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Chapter 26. 완전 내 스타일이야 (4)
* * *
운동을 마치고 병원으로 가는 길.
“시현아, 너희 1년차들은 좀 어떤 것 같아?”
“뭐…… 원기랑 민혜는 인턴 때부터 워낙 잘 했으니까.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냐? 지금 내분비 같이 돌고 있는 우리 1년차는 영 아닌 것 같아. 인턴 때는 진짜 열심히 하더니만 지금은 사람이 변했어. 사람이…….”
서혁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애들이 좀 있지.’
인턴 때야 점수가 걸려있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레지던트에서 탈락하니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레지던트가 되고 나면 본색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뭐, 매년 있는 일 아닌가? 우리 동기들만해도…….”
“그렇지? 미리 알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진심으로 환자 생각해서 열심히 뛰는 건지 철저하게 레지던트 합격 때까지만 그런 모습인 건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
애초에 사람의 마음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회귀를 하고 시스템의 도움까지 받아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운동한다고 잠을 줄여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컨디션이 더 좋아진 것 같아. 무기력도 덜하고 아주 상쾌해.”
서혁상이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적절한 운동은 항우울제 이상으로 항우울 효과가 있대.”
“그래? 정신과 선생님이 이야기하니까 뭔가 신뢰가 가는데?”
실제로 최근 일주일 사이 서혁상의 안색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비록 퀘스트가 실패하더라도 지금처럼만 하면 당뇨를 진단받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포인트야 다른 곳에서 벌면 되니까.’
호감도가 찔끔 오르다 마는 걸 보고 일찌감치 퀘스트에 대한 미련을 버린 시현이었다.
“어? 시현아 저기 횡단보도 앞에 이예진 트레이너님 아니냐?”
“어, 그러네?”
횡단보도 까지는 한참 거리가 있었지만 서혁상은 매의 눈으로 이예진을 발견했다.
단정한 오피스 정장에 사원증을 건 모습.
운동복을 입었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지만 서혁상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저, 트레이너님?”
“아, 회원님! 근처에서 일하시나 봐요?”
이예진은 약간 당황한 눈치였지만, 금세 웃는 얼굴로 서혁상을 보며 물었다.
“여기 앞에 병원에서 일해요.”
서혁상이 눈짓으로 길 건너편의 본관 건물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혹시 의사 선생님?”
“네, 내과 레지던트예요.”
“아, 그러셨구나…….”
이예진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혁상이가 좀 자연스러워진 것 같긴 한데…….’
별 것 아닌 대화였지만 대화를 주고받는 표정이 전보다 편해 보였다.
딩동!
또다시 익숙한 알림음.
‘혹시 호감도가?’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8 -> 0 으로 감소했습니다.]
‘뭐지???’
퀘스트 성공에 대한 기대도 잠시.
급격히 감소한 호감도에 시현은 알림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8 -> 0으로 감소했습니다.]
‘뭐지?’
새벽마다 빠지지 않고 운동을 나가며 어렵게 쌓은 호감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혁상아… 어쩌면 좋냐.’
메시지가 뜬 것은 서혁상이 내과 레지던트인 것을 알게 된 직후.
아무래도 내과 의사라는 직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들은 너무 바쁘셔서 그런지 운동 자주 못 나오시던데…….”
“부끄럽지만 그렇긴 하죠. 오죽하면 의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되 의사처럼 하지는 말라는 말이 있겠어요?”
“하하. 그런 말이 있었어요?”
이예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환자들한테는 술 담배 줄이고 운동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그걸 제일 못 지키고 사는 게 의사들이니까요. 반성할 일이죠.”
서혁상이 멋쩍어하며 말했다.
“회원님, 회원님은 체격이 좋은 편이셔서 중량 운동하시면 금방 늘 것 같아요.”
“그런가요?”
“한번 시작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제가 틈틈이 봐 드릴게요.”
이예진이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요? 이번 달은 매일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부탁드려요!”
그녀의 말에 서혁상은 신이 난 얼굴이었다.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0 -> 20으로 증가했습니다.]
‘오호.’
내과 레지던트라는 말에 급락한 호감도가 운동을 매일 나오겠다는 말에 반등하다니.
‘기준이 뭘까.’
“먼저 가볼게요. 내일 아침에 또 봐요.”
건널목에 녹색등이 켜지자 이예진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방금 웃는 거 봤어? 이거 그린 라이트 같지 않아?”
서혁상은 아까부터 입이 귀에 걸린 상태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호감도 20이면 아직 그린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단시간에 호감도를 회복한 걸 보면 아주 가망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근데 트레이너님은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걸까?”
“글쎄? 트레이너 말고 따로 하시는 일이 있나?”
조금 전만 해도 운동복 차림으로 헬스장에 있던 사람이 지금은 여느 출근길 직장인 같은 모습이었다.
“나 결심했다.”
“뭘 또?”
“예진 씨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
서혁상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정신과니까! 뭐 좀 아는 거 없어?”
“…….”
정신과 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부분이야 줄곧 공부했던 분야였기에 자신이 있었지만 이건 완전 별개였다.
“일단 운동을 열심히 나가봐. 하루도 거르지 말고 매일.”
“그걸로 되겠어?”
“아무래도 성실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시현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정보.
어느 부분에서 호감도가 오르는지를 정확히 안다면 뭔가 더 조언을 해주겠지만, 지금은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 알겠어!”
“아, 그리고 병원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하지 말고. 의사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래?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서혁상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위로 떴다.
병원 이야기.
환자 이야기.
병원에서 환자 본 이야기.
그거 말고는 딱히 할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 중량 운동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잖아? 일단 그거부터 공부해서 이야기하면 되지.”
“아, 그렇구나! 역시 정신과!”
서혁상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눈치였으나, 실상은 연애를 글로 배운 사람들끼리의 하찮은 대화에 지나지 않았다.
위이이잉.
“네, 내분비 내과 서혁상입니다.”
- 선생님, 1104호 김민옥 환자 랩 나왔습니다. 아침 인슐린 처방 확인해주세요.
병동에서 온 전화였다.
“먼저 갈게. 내일 보자.”
서혁상은 시현에게 인사를 건넨 뒤 병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회귀 전 2년차 때와는 사뭇 다른 활기찬 모습.
이예진을 알게 되면서 생긴 변화였지만 앞으로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잘 됐으면…… 좋겠다.”
멀어져가는 서혁상을 바라보며 시현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 * *
일주일 뒤.
“회원님, 척추 중립을 유지하신 상태에서 이렇게 고관절을… 힙힌지를 이용해서…….”
이예진이 서혁상의 스쿼트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다.
“자세 아주 좋은데요? 근육 쓰는 법을 정확히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이제 중량을 좀 올려도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이예진이 칭찬하자 서혁상은 입이 귀에 걸릴 듯했다.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29/100 -> 30/100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예진이 가르쳐준 것들을 곧잘 따라 하면서 소소하게나마 호감도도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새벽에 매일 나오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레지던트 선생님들 엄청 바쁘시던데…….”
이예진이 걱정하듯 물었다.
“아, 실은 아버지 쪽 식구들이 당뇨가 있으시거든요. 미리 운동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나중에 운동도 같이하면 좋고요.”
“아 그러셨구나.”
이예진의 얼굴에 아주 잠깐 슬픈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회원님은 참 좋은 의사 선생님 같아요.”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30/100 -> 49/100로 상승하였습니다.]
잠깐의 슬픈 표정. 그리고 이어지는 호감도 상승.
‘이게 된다고?’
순식간에 호감도가 49까지 올랐다.
‘어느 대목에서?’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방금 서혁상이 한 말 속에 이예진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트레이너님은 아침에 운동 마치고 어디 가세요? 지난번에 요 앞에서 뵀는데.”
“아, 저 이 근처 회사 다니거든요. 저기요.”
이예진이 병원 근처 빌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직장이 따로 있으셨구나.”
“네, 트레이너는 부업인 셈이죠. 아침에 헬스장 문 열고 출근 전에 운동하고 가는 게 제 루틴이에요.”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서혁상이 감탄하며 말했다.
“레지던트시면 저보다 훨씬 바쁘실 텐데요. 회원님이 더 대단하신 것 같아요.”
이예진이 서혁상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좋아! 잘하고 있어. 이대로만 가면 퀘스트 성공이다!’
50까지 단 1포인트를 앞둔 상황. 의예과에 입학한 이래 이성과 이 정도로 유의미한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혁상아 조금만 더 힘을 내!’
서혁상을 바라보는 시현 또한 눈을 빛냈다.
“그런데 두 분은 정말 친하신가 봐요. 새벽마다 운동도 같이 나오시고…….”
“저희요? 학생 때부터 친하긴 했는데 재작년부터 쭉 같이 지내면서 더 친해졌죠.”
“쭉…… 같이요?”
이예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침대를 같이 쓰는 사이죠.”
“아, 네…….”
순간 그녀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인턴 숙소 2층 침대를 위아래로 쓰곤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침에 운동도 같이 나오시고 보기 좋아요. 두 분 응원할게요! 내일 뵈어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딩동!
[system : 이예진의 주된 감정은 ‘아쉬움’입니다.]
‘아쉬움이라니. 갑자기 왜?’
새로 뜬 알림창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혹시?’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49/100 -> 0/100으로 감소하였습니다.]
‘잠깐만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시현은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 * *
‘혁상아, 이번 퀘스트 망한 것 같아.’
시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알림창을 닫았다.
“오늘도 상쾌하다. 덕분에 새벽 운동도 시작하고 예진씨도 알게 되고. 올해는 모든 게 잘될 것 같아.”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혁상은 신이 난 표정이었다.
며칠 전부터는 이예진에 대한 호칭도 아예 ‘예진씨’로 바뀌어 있었고.
“근데 예진씨 말야. 병원에 환자로 온 적 있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낯이 익단 말이지.”
서혁상은 ‘예진씨’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글쎄, 병원에서 본 적은 없는 얼굴인 것 같은데. 그냥 닮은 사람 아닐…….”
시현이 서혁상의 말에 대답하다 말고 갑자기 우뚝 섰다.
“왜 그래?”
“……과장님.”
“응? 누구?”
이예진 트레이너와 몹시도 닮은 사람.
시현의 뇌리에 순환기 내과 이종관 교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