아무것도. 확실히 친절하신 것 같긴 해.”

일단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게 문제인 것 같긴 하지만.

“그치? 뭔가 잘 될 것 같지 않냐? 뭔가 2%가 부족한데…….”

서혁상은 싱글벙글했으나 시현의 생각은 달랐다.

‘혁상아, 지금 92%가 부족해.’

이대로 가다가는 그냥 성실한 헬스장 회원으로 남게 될 뿐, 사적인 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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