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Chapter 27. 폐쇄병동을 폐쇄하라고? (3)
* * *
같은 날 점심시간.
똑똑.
“교수님, 천시현입니다.”
“그래, 어서 오게.”
방에 들어서자 조광필이 보던 서류 뭉치를 내려놓고 시현을 맞았다.
“아직 식사 전이지?”
“아, 네.”
대답하기가 무섭게 교수 연구실 문이 열리고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내가 들어왔다.
“아이고 교수님, 오늘은 웬일로 두 그릇입니까?”
“아, 손님이 있어서요.”
“탕수육까지 시키시고. 귀빈이신가 봅니다. 하하하.”
사내가 시현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런 셈이죠.”
조광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테이블에 탕수육과 군만두 그리고 짜장면 곱빼기 두 그릇이 올랐다.
“짜장면 괜찮지?”
“좋아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미리 주문했어. 바쁠 거 같아서.”
진료에 연구에 행정업무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평생을 1년차처럼 살아온 사람이 그였다.
음식 주문해놓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과 가장 안 어울리는 인물이랄까.
시니어 교수였지만 그에게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벌써 2년차 된 지도 몇 주 지났는데. 요즘 일은 할 만하고?”
조광필이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네, 교수님. 덕분에 어려움 없이 잘하고 있습니다.”
“에이, 내가 뭘 해준 게 있다고.”
시현의 대답에 조광필은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내가 천 선생 덕을 좀 봤지.”
“제…… 덕이요?”
“그래. 지난번에 식당에서 구한 허주현 의원이 최근에 격려차 방문했었거든. 응급의료센터 운영하면서 힘든 점들도 듣고 갔고.”
“응급실 축소 공사가 취소된 건 그분 영향인가요?”
“직접 압박을 한 건 아니지만, 분위기상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할 수는 없었던 거겠지. 언젠가는 다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이번 일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시점에서, 병원 수익을 위해 응급실을 줄이는 공사를 시작했다가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공사가 미뤄진 정도가 아니라 되려 지원이 늘어난 것 같던데요? 에크모도 들어온다고 하고…….”
“아, 천 선생도 들었나? 역시 병원 소문이 빠르긴 하군.”
“그렇게 병원 경영지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 왜 갑자기 그런 투자를 하는 걸까요?”
최근 원일웅의 행보는 회귀 전과 완전히 달랐다.
사람이 갑자기 바뀔 리는 없고, 허주현 의원이 특별히 손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경영지표라…… 그 사람한테 꼭 그것만이 중요할까?”
“저희 병동 자리에 VIP 병동이 새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것도 그런 맥락 아니겠습니까?”
“글쎄…… 그건 아직 확실치가 않아. VIP 병동 만드는 건은 원일웅 교수 단독으로 진행한 일이 아니거든. 이사회도 그렇고 삼아그룹 중진들까지도 관심 있게 보고 있었으니까.”
“삼아그룹에서요?”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삼아그룹이 고작 대학병원 하나에서 나오는 이익에 과연 관심이나 있을까.
“잘 생각해봐. VIP 병동에 누가 입원하게 되는지를.”
“그거야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한 달 입원비가 수천만 원일 테니까요.”
“그분들이 병원에 입원해서 병실료만 내고 간다고 생각하나?”
조광필이 씁쓸하게 웃었다.
“높으신 분들 검찰 출두할 때만 되면 다 휠체어 타고 나타나잖아. 건강 핑계로 불출석하기도 하고 병이 심하면 옥살이를 병원에서 하기도 하지.”
어디 휠체어뿐이겠는가.
최근에는 휠체어 정도로는 약하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침상에 누워 링거까지 꼽고 출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해?”
“병원에서 발급한…… 진단서겠군요.”
“맞아. 어쩌면 그분들 뒤치다꺼리할 공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지. 단순히 병원 경영 문제만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환자에 대한 소견을 쓸 수 있는 것도 나름 권력이라면 권력이었다.
“지금 폐쇄병동 자리에 VIP 병동 들어오고…… 아마 정신과는 1년 뒤쯤 본관 구석으로 옮겨서 최소 병상 정도만 남긴다는 계획일 거야. 아니면 이참에 완전히 없앨 수도 있고.”
예상외로 조광필은 구체적인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찾아온 건 ‘전에 없던 일’이기 때문이겠지?”
“네. 원장단에서 기존 계획을 철회한 데다 새로 지원까지 해주기로 했다고 하니 뭔가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번 일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 특별한 요령은 없어. 뜻하지 않게 우리 센터만 수혜를 입고 불똥은 그쪽으로 튀었으니 괜히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교수님이 왜…….”
“다만,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의도’ 아닐까?”
“의도라면…….”
“원일웅 원장에게 중요한 건 뭔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가장 먼저라는 말이야.”
가장 중요한 가치.
환자 치료를 첫째로 놓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의업은 수단일 뿐 다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환자의 생명을 운운해봐야 설득력이 없는 게 당연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시현은 조광필에게 꾸벅 인사한 뒤 교수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가 아는 내에서 원일웅 원장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웬일이에요? 선생님이 먼저 보자고 하시고?”
리서치 센터 연구원, 강서현이 환한 표정으로 시현을 맞았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당연히 알려 드려야죠.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요.”
“요즘 정신과 폐쇄 병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혹시 알고 계신 게 있나요?”
“아… 그거요…….”
강서현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난번에 리서치 미팅에서 강병우 센터장이 한 말 때문이었다.
정신과와 협업하게 되면 최대한 과에 피해가 없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 병동이 사라지게 된 상황이었다.
“리서치 센터장님께서 도와주실 수는 없을까요?”
“사실 아빠도 원장님에게 건의를 여러 번 한 걸로 알아요. 정신과는 저희에게도 중요한 파트너인데…… 병동이 축소되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시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명색이 삼아그룹 회장 아들이 아닌가.
아무리 원장이라고는 해도 그의 말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고모부…… 아니, 원장님이 너무 강경하셔서 설득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회장 아들도 안 되는 걸…… 내가 해야 하네?’
병동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직감하는 순간,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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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본진을 지켜라!]
난이도 A+
삼아대병원 정신과 병동이 존폐 위기에 처했습니다.
최선의 노력으로 환자들의 치료 여건을 보장하고 적절한 수련 환경을 지켜내십시오.
성공 조건 : 삼아대병원 폐쇄병동의 존속
성공 보상 : 30,000P
실패시 : 파견 근무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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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포인트면…….’
퀘스트가 아니라도 꼭 해야 할 일이기는 했지만, 사람 목숨 여럿 구한 것과 같은 수준의 파격적인 보상이었다.
“센터장님께서 따로 말씀하셨는데도 강행할 정도면, 원장님의 의지가 대단한 것 같네요.”
“그렇죠. 돈 되는 일이라면 정말…… 원래는 응급의료센터까지 축소하고 거기에 영리시설을 유치할 계획도 있었으니까요.”
시현 또한 익히 알고 있는 계획이었다.
회귀 전 3년차 무렵.
응급의료센터를 줄여 새로 확보한 공간에는 외국인 환자 유치를 위한 진료협력센터와 VIP 라운지가 들어왔다.
가뜩이나 병상이 부족한데 거기서 공간이 더 줄어드니 중증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종종 생겼지만, 돈 되는 환자들을 대거 유치한 덕분에 병원 경영 지표는 크게 나아졌다.
‘그런데 응급실에 대한 지원은 확대한다, 라.’
원장의 경영 철학이 갑자기 바뀔 리도 없고.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궁금증이 일 무렵.
“그런데 이번에 그 계획이 취소된 건 할아버지 입김이 좀 작용한 것 같아요.”
강서현의 말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할아버지라면 삼아그룹 강태정 회장.
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인물로도 유명했다.
그런 그가 직접 나서 응급의료센터를 유지하도록 했다면, 더 나아가 응급실 지원을 늘리도록 지시했다면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회장님께서요?”
“네. 최근에 가족 중에 크게 다친 분이 계셨는데, 그 일을 겪고 나서 생각이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사람 목숨 구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기계를 지원하라고 특별히 당부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사정이…….’
본인이 아프거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병원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응급실과 마찬가지로 강태정이 폐쇄병동이 병원에 꼭 필요한 시설이라고 인식만 한다면 병동 유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저…… 가족 중에 우울증을 앓고 계신 분은 안 계시겠죠?”
“네? 아… 다행히 제가 아는 한은 없는 것 같아요.”
혹시나 하는 기대로 물었지만, 대답은 역시나였다.
회장님 지인이 입원하면 정말 성심성의껏 치료할 마음이 있었는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사실…… 원장님 입장에서는 아빠 아니, 리서치 센터장님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어요.”
“그게 무슨……?”
강태정의 아들이자 자신의 처남이 부탁하는데 들어줄 이유가 없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어떤 면에서 두 분은 삼아의료재단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니까요.”
아직 정정하다고는 하나 강태정 또한 팔순의 노인이었고, 머지않아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삼아건설과 삼아중공업과 같은 굵직한 계열사들은 일찌감치 장남에게 승계하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반면, 삼아의료재단의 경우 누가 이사장직을 이어받을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오너 일가라고 해도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되려 원일웅의 입장에서는 강병우가 잘 나가는 것을 견제할 수도 있었다.
“두 분 모두 회장님께 인정받는 방법을 찾고 계시겠군요.”
“그런 셈이죠. 원장님은 병원 경영자로서 그리고 센터장님은 연구자로서…….”
병원 순이익을 증가시킨다.
신약 개발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인다.
그것을 통해 회장인 강태정에게 인정받는다.
방법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바는 같았다.
“그래도 아직 확정은 아니라고 해요. 아빠 아니, 리서치 센터장님도 최대한 정신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경 쓰고 계시고…….”
강서현이 최대한 안심시키듯 말했으나, 시현이 우려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과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매출도 임상 연구도 아무래도 좋았다.
열심히 해서 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성과를 못 내도 당장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폐쇄 병동이 없어지면?
급성기 환자들을 보호할 수단을 잃게 된다.
자살 위험성이 높은 환자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야 한다.
“저희 권한 밖 일이라 안타깝지만… 그래도 도움 될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최대한 지원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말씀만으로도…….”
시현은 착잡한 심정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강병우에게 약간의 기대를 걸었건만.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