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Chapter 26. 완전 내 스타일이야 (5)
“원장님, 정신과 이광섭 교수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이광섭이 비서의 안내를 받아 원장실에 들어섰을 때, 원일웅은 기조실장 정유수가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이 과장님께서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올해 예산 변경 건으로 상의하느라 지금은 좀 바쁜데…….”
원일웅이 정유수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료는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다음에 마저 보고드리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정유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괜찮아요. 앉으세요. 정 교수도 들어야 할 내용일 수도 있으니까.”
“아닙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
“마침 잘 되었습니다. 기조실장님에게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으니까요.”
“아… 네…….”
지나다가 차 한잔하러 온 것은 절대 아닐 테고.
정유수는 선배 교수들 사이에 끼어 좌불안석이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차분히 봐도 좋았을 텐데…….”
“원장님께서 워낙 ‘공사다망’한 분이시라 약속을 잡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허허. 누가 들으면 내가 우리 이 과장님 피해 다니는 줄 알겠습니다?”
“그럼 아닙니까? 면담 요청드린 지가 언젠데.”
역시나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평소 젠틀하기로 소문난 이광섭 과장이었지만, 원일웅을 대하는 태도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폐쇄병동 이전 계획 철회해 주십시오.”
“이 과장님,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끝난 이야기라뇨. 아직 공사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충분히 재고해볼 여지가 있는 것 아닙니까?”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에요. 아무리 원장이라도 독단으로 변경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과장 회의에서 원일웅은 올해 병동 이전 배치 계획을 새로 발표했다.
제한된 병원 공간 내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해 과별로 배정된 병상 수를 조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수술실, 검사실,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는 환자들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해서 진료에 효율성을 추구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실상은 각 진료과와 병동별 수입 통계를 바탕으로 적자는 줄이고 이익은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저희 병동은 지금 위치가 적절하지 않습니까? 정신과 외래와 가깝기도 하고 폐쇄병동에 적합하게 창호 공사까지 모두 마쳤는데.”
“외래동과 가깝고 구조상 외부 출입을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병동…… 그걸 꼭 정신과 병동으로만 써야 합니까?”
“그게 무슨…….”
폐쇄병동을 정신과 병동 말고 다른 용도로 쓴다니.
이광섭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생각해보세요. 발상을 조금만 전환하면…….”
“원장님, 저는 말장난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도대체 멀쩡하게 잘 운영되는 병동을 왜 옮기겠다는 겁니까?”
“멀쩡하게 잘…… 그건 뭘 기준으로 판단한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안전한 환경에서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과장님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환자만 잘 보면 병원 조직 전체에는 해가 되어도 무방하다는 말씀입니까?”
병원에 손해가 되는 공간.
원일웅이 정신과 병동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병동 적자 말씀하시려는 것 같은데, 병동만 놓고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병동이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외래 진료도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체 외래 환자 중에 입원이 필요한 환자는 몇 퍼센트 정도인가요?”
“그건…….”
이광섭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임상 의사로서 자살 사고가 높거나 타해 위험이 있는 환자에게 입원 처방을 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전체 환자 중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삼아대병원 본원을 기준으로 본다면, 연간 8% 미만입니다. 다시 말해, 환자 대부분이 입원 치료 없이 외래 진료만으로도 충분히 유지가 된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 환자들을 외래에서 치료하다가 자칫 사고라도 생기면…….”
“정 급하면 환자가 알아서 다른 병원 찾아갈 겁니다. 솔직히 그런 중증 환자들 다른 병원으로 뺏겨도 수익에는 전혀 타격이 없다는 분석도 나와 있는 상태고요.”
“…….”
“기존 폐쇄병동 자리에는 정재계 인사들이나 연예인들처럼 보안 유지가 중요한 환자들을 위한 병동을 따로 만들까 합니다. 기존 특실과는 격이 다른…….”
애초에 지향점이 다른 두 사람이었다.
짧은 대화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병동을 유지하면서도 환자를 잘 진료하면서도 병원 경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쎄요. 저도 그 부분을 고민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만,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공사 시작 전까지 과장님도 잘 생각해보시고 더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든 다시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원일웅이 생각하는 ‘좋음’의 기준이란 명확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이광섭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달성할 수도 없는 영역에 있었다.
* * *
일주일 뒤.
“오늘도 너 운동 봐주는데 옆 모습이 회진 돌 때 교수님이랑 똑같던데? 아무리 봐도 이종관 교수님 닮지 않았어?”
흡사 회진 때 침상 난간을 잡고 서서 매의 눈으로 환자를 살피는 이종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우리 병원에 가족이 있으면 이야기했겠지. 내가 내과 레지던트인 것도 아는데. 아마 아닐 거야.”
서혁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 가족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네. 개인적인 이야기는 원체 안 하시니.”
“환자 안 보고 운동 다닌다고 교수님한테 혼나는 거 아니겠지?”
“에이, 설마.”
시현과 서혁상이 이야기를 하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너무 다정한 거 아니에요? 이러니 제가 오해를 했죠!”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는 49/100 입니다.]
그 사이 다행히 성적 취향에 대한 오해는 풀 수 있었다.
호감도도 회복한 상황.
“아, 예진 씨!”
서혁상이 이예진을 반겼다.
운동 마치고 출근길에 병원 앞 건널목에서 만나는 것은 거의 루틴이 되었다.
새벽 운동에 이른 출근까지 소화하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
‘이런 면도 닮았어.’
이종관 교수 또한 병원 내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하세요?”
“예진 씨랑 닮은 분이 있어서요.”
“정말요? 혹시 연예인인가요?”
이예진이 눈을 빛냈다.
“아, 연예인은 아니고 우리 병원 이종관 교수님이라고……”
‘그냥 연예인이라고 해.’
중년 남성과 닮았다는데 좋아할 리가 없지 않나.
“아, 네…….”
역시나 이예진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순환기 내과 과장님이신데 훌륭한 분이세요.”
“그분이…… 훌륭하다고요?”
그럴 리가 없다는 반응. 확실히 두 사람 사이엔 뭔가가 있다.
“네. 환자분한테도 친절하시고 연구실적도 엄청나세요. 제일 일찍 출근하시고 제일 늦게 퇴근하시는 교수님이시죠. 제가 정말 존경하는…….”
이예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49/100 -> 30/100으로 감소하였습니다.]
‘혁상아, 멈춰!’
어렵게 쌓은 호감도가 실시간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의사로서는 훌륭한 분이신 것 같지만, 가족들 보기엔 그저 일중독으로 밖에 안 보일 것 같아요.”
이예진의 얼굴에 격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외모와 분위기를 닮은 것에 더해 이종관 교수 이야기에 저런 반응이라니 뭔가 수상하다.
“아, 혁상 씨한테는 스승님인데 제가 너무 함부로 말했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아무튼, 저한테는 좀 그래요. 그 교수님이 저희 아빠라서요.”
“예에? 교수님 따님이시라고요?”
서혁상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긴, 교수님처럼 생활하시면 가족들은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확실히 가족들에게 이종관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은 못되었다.
시니어 교수가 아침 7시면 출근해서 차트부터 보고 있으니 펠로우들 마저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퇴근이 빠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종일 진료에 시술에 논문 작업까지 하느라 연구실의 불은 밤늦도록 켜져 있기 일쑤였다.
‘일중독 수준이란 말이지.’
환자에게는 좋은 의사이고 훌륭한 연구자일지 모르겠으나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는 정반대였다.
“그거 아세요? 병원 주차타워 내서 가장 좋은 자리가 이종관 교수님 지정석인 거?”
“와, 그런 게 있었어요?”
이예진은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제일 일찍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하니 그럴 수밖에 없죠. 저는 교수 시켜준다고 해도 그렇게는 못 살아요.”
훌륭한 분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는 못 산다니.
귀신같은 태도 변화에 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사라면 본인 건강관리도 잘 해야 하는 거구요. 워라벨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예진이 싱긋 웃어 보였다.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30/100 -> 40/100으로 상승 하였습니다.]
‘혁상아, 잘하고 있어!’
서혁상은 드디어 감을 잡은 것 같았다.
시현 또한 이예진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은 생겼다.
‘인물 정보.’
[SORA : 이예진의 인물 정보를 출력합니다.]
-----
[이예진 여/26 흥부생명 주임]
칭호 : 헬스 유튜버를 꿈꾸는 비정규직 헬스 트레이너
주요 능력치 : 지력 33 덕력 35 체력 69 감각 44 행운 31
특기 : 파워리프팅(Lv.8) 마라톤(Lv.5) 보험상품개발(Lv.3)
------
시현의 눈앞에 이예진의 인물 정보가 떠올랐다.
‘마라톤… 달리기에 좋은 날씨지.’
“트레이너님, 중량 운동 말고 혹시 달리기도 좋아하세요? 나중에 혁상이랑 10Km 마라톤 대회 나가볼까 생각 중이에요.”
서혁상은 당연히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야, 우리가 언제…….”
“정말요? 저도 달리기 좋아해요! 같이 가도 되나요?”
반면 이예진은 시현의 제안을 반겼다.
“그, 그럼요! 트레이너님이랑 같이 뛰면 왠지 더 잘 될 것 같아요.”
서혁상이 이예진의 말에 반색하며 말했다.
생각보다 대답이 앞섰다. 다음 달 주말 당직 일정이야 어떻게 되지 않겠는가.
“병원에 계신 분들 피곤하다고 운동도 잘 안 하시던데 대단하세요.”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40/100 -> 49/100로 상승하였습니다.]
“전 제 삶이 중요해요. 제가 건강해야 진료도 잘할 수 있는 거니까요.”
“혁상 씨는 그런 면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다른 의사쌤들처럼 차갑지도 않고.”
[system : 이예진의 호감도가 49/100 -> 55/100로 상승하였습니다.]
‘됐다!’
[system : 퀘스트 ‘연애 심리 전문가 2급’의 성공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system : 11,000P(55 * 200P)가 지급됩니다.]
한 사람의 환자를 살리는 것만큼이나 꽤 쏠쏠한 보상이었다.
무엇보다 서혁상이 좋아하는 이성에게 점수를 땄다는 것이 뿌듯했다.
‘잘해야 한다. 예진 씨 놓치면 4년 내내 솔로니까.’
레지던트 기간 내내 서혁상은 솔로였다.
‘잠깐만, 7년인가?’
전문의 시험 이후 서혁상의 진로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으나 보나 마나 군의관으로 복무하게 되지 않겠는가.
내과 군의관은 항상 부족하니까.
군대에서 연애를 시작하기란 병사에게도 장교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 정도면 10만 포인트 받아도 될 것 같은데.’
새삼 자신이 이룬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는 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