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Chapter 27. 폐쇄병동을 폐쇄하라고? (1)
일주일 뒤 9병동.
“901호 김철우 환자는 좀 어떤가요?”
아침 회진을 마친 이광섭이 노민혜에게 환자 상태를 물었다.
“피해망상 지속되어 olanzapine 30mg까지 증량했습니다.”
“병동에서 행동 문제는 없고?”
“네. 지난주에 Olanzapine 20mg로 유지할 때는 다른 환자분들과 마찰이 많았었는데, 이번 주부터는 안정된 상태입니다.”
“그래요… 다행이긴 한데…….”
환자가 나아졌다는 보고에도 이광섭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평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던 그였으나, 요즘 들어 부쩍 언짢은 표정을 짓는 날이 많아졌다.
“일단 Olanzapine은 20mg로 감량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고, Amisulpride를 200mg 추가합시다.”
“네? 아, 알겠습니다. 과장님.”
환자가 나아졌는데도 이전 처방으로 돌아간다니.
노민혜는 이광섭의 결정에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을까요?”
회진이 끝나고, 노민혜가 담당 4년차인 권원주에게 물었다.
“딱히 실수한 건 없어. ‘의학적’으로는 Olanzapine을 30mg까지 증량한 게 잘못된 판단은 아니야.”
권원주는 유독 ‘의학적’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왜…….”
“심사평가원에서 정한 Olanzapine의 최대 허용 용량이 20mg이기 때문이지.”
“애초에 모든 환자에게 그렇게 일률적인 기준을 정한다는 게…….”
노민혜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딱히 부작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30mg을 유지하면서 환자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 말이 맞아. 체중이 50kg인 사람과 100kg인 사람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지. 간에서 약물을 대사해내는 능력도 사람마다 다르고.”
권원주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준이 그런 걸 어쩌겠어? 20mg을 넘는 부분에 대해서는 삭감이라고 해서 병원에서 약값을 전액 부담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10mg에 대해서는 청구해도 돌려받을 수 없어.”
“그렇다면 20mg까지는 건강보험으로 쓰고 나머지 10mg을 비보험으로 처방할 수 있을까요? 환자가 동의한다면요.”
“아니, 그것도 어려워. 허용 범위를 벗어나는 부분을 비보험으로 처방하면 ‘임의비급여’라고 해서 불법이 되거든.”
“임의… 비급여요?”
“한참 지난 이야기이긴 한데, 모 대학병원에서 혈액암을 치료하느라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고가의 항암제를 비급여로 썼다가 100억 원 대의 과징금을 부여받은 일이 있었거든.”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도…… 환자 살리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상식적으로는 그렇지. 보험 기준에는 맞지 않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논문들도 많이 있거든. 실제로 그 약으로 완치된 환자들도 있고…….”
전문의약품 특성상 마진을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환자들이 지불한 약값은 제약회사로 갔고, 약은 환자에게 투여되었으니 병원이 이득을 얻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보험 기준을 벗어난 치료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병원이 떠안아야 했고, 지리멸렬한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과장님 말씀대로 해야겠네요.”
법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노민혜는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그런데 좀 이상해…… 원래 과장님이 이런 것 하나하나 지적하는 스타일이 아니신데. 다들 처음 보지 않았어?”
“맞아요. 직접 약물 용량까지 말씀하신 건 처음이에요.”
“그러게…… 입원 중에는 기준 벗어나도 별말씀 안 하시고 나중에 환자 상태 호전되면 외래에서 천천히 줄이시는데.”
레지던트들 모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회귀 전부터 이광섭을 오래 봐온 터라 시현이 체감하는 변화는 더 컸다.
* * *
“선생님, 오늘 예약 환자 10명 있습니다.”
외래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시현에게 예약 환자 명단을 건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환자는 많지 않았지만, 외래를 연 지 얼마 안 된 것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숫자였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
“네? 이건…….”
머그잔에 담긴 커피와 쿠키.
원래는 교수님 진료실에만 들어가는 다과였다.
“천 선생님 타임이 생기면서 외래 대기가 많이 줄었어요.”
“아, 그렇군요.”
교수 진료실로 들어갈 환자 중 1~2명만 시현이 본다고 해도 그 뒤로 진료를 볼 모든 환자들의 대기시간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하물며 10명이면 무시 못 할 숫자였다.
“반응도 괜찮은 것 같아요. 다음부터 선생님 진료로 예약해달라는 환자들도 있을 정도니까요.”
[system : 외래 간호사 권지혜의 사용자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어려움 난이도 +1,000)]
덕분에 컴플레인이 많이 줄었다는 말과 함께, 권지혜가 싱긋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간호사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과장님 요새 무슨 일 있으신가요? 지난번 회진 때 표정이 좀 안 좋으셨던 것 같아서요.”
이광섭에게 무슨 일 있냐고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수년간 손발을 맞춰온 외래 직원들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글쎄요. 별일은… 아, 혹시 그 일 때문인가?”
외래 간호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이거 간호부 팀장님한테 들은 건데……. 최근에 과장 회의 있었잖아요? 거기서 정신과 매출 가지고 말이 좀 나왔나 봐요.”
“우리 과 매출이요?”
“네. 차지하는 면적 대비 너무 매출이 안 나온다고 했다나? 그런데도 올해 진료실 하나 더 추가될 예정이라고 하니 말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좋은 소식 아닌가요? 물론 다른 과장님들이 부러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죠. 그건 그런데…… 문제는 불똥이 병동으로 튀었다는 거예요.”
외래 진료실 하나 더 생기는 것과 병동이 무슨 상관인가 싶던 찰나.
“외래는 그나마 매출이 적다뿐이지 적자는 아닌데, 병동은 매년 적자 규모가 커지고 있어서 이참에 과감하게 폐쇄병동 병상을 줄이거나 없애자는 말이 나왔다고 해요.”
“병상을…… 없앤다고요?”
시현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뭐, 아직까지는 그런 말만 돌고 있는 거지 확정은 아니니까요. 첫 환자 바로 부를까요?”
“아, 네. 진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김민숙 님, 3번 진료실입니다.”
‘강병우 교수가 막아주기로 한 것 아닌가?’
실제로 회귀 전에도 그런 이야기가 잠깐 돌기는 했지만, 이광섭이 임상 연구를 수락하면서 강병우가 힘을 써줬다.
덕분에 시현이 4년차가 될 때까지 폐쇄 병동은 축소나 이전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전에 없던 일에 어안이 벙벙한 사이, 첫 번째 환자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아, 김민숙 님. 잘 지내셨어요?”
“네! 요즘은 컨디션 정말 좋아요. 진작 치료를 받을 걸 그랬어요.”
“다행입니다.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계신가요?”
“그럼요! 스토리도 잘 나오고 해서 기분이 좋아요!”
여전히 뒤숭숭한 마음이었지만, 시현은 이내 면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너무 집에만 계신 건 아니죠? 날씨도 많이 풀렸는데.”
“요즘은 친구들도 만나고 같이 그림 그리는 작가님들하고 종종 모여서 작업도 해요!”
‘표정이 좋아 보이네.’
몇 달씩 외출 없이 집에서 머물렀던 때와는 다르게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병동에 입원했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스토리가 잘 나오고 작업이 잘 된다는 것도 집중력을 회복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만 잘 유지가 되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부모님이 다른 치료를 더 해보자고 하지는 않으시던가요?”
우려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귀가 얇은 김민숙의 보호자, 김대남이 어디서 이상한 말을 듣고 와서 치료를 중단하자고 하지나 않을지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부분 때문에 회귀 전에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기도 했었고.
“전혀요! 우리 아빠는 완전 선생님 팬인걸요?”
“네? 그게 무슨…….”
“어디서 들었는데, 선생님이 귀인이라면서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했대요. 치료도 무조건 삼아대병원에서만 받자고 하셨어요.”
“아, 네…….”
미신적 믿음이긴 했지만, 치료에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저는 그런 거 안 믿는 편이긴 한데, 지난번에 아빠 식당에서 심폐소생술로 환자 한 명이 살아난 적이 있거든요? 그때도 이 병원 의사 선생님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 저도 들었습니다.”
들은 것뿐 아니라 실제로 그 자리에 있기까지 했지만, 아무튼.
“그 일 있고 나서 장사도 더 잘되고…… 그때 쓰러졌던 손님하고 응급실 과장님도 다시 오셨어요. 아, 삼아대병원 원장님도 같이 오셨었고요! 기념사진도 찍으시던데요?”
‘조광필 교수님하고 원일웅 원장이?’
전혀 접점이 없을 것만 같던 두 사람의 회동이 시현의 관심을 끌었다.
* * *
며칠 뒤 정신과 병동.
시현은 병원 공지에 링크된 인터넷 기사를 보고 있었다.
녹색창 사회 뉴스에 뜬 조광필 교수의 인터뷰였다.
국내 응급의료체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삼아대병원 응급의료센터가 한 해 얼마만큼의 적자를 감수하면서 환자를 살리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원일웅 원장과 조광필 교수…….’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물밑에서 뭔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현아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어?”
막 면담을 마치고 나온 황진호가 물었다.
“아…… 이거 기사 좀 보느라고.”
“아. 응급의료센터 이야기? 그 회식 때 너도 있었잖아? 엄청 놀랐겠다.”
황진호는 시현이 에피네프린을 구해오느라 뛰어다닌 것은 모르고 있었다.
‘좀 놀라긴 했지.’
급박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실패하면 시스템과 회귀 전의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퀘스트 내용이 한몫했다.
“아, 그때 촬영한 영상 요즘 돌고 있던데 한 번 볼래?”
그는 이내 너튜브를 열어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이건… 홍보팀 작품이네…….’
식당 내 CCTV와 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조합한 것으로 화질은 조악했지만, 세련된 편집과 자막이 더해져 조회 수가 폭발하고 있었다.
심폐소생술로 목숨을 건지는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을 테지만, 유명 정치인이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사연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충분했다.
- 저 교수님이 구한 건 한국 정치다.
- 삼아대병원 근무하는 친구가 그러는데 저 교수님은 퇴근도 안 하고 병원에서 사신다고 하더라. 이런 분이 보건복지부 장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조광필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삼아대병원에 후원하고 싶어요.
거기에 허주현 의원은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팬덤을 보유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급기야 일부 열성 지지자들이 조광필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아, 그리고 그거 들었어? 철원이가 그러는데… 응급실에 대대적인 지원이 있으려나 봐.”
응급실에 지원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에 이질감이 들 지경이었다.
“무슨 지원을……?”
“이번에 응급실에 포터블 소노하고 ECMO 기계 새로 들어온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