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Chapter 27. 폐쇄병동을 폐쇄하라고? (6)
* * *
일주일 뒤.
“902호 김영화 님, 입원 9일째이고 BDI와 HAM-D score 상 mild depression 소견 보입니다. 자살사고 호전 추세입니다.”
“그래요. 자살사고가 심한 임신부라…… 쉽지 않은 케이스인데 천 선생이 열심히 본 것 같군요. 면담은 어렵지 않던가요?”
“네. 지지적인 접근을 위주로 했고 환자분도 협조적이었습니다.”
“면담만으로 이런 성과라니…… 정말 다행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산책 시행하고 병동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렇군요…….”
흐뭇한 미소를 띤 이광섭과 눈이 마주치자 시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뜨끔.
‘과장님 죄송합니다.’
사실 김영화 환자가 크게 호전된 데는 사실 매일 2차례씩 시행하던 TMS 영향이 가장 컸다.
처방을 넣지 않고 치료를 했다가 괜한 잡음이 생길 수 있으니 산책을 빙자하여 환자를 리서치 센터로 데리고 갔고.
시현이 외래를 보거나 비번인 날에는 김원기와 노민혜에게 따로 부탁하여 치료가 끊기지 않도록 했다.
‘얘들아 고생 많았다.’
- 헉. 이거 출력 강도 어떻게 잡는 거예요?
- 크아아악. 얼굴에 경련이…….
- 원, 원기야! 괜찮아?
자기장 치료기는 무려 3테슬라의 자기장을 내뿜는 코일을 두피에 밀착시키는 것이 핵심인데, 위치나 각도를 조금만 잘못 잡아도 초당 10-20회 빈도로 얼굴 근육이 수축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환자에게 능숙하게 적용하기가 쉬운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잘 따라와 준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치료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요. 환자분이 홀몸도 아닌데…… 빨리 호전되어 다행입니다. 자살 위험도는 오히려 회복기 때 더 높으니 앞으로 몇 주간 특별히 유의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김영화 환자 케이스 발표가 끝나고.
이광섭이 증례 자료를 쭉 훑어본 뒤 마무리 코멘트를 남겼다.
“이런 환자분을 위해서라도 보호 병동이 꼭 필요한데…….”
그의 얼굴에 못내 서운한 표정이 스쳤다.
“오늘은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우리 9병동은 올해 9월까지만 유지하고 다른 적당한 장소가 정해지기 전까지 폐쇄병동은 잠정적으로 운영을 중단한다고 통보받았습니다.”
“…….”
교수들도 레지던트들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라 큰 동요는 없었으나, 공식적으로 듣는 건 느낌이 또 달랐다.
“적자가 문제라면 최대한 노력해보고 개선된 지표를 가지고 설득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장기 입원을 줄이고 병상 회전율을 높인다면 어떻게든…….”
정세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안했다.
“반복적으로 삭감되는 부분을 점검하고 정신 요법과 심리검사도 빠뜨리지 않고 제대로 청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치프인 권원주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요. 상반기 지표가 좋아지면 그걸로 다시 설득해볼 계획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한번 해봅시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열심히 해보자고 말은 했지만, 상황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다.
원장단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결정 난 사안이기도 했고 직접 찾아가 설득도 해봤으나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장으로서 우리 선생님들이 각자 진료와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이광섭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는 이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공사 시작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니까, 너무 실망들 하지 말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봅시다.”
정세일이 레지던트들을 독려했다.
이광섭과 진철영이 과의 어른 역할을 했다면, 주니어 스텝인 그는 맏형 역할이었다.
“좋은 의견 있으면 뭐든 말해봐요.”
“사회불안장애 집단치료 그룹을 좀 더 활성화하면 어떨까요?”
“공황장애나 도박중독 클리닉을 좀 더 홍보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의외로 홍보팀 SNS보고 오셨다고 하는 분들 계시더라고요.”
4년차 권원주와 하도영이 아이디어를 냈다.
‘좋은 의견이긴 하지만…….’
애초에 환자를 조금 더 본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주니어들은 의견 없나요? 천시현 선생은?”
정세일이 시현을 콕 찍어 의견을 물어왔다.
뭔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없는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저도 특성화된 클리닉을 만들어서 환자 수도 늘리고 적극적인 치료를 하는 방법이 좋아 보입니다.”
“그래. 천 선생은 어떤 쪽으로 클리닉을 만들어보고 싶어?”
일단 4년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난한 의견이었다.
뛰어나다고 해봐야 아직 2년차인데, 기대가 과하지 않았나 생각하려던 찰나.
“지금 시점에서는 TRD에 특화된 클리닉을 만들고 집중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진 시현의 대답에 정세일의 눈이 커졌다.
“TRD…… 라고?”
치료 저항성 우울증(Treatment Resistant Depression)의 약자로 통상적으로 2차례 이상의 항우울제 시도에도 호전되지 않는 우울증을 의미했다.
시현의 의견은 다시 말해 잘 낫지 않는 환자들에 특화된 진료를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왜 하필이면…….”
정세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2번째 시도에서 치료 반응이 부족한 환자는 3, 4번째 시도에도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
잘 낫지 않는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의사로서도 괴로운 일이었다.
“치료가 어려운 환자를 본다고 해서 진료비를 더 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TRD를 선택한 이유는?”
“치료는 더 어렵더라도, 그럴수록 더 집중적인 상담이 필요하고 병원에 자주 방문해서 약물 조절도 해야 하니 단기적으로 매출이 늘어날 겁니다.”
“음. 자주 봐야 하니 진료비가 늘어난다…… 그런데 조금 더 자주 보는 정도로 매출 차이가 크게 날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조금 더 자주 보는 정도가 아닐 겁니다. ‘매일’ 병원에 오는 환자들이 생길 테니까요.”
“환자를 매일 병원에 오게 한다면…… 혹시?”
“네. ‘경두개자기장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 생각입니다.”
시현의 말에 레지던트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직 TMS를 해본 적이 없을 텐데…….’
권원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경두개자기장치료기가 국내에 들어온 지도 몇 년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4년차들 조차도 경험이 많지 않은 치료였다.
“시현아, 그게 위치 잡기가 은근히 까다로워. 경험이 많지 않으면 쉽지 않을 텐데…… 괜찮을까?”
“배외측전전두엽을 치료 부위로 했을 때 적용하는 ‘5cm 법’이라면 어렵지 않았습니다.”
권원주의 우려를 미리 짐작하기라도 한 듯 재빠른 대답이었다.
“당직 때 외래에서 1년차 선생님들 데리고 몇 번 해봤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더라고요.”
“그걸…… 벌써 해봤다고?”
권원주가 놀란 표정으로 1년차들에게 물었다.
“네. 노민혜 선생님하고 서로 돌아가면서 해봤는데 엄청 고통을……”
째릿.
노민혜와 눈이 마주친 김원기가 돌연 말을 멈췄다.
“……고통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편안했습니다. 치료 부위 찾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요.”
그리고는 막상 해보니 별 것 아니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상은 수차례 안면 근육통을 겪은 끝에 깨우친 것이었지만.
굳이 동기를 부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맙소사.’
학기 초 1년차들은 사고만 안 쳐도 다행이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작년부터 갑자기 높아진 1년차들의 수준에 재적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교수님, 외래에 TMS 필요한 환자분 계시면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마침 필요한 환자분들이 좀 있는데 잘됐네.”
정세일이 시현의 말을 반겼다.
바쁜 외래 진료 중에 TMS를 하려면 진료를 멈추고 치료 부위 찾아야 해서 좀처럼 시도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 과정을 별도의 진료실에서 1, 2년차들이 대신해준다면 꺼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리서치 센터에서 연구용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기장치료기를 빌려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연구용 진료실도 TMS 치료실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 그것까지 알아봤어?”
“네. 기존에 외래에 있던 치료기기까지 해서 3대를 운용하면 대기시간 없이 치료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녀석 뭐지…….’
열심히 한다고 월급을 더 받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하면 매출을 올릴 수 있을지 독하게 연구한 모습이었다.
* * *
일주일 뒤, 정신과 병동 회의실.
“좌측 DLPFC(배외측전전두엽)에 10Hz 이상의 고빈도자극을 주면 피질 활성화를 통해 항우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수요일 오전 저널 발표 시간.
최근 발간된 논문들 중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을 간추려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경두개자기장치료의 임상적 적용.
발표자는 시현이었다.
“치료 프로토콜은 10Hz로 4초 자극 후 휴식기 26초로 총 50 cycle을 하도록 하고, 효과가 부족할 경우 우측 DLPFC를 1Hz로 자극하는 방법을 추가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그래. 그 정도면 적당할 것 같군.”
시현이 발표를 마치자 이광섭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릇 레지던트라면 일을 덜 하려고 몸을 사리기 마련인데, 시현은 굳이 시키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과에 가장 필요한 일을 알아서 찾고 있었다.
“다른 일도 바쁠 텐데…… TMS까지 하려면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고생이 많겠군요.”
“일단 외래 틈틈이 시간 남는 레지던트들이 치료를 하면, 환자 킵은 인턴 인력도 활용할 생각입니다.”
치료가 잘 되는지 모니터링하는 것은 인턴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치료를 시작하면 별다른 개입을 할 것이 없었으니까.
“그래요. 그렇게 운영하면 큰 무리 없이 운영할 수 있겠군요.”
과장으로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적극적으로 나서준 레지던트들에 대한 고마움이 뒤섞여 이광섭은 꽤나 감동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병동 식구들하고 맛있는 거 들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권원주는 황금색 법인카드를 받아들고는 씩 웃어 보였다.
* * *
같은 날 점심.
“와아. 오늘 무슨 날이에요?”
병동 회의실 테이블을 가득 메운 피자 상자를 보고 병동 간호사 이선지가 손뼉을 쳤다.
“무슨 날은 아니고 과장님이 기분이 좋으신지 한턱 쓰셨어요.”
“요즘 과장님 표정 계속 안 좋으시더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이선지가 피자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좋은 일…… 은 아닌 것 같고. 앞으로 그냥 일이 많아질 것 같네요. 긴장하는 게 좋을걸요?”
권원주가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쿨럭. 쿨럭.
“일이 많아진다고요? 그럼 이거 먹고 소처럼 일하라고 미리 사주시는 거예요?”
“뭐, 꼭 그런 뜻은 아닌데. 아무튼, 당분간 병동에 입원 환자 엄청나게 올라올 테니까 잘 부탁해요.”
울상짓는 이선지를 향해 권원주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병동 없어져서 강제로 응급실이나 중환자실로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걸요?”
“그, 그럼요! 우리 병동을 위한 일이라면 저도 열심히 할 거예요!”
정신과 병동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인지 응급실과 중환자실 근무가 무서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권원주의 말에 이선지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