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Chapter 28. 위기를 기회로 (2)
“과장님 표정도 많이 좋아지신 것 같다. 이따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이광섭이 회진을 마치고 나가자, 권원주가 말했다.
“이제는 매출 말고 다른 부분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다른 이유로 압박을 해온다면…….”
시현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원장단에서 주구장창 시비거는 게 매출인데. 그거 말고 또 있어?”
적자를 벗어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해서 지난 몇 주간 만사 제쳐놓고 수시로 외래로 불려가 환자를 봤는데.
이제는 다른 부분도 신경 써야 한다니.
옆에서 듣고 있던 황진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병동을 없애려고 하는 게 먼저고 적자는 핑계일 뿐이야. 하루 이틀 적자도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든 다른 이유를 찾지 않을까? ”
‘돈 말고 다른 이유…….’
회귀 전 기억을 되짚어보면 원일웅은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특히 재선에 성공한 이후로는 더욱 공격적으로 병원을 운영했고, 정재계 인사들과 인맥도 넓혀나갔다.
‘나중에 정치하려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으니까.’
그런 그에게 VIP 환자들의 모든 것을 케어할 수 있는 병동 유치는 숙원사업과도 같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 이제 무슨 핑계를 대면서 압박을 할지…….”
황진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부분을 더 신경 써서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권원주가 시현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매출이나 실적으로 압박할 수 없다면, 결국 남은 건 명분 싸움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명분? 그럼 우리가 훨씬 더 유리하지 않나? 병원인데 환자 진료보다 더 중요한 명분이 어디 있어?”
“제가 원장이라면 더 좋은 여건에서 진료할 수 있도록 병동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병동을 폐쇄한다고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옮길 부지도 미리 공지하고요.”
“아… 그런 식으로…….”
“네. 일단 그렇게 한 다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시간만 끌면 됩니다. 원래 있던 것 없애는 건 쉽지만, 새로 만드는 건 어려우니까요.”
“하긴. 여유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시설이 있던 자리로 들어가야 하니까 조율하는 게 쉽지 않겠지.”
“그러다 보면 폐쇄병동을 다시 만들겠다는 계획 자체가 흐지부지될 수도 있고요.”
회귀 전 시현이 4년차였을 때, 몇몇 대학병원의 정신과 병동이 그렇게 공중분해 되었다.
‘오, 이 녀석 생각하는 게…… 꽤 현실적인데?’
감언이설로 병동을 뺏은 뒤 다시 돌려주지 않는, 악랄한 전략을 잘도 생각해냈다.
시현과 같은 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일시적이라도 병동이 사라지는 상황은 피하고 지금 자리를 지켜내는 게 최선이라는 거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과장님 성격상 똑 부러지게 거절 못 하실 것 같은데. 어떡하지…….”
이광섭 과장은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딱 하나 못하는 게 있었다.
‘윗사람의 부탁은 거절 못 하시지.’
처음 몇 번은 어찌어찌 넘어가더라도 요구가 계속되면 결국은 수용할 가능성이 컸다.
‘어떤 제안이든 거절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만들어야 해.’
지금껏 고민해본 적이 없던 주제.
시현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 * *
일주일 뒤. 삼아대병원 회의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리서치 센터 연구원 강서현입니다.”
“정세일입니다. 반갑습니다.”
정세일과 강서현 두 사람이 처음 인사를 나눴다.
얼마 전부터 리서치 센터 쪽 사람들이 정신과 연구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일단 ASP-9022 연구에 대한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함이었지만, 신약 후보 물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임상 의사들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ASP-9022 제2상 시험은 총 여섯 개 대학 병원이 참여했고, 현재까지 삼아대병원 본원에서 가장 많은 피험자들이 지원했습니다.”
“저희가 제일 많다고요?”
“네. 기본적으로 다기관 연구이긴 하지만, 이런 추세라면 우리 병원 데이터만 가지고도 목표 피험자 수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서현의 말에 정세일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해외 연수를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연구에 적극적인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효과도 효과지만 부작용이 거의 없어서…… 지금껏 진행해 본 연구 중에 탈락률이 가장 낮습니다. 이번 연구는 디자인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강서현이 시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애초에 신약을 항정신병약물이 아닌 항우울제로 쓰도록 한 것도 10분의 1수준의 용량으로 쓰도록 한 것도 모두 시현의 의견이었다.
“특히 기존 항우울제를 중단하지 않고 함께 투여하도록 한 전략이 주효했던 것 같고요.”
이른바 증강 요법(Augmentation therapy).
새로 추가된 약물을 통해 기존 치료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너무 실험적인 치료는 대상자를 모으기가 어려운 반면, 기존 치료에 추가하는 방식의 연구는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별 부담이 없었다.
“지금은 환자분이 ASP-9022를 드시는지 아니면 플라시보(위약)를 드시는지 알 수 없으니 결과가 궁금합니다.”
이번 연구는 이중맹검 하에 진행되었다.
연구에 참여하는 환자뿐 아니라 의사도 자신이 처방한 약이 치료제인지 위약인지 알지 못했는데, 약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최대한 정확한 평가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말씀드리기는 조심스럽지만, 긍정적인 지표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예상보다 빠르게 정식으로 시장에 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국내 최초로 항우울제 신약을 개발한 셈이 되겠군요.”
“물론이죠. 저희 센터장님도 기대가 크세요.”
회의 내내 훈훈한 분위기가 유지되었고,
강서현이 조심스레 새로운 슬라이드 하나를 띄웠다.
“정신과와 처음 협업한 연구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다 보니 욕심이 생기는데요…….”
거기에는 국내 굴지의 제약사들에서 개발한 신약 후보 물질들이 정리되어있었다.
“해도 바뀌었고 올해도 선생님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연구 담당 레지던트, 3년차 김석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뜩이나 외래 환자도 늘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인데.
ASP-9022 관련 업무에 추가로 또 다른 연구라니.
비록 레지던트여도 3년차쯤 되면 적당히 한가한 게 정상인데, 어찌 된 일인지 업무량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동기 권진은도 다른 레지던트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연구에 할애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참여한다고 해서 딱히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듯, 강서현이 친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조금이나마 보상을 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요. 연구자로 이름을 올리신 선생님들께 추가 수당을 지급해드리고 싶습니다.”
“추가… 수당이요? 레지던트는 한 곳에만 적을 둘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의사로서 그렇다는 거고 연구원으로서 인건비를 받는 건 별개입니다.”
그 말에 레지던트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레지던트 급여가 과거에 비해 많이 올랐다고는 해도, 실제 노동 시간을 감안하면 최저시급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오, 그럼 월급이 늘어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거기에 임상시험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면 다국적 제약회사 의학부에 굉장히 유리한 조건으로 입사하실 수도 있어요. 바이오 벤처 회사로 합류할 수도 있고요.”
정신과 전문의 출신 메디컬 디렉터는 웬만한 의사 연봉을 훌쩍 넘는 급여를 받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오오.
회귀 전후를 통틀어 레지던트들이 이렇게까지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저희에게도 그렇고 레지던트 선생님들께도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어쩌면 조만간에 스카웃 제의를 받으실 분도 벌써 있는 것 같네요.”
강서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고, 이내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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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나는 연구자다(정신 약물 편)]
난이도 A+
정신과 영역에서 약물치료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큽니다.
혁신적인 신약으로 환자들에게 더 많은 치료 기회를 제공하세요!
성공 조건 : 레지던트 기간 중 추가로 임상 시험(제 2상 이상) 참여 및 유의미한 성과 도출
성공 보상 : 50,000P + 연구자로의 전직 기회
실패시 : 패널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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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연구라…….’
시현은 곧장 ‘수락’ 버튼을 눌렀다.
패널티가 없다는데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게다가 연구자 또한 나쁘지 않은 진로였다.
쉽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길이었다.
2년차가 되자 임상 의사의 영역을 넘어 점차 다른 부분에도 관심을 갖게 된 시현이었다.
* * *
“오늘 일과도 얼추 마친 것 같은데. 다들 시간 어때?”
회의를 마치고 의국으로 돌아가는 길.
정세일이 레지던트들에게 물었다.
평소 오후 회진이나 북리딩이 늦게 끝나면 종종 레지던트들에게 밥을 사주던 그였다.
“별일 없습니다. 교수님!”
“저도 괜찮습니다!”
“1년차들 풀당직 기간도 끝나가고…… 오늘은 맥주 한잔하자고.”
긴 회의에 배가 고팠는지 다들 그의 말을 반겼다.
“어디 보자… 생맥주 먼저 주시고 여기 과일하고 치킨도…….”
음식 주문을 마친 뒤 정세일은 레지던트들을 둘러보았다.
“요즘 다들 너무 수고가 많아. 특히 우리 치프 고생 많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우리 과를 위해서라도요.”
정세일의 칭찬에 권원주가 손사래를 쳤다.
“요즘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뭐든 다 잘하는 것 같아. 진료도 열심히 하고 연구도…… 치프가 따로 가르치기라도 하나?”
“아뇨. 요즘 우리 과 인기도 좋아지고 점점 더 똑똑한 친구들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가? 아무튼, 아주 인상적이야. 다들 오늘 회의는 어땠어?”
정세일이 이번에는 다른 레지던트들을 향해 물었다.
“이왕 하는 연구인데 월급도 더 받고 좋은 기회 같더라고요.”
“연구직 쪽 진로를 처음 생각해봤어요. 나쁘지 않아 보이더라고요.”
“혹시라도 나중에 신약 대박 나면 엄청 자랑스러울 것 같아요.”
대체로 오늘 회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긴장한 얼굴의 김원기와 노민혜가 시야에 들어왔다.
‘니들이 고생이 많다.’
훈훈한 회의 분위기도 누군가에게는 업무량 증가와 수면 부족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레지던트 수련은 대학병원의 존재 이유 중 하나였다.
회귀 전에는 시간도 지식도 부족했기에 두 사람을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전문의 이상의 역량으로 제대로 가르칠 자신이 있었다.
“얘들아. 요즘 힘들지?”
시현이 김원기와 노민혜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선생님이 신경 써주셔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기특한 녀석들…….’
비록 1년차 위였지만, 시현은 어느덧 전문의의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힘들 수도 있지만, 적절한 배움의 기회를 통해 전문의로 거듭나는 것이 레지던트 수련의 목적이었고.
그 배움의 길을 기꺼이 함께하는 것이 선배 레지던트가 후배를 ‘사랑’하는 방법 아니겠는가.
바로 그때.
익숙한 멜로디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 I'm just the pieces of the man I used to be……
“어? 근데 이 노래 제목이 뭐더라? 많이 들어본 노래인데?”
“아, 이거 Queen 노래 같은데요? 저도 제목이 잘…….”
“역시…… Queen 노래는 다 좋은 것 같아. 그치? 앞으로도 열심히 해보자!”
“네! 선생님!”
‘후후. 너희들은 내가 꼭 제대로 키워줄게.’
시현이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후배들을 바라보며 잔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