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17화 (117/195)

117화 Chapter 28. 위기를 기회로 (1)

“그런데 외래에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입원 환자가 늘어난다니 그건 무슨…….”

식사가 끝나갈 때쯤 이선지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외래에 ‘난치성 우울증 클리닉’이 새로 생겼거든요. 거기서 입원하는 환자들이 좀 있을 것 같아요.”

“난치성이면…… 좀 까다로운 환자들이려나요?”

“아뇨. 꼭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잘 낫지 않는 우울증의 경우 진단도 다시 생각해야 하고 놓친 기저 질환은 없는지도 살펴야 해서 단기적으로 ‘평가를 위한 입원’이 좀 늘 것 같아요.”

권원주가 이선지를 비롯한 다른 간호사들에게 당분간의 계획을 설명했다.

‘일단 이렇게 되면 지표는 크게 개선될 테지.’

시현은 속으로 달라질 병동의 모습을 떠올렸다.

최소한 적자는 면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이 정도로 원일웅을 설득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시현아, 근데 명색이 ‘난치성 우울증 클리닉’이면 TMS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더 추가할 거 없어?”

권원주 또한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좀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뭔가 확실한 게 하나 더 필요할 듯한데.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 * *

2주일 뒤.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세요?”

“좋아요. 정말로요!”

‘원래 굉장히 밝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진짜였어.’

주기적인 면담과 산책…… 을 가장한 TMS 치료를 받으며 김영화 환자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제는 조금 안심이 되네요. 원래대로라면 치료비가 수백만 원은 더 나왔을 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남편이 환자의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회귀 전 시현의 진료실을 찾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우울증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아닙니다. 자기장 치료기 회사에서 만든 시제품이 때마침 들어와서 운이 좋았습니다.”

“시제품인데도 이렇게 효과가 좋다면…… 정식 제품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좋은 거 아닙니까?”

“아, 치료 효과는 동일합니다. 재질이나 소음 같은 미세한 부분이 다르고요. 다만, 김영화 님이 ‘지원’해주신 덕분에 앞으로 환자들은 더 개선된 조용한 기계로 잘 치료받을 수 있을 겁니다.”

시현은 최대한 부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아…… 그래도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은데. 저도 아내도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라서 말입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럴 게 아니지. 자기가 활동했던 그 카페에 홍보 글을 좀 올려드리면 어떨까?”

남편이 마침 좋은 생각이 낫다는 듯 말했다.

“홍보… 글이요?”

“네. 제가 나름 큰 카페 관리자거든요. 뷰티나 맛집 리뷰가 메인이긴 한데 병원 정보도 심심치 않게 올라와요.”

“거기에 글을 올리면 환자들이 많이 올까요?”

“그럼요! 후기 글에 달리는 대댓글만 수백 개는 될걸요? 꽤 활성화된 곳이라 광고 효과가 있을 거예요. 환자가 많아지면 선생님께도 뭔가 도움이 되겠죠?”

환자는 선의 가득한 표정으로 시현에게 말했다.

진료를 많이 한 레지던트에게 인센티브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걸 도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

월급은 그대로인데 업무를 더 주는 걸 도움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해주시면…… 정,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열심히 써볼게요. 선생님, 환자 많이 보시고 부자 되세요!”

“하하… 그래야죠…….”

‘선생님들… 죄송합니다. 미안하다 얘들아.’

회귀 전이라면 농담이라도 제발 홍보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병동이 존폐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 아닌가.

입원해서 TMS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늘면 병동 매출도 확 뛸 것이 분명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마음의 부자 –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에 대한 경험입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부~자 되세요! (매우 어려움 난이도)]

‘포인트가… 없어?’

이건 뭔가… 뭔가 잘못됐다.

[SORA : 진료 기회가 증가하면 포인트 획득 기회도 차차 늘어날 겁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정말 몇 주 사이에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그때는 왜 그렇게 힘들고 죽고 싶었는지…….”

“이게 수술이라도 해서 나을 수 있는 병이면 좋을 텐데 지켜보면서도 너무 답답하고…… 걱정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선생님 덕분입니다. 저희한테는 선생님이 은인이세요!”

그래도 밝은 표정으로 서로를 보며 웃는 부부를 보니 뒤늦게 마음이 훈훈해졌다.

딩동!

[system : 김영화 환자의 HAM-D score가 7점 미만으로 감소하였습니다!]

[system : 융합 퀘스트 ‘버티고 버텨 본진을 지켜라!’의 첫 번째 성공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아직 병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인지 보상은 없었다.

카페에 홍보한다고 얼마나 환자들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융합 퀘스트라고 했으니까.’

그래도 김영화 환자 치료가 병동을 살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 * *

1달 뒤, 삼아대병원 1층 접수처.

30대 초반의 여자환자가 보호자들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여기 진료의뢰서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정신과 진료 보러 오셨네요?”

“맞아요. 그런데 여기가 임신부 우울증 치료를 그렇게 잘한다면서요?”

보호자들이 접수 직원에게 서류를 건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원이 힐끔 환자를 바라보았다.

임부복 차림의 환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었고 보호자들은 노심초사하는 표정이었다.

“네? 아, 네…… 혹시 자기장 치료 상담하려고 오셨나요?”

원무과 직원이 이내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여기서 좋아졌다고 하는 환자들이 많아서요.”

“혹시…… 천시현 선생님?”

“네! 맞아요! 천시현 의사님 진료를 받고 싶은데요. 혹시 가능할까요?”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보호자들과 함께 병원을 방문한 임신부 환자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시현의 외래 진료 접수를 원했다.

“아, 오늘 초진 예약은 마감이 되어서요…… 죄송합니다. 다른 ‘교수님’ 진료로 잡아드릴게요.”

“아내가 많이 아픈데…… 어떻게 좀 안될까요? 꼭 그분한테 진료받고 싶어서요.”

‘별일이네. TV에라도 나온 건가?’

역시나 비슷한 반응.

굳이 교수님 진료를 마다하고 레지던트 일반 외래를 고집하는 보호자들에 어리둥절한 원무과 직원이었다.

* * *

같은 날 오후 9병동.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어서 앉지.”

오후 회진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시현은 회의실로 들어왔다.

“외래가 늦게 끝났군.”

“네. 마지막에 신환이 한 분 더 오셨습니다.”

“허허. 이거 레지던트 외래가 나보다 더 늦게 끝나니…… 고생이 많네.”

이광섭이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요즘 다들 바쁘지? 수고가 많아. 이따 시간 괜찮은 사람들 요 앞에서 간단히 저녁 먹고 가지.”

이광섭이 권원주에게 황금색 카드를 건넸다.

요즘 들어 부쩍 의국원들을 챙기기 시작한 그였다.

“확실히 요즘 환자가 좀 늘긴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아시고…….”

“모를 수가 없지. 외래 진료 내내 ‘소리’가 들리잖아.”

이광섭이 말하는 ‘소리’는 TMS 치료 때 발생하는 소음이었다.

흡사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

기존에 외래에서 운용하던 TMS에 추가로 리서치 센터에서 빌려온 고정형과 이동형 기기까지 총 3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 달에 한두 번 들릴까 말까 한 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대고 있으니 이광섭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딱딱 소리가 좀 크긴 하더라고요. 문밖에서도 들릴 정도라…….”

“외래에 환자용 귀마개 좀 더 주문해달라고 해야겠어. 치료받을 때 귀가 아프다고 하시는 분들이 꽤 있더라고.”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환자 반응도 괜찮은 것 같아. 비급여에 매일 병원에 와야 하는 데도 꾸준히 오시는 분들이 꽤 많던데?”

“네.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 알았다면 진작 좀 많이 써볼 걸 후회가 됩니다.”

권원주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병원에 기계가 들어온 지는 좀 됐으나 환자들에게 쉽게 권할 수 있는 치료는 아니었다.

비용의 문제도 있었지만, 다들 기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 치료 때마다 세팅을 다시 해야 해서 번거로운 치료였기 때문이었다.

1, 2년차들이 앞장서서 TMS 치료를 도맡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어떻게 이걸 가르칠 생각을……?’

우울증 환자는 주로 2, 3년 차에게 배정하는데, 조현병과 급성 조증 환자 위주로 진료하는 1년차가 당장 TMS를 배울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최근 김원기와 노민혜가 기계 다루는 것을 보면 오히려 4년차인 자신보다 더 능숙한 것만 같았다.

최근 1달 동안 기계 3대로 치료한 환자 케이스가 지난 3년간 치료한 환자들보다 많을 수도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천시현 선생은 TMS를 어디서 배운 거야? 그동안은 쓸 일이 없었을 텐데…… 1년차들한테 가르쳐주기까지 하고?”

권원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도영의 성격상 따로 1년차들을 불러 교육을 할 것 같지는 않았고.

혹시나 해서 3년차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역시나 가르쳐준 적은 없다고 했다.

“그건…….”

뜻밖의 질문에 시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광섭도 권원주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지 시현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뭐라고 하지?’

비장의 치트키, 교과서는 쓸 수 없었다.

애초에 책으로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아니었으니까.

“아… 외국 동영상하고 최근에 한국대 채종우 교수님이 교육용 동영상 제작하신 게 있어서 그걸로 공부했어요. 연습은 1년차들하고 서로 돌아가면서 해봤습니다. 교육도 겸해서요.”

그렇다면 남은 건 ‘인강’이었다.

웬만한 수술 술기는 너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과거에는 도제식으로 스승에게 직접 배워야만 했던 지식마저 요즘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독학… 이라는 거네?’

그 말에 권원주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우리 1, 2년차들 인센티브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광섭이 흐뭇한 표정으로 1, 2년차들을 바라보았다.

“과장님, 저희도 주십시오! 저희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잠자코 있던 하도영이 얼울하다는 듯 말했다.

“허허. 그런가?”

“최근 몇 주 사이에 외래 환자 중증도가 확 올라간 것 같습니다. 진료의뢰서 써서 가져온 거 보면 진짜 어려운 환자들이…….”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난치성 우울증 치료를 주력으로 하면서 외래를 방문하는 환자군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재처방 위주의 비교적 편한 진료는 줄어들고 다른 병원에서 잘 낫지 않는 환자들이 늘었다.

그중에는 심한 자살사고로 입원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도 많았다.

“이런 분위기면 완전 흑자 전환이야. 병동 축소는커녕 병동 확장 공사를 요청해야 할 판이라고. 아무튼, 다들 고맙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한껏 들뜬 분위기 속에 오직 시현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의국원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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