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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119화 (119/195)

119화 Chapter 28. 위기를 기회로 (3)

“다들 수고했고, 내일 봅시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조촐한 회식이 끝나고.

레지던트 숙소 앞에서 파하려는데 돌연 정세일이 이쪽을 보며 말했다.

“아, 김석용 선생은 잠깐 봅시다.”

“넵. 교수님.”

“아, 그리고 천시현 선생도.”

두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정세일의 교수실로 따라갔다.

“일과 시간 끝나고 따로 불러서 미안한데, 이게 좀 급한 일인 것 같아서.”

정세일은 두 사람에게 A4 한 뭉치씩을 건넸다.

‘이건 아까 회의 때…….’

강서현이 보여준 슬라이드를 인쇄한 것이었다.

다만 더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어 분량이 훨씬 더 많았다.

“여러 후보 물질 중에 임상적으로 더 유용한 약물을 추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연구 담당 선생 의견도 들어보고 싶은데.”

정세일이 김석용에게 말했다.

“그리고 천시현 선생도 의견 있으면…….”

김석용은 연구 담당이라 치고.

다른 레지던트 의견을 듣고 싶다면 시니어인 권원주나 하도영에게 묻는 게 더 적절할 텐데.

이제 갓 2년차가 된 자신을 콕 찍어 따로 불렀다는 사실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이 자료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적은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서류를 쭉 훑어본 뒤 김석용이 대답했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조금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시현의 생각 또한 비슷했다.

일단 회귀 전에 접해보지 못한 약물들이 대다수였다. 한번 시작하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 임상 연구인 만큼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물질을 최대한 빨리 선점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야.”

판단이 늦어지면 좋은 건 남들이 다 고르고 남은 것들 가운데서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작년 리서치 미팅 때도 천 선생이 좋은 의견을 냈다고 들었는데. 경험보다는 감각이 중요할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감각이라…….’

기존 ASP-9022 연구가 실패할 것이라 예측한 것은 회귀 전의 경험 때문이었지만.

그 부분을 배제한다고 해도 연구를 수행하는 시현의 능력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연구 방향을 바꾼 것은 온전히 그의 아이디어였으니까.

“어차피 신약이야. 처방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약이지. 허심탄회하게들 이야기해봐.”

정세일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시현과 김석용을 바라보았다.

“저는…… 항우울제 SLT-2510 이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료를 검토한 지 한참 만에 김석용이 운을 뗐다.

“그래. 이걸 선택한 이유는?”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와 가장 유사한 프로필을 갖는 약물이기 때문입니다. 항우울제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약물이 SSRI니까요.”

“확실히 그렇긴 하지. 다른 약물에 비해 부작용은 적으면서 효과도 무난하니까. 안전한 선택이야.”

“그리고 약하긴 하지만 도파민 수용체에도 일부 작용하는 면이 있어 무의욕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대중적이면서도 무난한 전략.

정세일은 김석용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천 선생은 어떤 게 마음에 들어?”

“저는 SPN-1001이 좋아 보입니다.”

그 대답에 정세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세로토닌보다는 다른 신경전달물질에 초점이 맞춰진 약물 아닌가?”

“네, 주로 글루타메이트와 아세틸콜린 수용체에 작용하는 약물입니다.”

“글루타메이트? 확실히 요즘 연구자들이 관심 있게 보는 분야이긴 한데…… 굳이 이걸 선택한 이유는?”

정세일은 시현의 선택이 흥미롭다고 여기면서도 썩 달갑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아직까지 글루타메이트를 타겟으로 항우울 효과를 내는 약물은 시장에 없어.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 임상시험 중인 약물 중에는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맙소사.

이제 갓 1년차를 벗어난 시점인데, 아직 임상 단계인 약물들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정세일이 놀란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특히 자살사고 심한 환자들의 증상을 빠르게 줄이는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외 연수 중에 학회에 참석했을 때 얼핏 들었던 연구였다.

글루타메이트 수용체에 작용하는 새로운 기전의 항우울제를 자살사고가 심한 환자에게 투여했을 때 빠른 증상 호전을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래. 나도 듣긴 했어. 빠르면 내년…… 아니, 내후년 정도에 FDA 승인을 받을 거라고 하던데. 완전히 새로운 작용 방식을 갖는 항우울제인데…… 천 선생은 모험을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보군.”

도전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성향.

정세일은 시현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

다음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런 것도 있지만, SPN-1001을 선택한 건…… 우리 과 병동 때문입니다.”

‘정신과 병동 때문이라니……?’

신약 연구와 병동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지.

정세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이 약물로 심한 우울 증상을 호소하는 급성기 환자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심한 증상이라면…… 혹시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하겠다는 건가?”

“네. 자살사고가 동반되어 입원이 필요한 환자들이 피험자입니다.”

이거다.

시현의 말에 정세일은 주먹을 꼭 쥐었다.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인데, 병동이 없으면 연구 참여 기관의 지위를 박탈당할 테니 병동을 닫을 수 없는 확실한 명분이 된다.

비록 규모가 축소되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의 병상은 남겨둘 터였다.

“삼아그룹 차원에서 바이오 신약 개발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생각한다고 들었습니다. 성과만 낼 수 있다면,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병동을 건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불가피하게 병동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겠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시현의 말대로라면, 폐쇄병동은 공간만 많이 차지하고 수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애물단지에서 신약 연구를 위한 필수 ‘연구 시설’로 거듭나게 된다.

“그래. 그거라면 충분히 이 약물을 선택한 이유가 될 수 있겠네.”

정세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SPN-1001 외에도 급성기 자살사고 호전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으면 더 찾아보도록 하지.”

연구라는 게 몇 달 만에 뚝딱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주제만 잘 잡으면 최소한 몇 년간은 병동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은 생각이야.’

성공하면 그야말로 대박이고.

실패해도 병동을 지킬 명분을 얻는.

잃을 게 없는 싸움이었다.

이광섭과 진철영이 시현을 신뢰하는 이유가 새삼 이해가 되었다.

* * *

한 달 뒤, 원장실.

“다음 주 과장 회의에서 발표할 1분기 매출 자료입니다.”

기조실장 정유수가 원일웅에게 서류철을 건넸다.

“수고했습니다. 혹시 특별한 사항이 있나요?”

묻기는 했지만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적자의 일등공신(?)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중환자실과 응급의료센터.

그리고 언제나처럼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 그리고 외과와 흉부외과가 그 뒤를 이을 것이었다.

사람 목숨 살려보겠다고 미친 듯이 일은 하는데, 그럴수록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돈 잘 버는 과로 알려진 몇몇 과들도 비급여를 제외하면 적자이기는 마찬가지.

원일웅이 원장이 되기 전부터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사실이었다.

[부대시설 현황]

보고서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병원에 가장 많은 수익을 내는 곳 부동의 1위.

그것은 언제나 장례식장이었다.

명색이 국내 최고를 자부하는 병원인데. 사람을 살리는 본업보다 장례식장 수입이 더 많다는 게 아이러니였지만, 다른 대학병원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나 마나 근소한 차이로 주차장이 2등일 테고. 나머지는 임대 수익…….’

그에 비하면 병원 본업은 언제나 볼품없는 수준이었다.

‘본업에서도 성과를 내야 해.’

뼛속부터 기업가인 자신의 장인, 강태정 회장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가장 시급한 것이 병원의 체질 개선이었다.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이번 분기에는 지표가 많이 개선된 임상 과가 있습니다.”

“그래요? 어딘가요?”

“정신과입니다. 내원 환자 수도 그렇고 내원 일당 진료비도 큰 폭으로 증가했습니다. 병동도 흑자로 전환했고요.”

원일웅이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철을 뒤적였다.

매번 똑같은 결과겠거니 하며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과연 정유수의 말대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작년 1분기와 비교하면 거의 30% 정도 성장했고…… 인건비나 다른 비용은 그대로군요?”

“네. 사실상 매출 증가분 전체를 순이익으로 봐도 될 정도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과장 회의 때마다 갖은 압박을 해댔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지표가 아니던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치성 우울증 클리닉이라고 해서 특화 클리닉을 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기장 치료기도 추가 도입했다고 하고 임상 연구 참여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군요.”

“네. 고객 게시판에도 칭찬 글이 부쩍 늘었습니다. 한국대와 명성대에서 포기하다시피 한 환자들이 본원에서 호전되었다고…… 거의 간증 수준입니다.”

‘병동 없어지는 걸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수를 쓴 모양인데…….’

얼마 전 병동 문제로 항의하러 온 이광섭 과장을 떠올렸다.

하지만 한 분기 지표가 잠깐 개선됐다고 해서 계획을 미룰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돈 몇 푼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다른 이득이 존재했다.

“고무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VIP 병동은 원래대로 추진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음 과장 회의 때 반발이 조금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 매출이 이렇게 개선되어버려서…… 조금 더 생각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여론이요? 무슨 여론 말입니까?”

“내년 선거도 있고, 가뜩이나 이종관 교수 쪽으로 줄을 대려는 교수들이 많은데…….”

“힘없는 임상과 교수 몇이 돌아선다고 대세에 지장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우리 편이 아닐 텐데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적이라…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데, 그런 걸 굳이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작은 것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치면 안 됩니다.”

원일웅은 정유수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교수 투표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만, 투표보다 중요한 게 뭔지 정 교수도 아실 텐데요?”

“네, 원장님. 회장님 방문 일정은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정신과 문제는 다음 주 과장 회의 때 좀 더 상의해봅시다.”

‘방법이 다 있지.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정유수가 원장실을 나서자 원일웅은 얼굴에 음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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