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Chapter 28. 위기를 기회로 (4)
2주 후, 정신과 전체 컨퍼런스.
“발표 준비하느라 애썼습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할까 합니다.”
케이스 발표가 끝나자 이광섭이 교수진과 의국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년에 우리 병동이 신관 17층에 행정부가 있던 곳으로 이전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광섭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일주일 전 과장 회의를 떠올렸다.
* * *
“이 과장님, 오늘 점심 괜찮으십니까?”
회의가 끝나자 부원장 심철호가 이광섭을 따로 불렀다.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기조실장이랑 셋이서 식사라도 하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아, 네…….”
얼떨결에 그를 따라 부원장실로 들어서자, 미리 준비된 일식 도시락이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병동 이전 문제 말입니다. 과장님께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고요.”
“좋은 소식…… 이요?”
멀쩡히 환자 잘 보고 있는 병동에서 쫓겨나는 게 좋은 소식일 리는 없는데.
심철호도 기조실장 정유수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표정이었다.
“신관 17층에 행정부서가 쓰던 공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을 병동 공간으로 활용할까 논의하고 있는데…….”
이광섭도 익히 알고 있는 계획이었다.
벌써 일부는 작년에 병원 밖 사무실로 옮겨 비워둔 상태고, 새로 확보한 공간에 눈독을 들이는 과가 많다고 했다.
“거기에 정신과 폐쇄병동을 새로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공간보다 훨씬 더 쾌적하고…… 심지어 주변 뷰도 더 좋아요.”
“정신과 병동을 확장한다고요? 갑자기 왜 그런……?”
“저희가 매달 경영 지표 검토하는 거 알고 계시지요? 새로 확보된 공간을 최근에 가장 매출이 개선된 과에 할당하라는 원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정신과가 작년 대비 매출 상승 1등이더군요! 이대로라면 2분기가 더 기대되는데, 과장님께서 어떻게 독려를 하신 건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심철호와 정유수가 감탄한 표정으로 이광섭을 치켜세웠다.
“아, 제가 따로 한 것은 없습니다. 의국원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대단한 것 아닙니까. 의국원들이 저절로 따르게 하는 리더십이라니!”
“이광섭 과장님이야 워낙 신사로 정평이 난 분이라 그럴 수밖에. 허허허.”
다소 과장된 칭찬에 이광섭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입원환자 진료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록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병동 이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환자를 못 받는 기간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 * *
“오? 정말요? 그래서 병동이 더 커지는 거예요?”
“네. 병상 수도 많아지고 간호사 인력도 더 충원될 겁니다.”
“지금 병동 홀은 환자 프로그램 진행하기에 좀 좁았는데…… 좋은 소식이네요.”
수간호사 또한 병동 이전 소식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과장님, 내년 이전 계획이라면 지금 병동은 언제까지 운영할 수 있나요?”
“아, 아마도 8월이나 9월 중으로는 닫아야 할 겁니다. 공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약간의 진료 차질은 있을 수 있어요.”
이광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레지던트들은 하나같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이거……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인데.’
얼마 전 시현이 이야기했던 시나리오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빨라…….’
회귀 전과 달리 원일웅의 행보가 더 적극적인 듯했다.
무엇을 노리고 그리 하는지는 짐작이 갔지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 * *
며칠 뒤. 리서치 센터 회의실.
“과장님, 어서 오세요. 오래간만입니다.”
CNS(중추신경계) 팀 연구원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강병우가 환한 미소로 이광섭을 맞았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자료 잘 봤습니다. 오늘은 저희 교수님들 그리고 의국원들과 회의한 내용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이광섭이 강병우와 강서현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천 선생이 낸 아이디어라면서요?”
“네. 아무래도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같이 왔습니다.”
시현이 브리핑을 준비하는 동안.
‘뭘 골랐을까? 항우울제 SLT-2510일까? 아니면 BLT-5102려나?’
강서현은 속으로 유력한 약물들을 추려 나가고 있었다.
리서치 센터 내부 검토에서 호평을 받았던 후보 물질인 만큼, 시현이 안목이 있다면 비슷한 선택을 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오늘 발표는 SPN-1001의 임상적 활용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선 연구 계획서 보시겠습니다.”
“네? 그건 세로토닌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약물인데…… 왜 그걸?”
시현의 선택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맞습니다. 글루타메이트 수용체 길항제에 가깝죠. SLT-2510을 좋게 보신 선생님도 계셨지만, 결국 SPN-1001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 너무 뻔한 대답은 재미없지.’
강서현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물었다.
“솔직히 예상 밖이긴 한데, SPN-1001을 선택한 이유가 너무 궁금한데요?”
“급성기 환자의 자살사고를 호전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시현의 대답에 연구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 다른 주제도 아니고 자살에 관한 연구라고?
-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 그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연구 책임자로서는 걱정이 앞서네요. 자칫 임상시험 자체가 폐기될 수도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강서현의 생각 또한 다른 연구원들과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자살사고가 심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했으니 증상 악화로 그중 사망자가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상 연구 중 환자가 사망했으니 혹시 약물이 자살사고를 악화시킨 게 아닌지 논란이 있을 수 있었고.
연구 중단은 물론 참가자의 유족과 법적 분쟁도 각오해야 했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임상 연구는 시작 단계에서 우울 증상이 심하거나 자살사고가 있는 환자들을 배제한다는 것을요.”
“알면서도 왜 굳이 그런 힘든 선택을……?”
“꼭 ‘필요한’ 연구니까요.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분들인데…… 정작 자살사고가 심한 환자들을 주 대상자로 진행한 연구는 없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어요.”
과거 다른 연구를 진행했을 때, 임상시험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사망 사고로 연구를 중단한 경험이 있는 강서현이었다.
“그래서 이번 연구는 입원환자 위주로 진행해볼까 합니다. 그런 위험을 원천 차단하는 거죠.”
“그렇다면 일단은 안심이긴 하네요.”
그녀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폐쇄병동에서 연구를 진행한다면 사고 발생에 대한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런데 이 약물…… 간 대사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습니다. 투여하는 데 조금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강서현을 설득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리서치 센터 연구원 임정석이 이의를 제기했다.
“SPN-1001은 간의 대사 효소인 CYP2D6에 의해 빠르게 분해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별 효과 차이가 크고 유효 용량 정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예리한 지적이었다.
효과의 개인차와 다른 약물과의 상호작용.
리서치 센터 내부 회의에서 SPN-1001이 배제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을 이어나갔다.
“우선 시도해볼 만한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나?’
즉흥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것 치고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일단 일부 진통제나 인지기능 개선제에서 적용하는 방법인데, 패치를 활용하는 겁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비강 내 분무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피부와 점막을 통해 약물을 투여한다는 뜻.
투여 경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간을 우회하여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요?”
“다른 약물과 함께 투여하는 방법입니다. 분해 효소를 억제하는 약물을 같이 쓰면 SPN-1001이 안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현재 리서치 센터에서 연구 중인 BPP-1503를 이용해서…….”
회귀 전 정신약물학회에서 해외 연자를 초빙해 열었던 심포지움, ‘항우울제의 미래’에서 들었던 방법들이었다.
앞으로는 글루타메이트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게 될 거라며 자신만만하던 연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렇게 단시간에…… 이게 말이 돼?’
반면 시현의 말에 임정석은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거기다… 우리 센터에서 연구하고 있는 다른 약물까지도 파악하고 있다고?’
예전 리서치 미팅 때도 느꼈었지만, 임상 연구에 대한 시현의 감각은 웬만한 센터의 수석 연구원 그 이상이었다.
“알겠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네요. 더군다나 기존에 연구 중인 BPP-1503까지 활용할 수 있다니…… 저희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정신과 쪽의 제안을 환영해야 할 상황.
임정석을 설득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연구, 대상자 모집을 중단 없이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정신과 병동은 연내 이전 계획이 있다고 하던데요. 중간에 공백이 생기면…….”
이제 더는 문제 제기할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던 찰나, 강병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병동은 옮기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이광섭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계획이… 취소됐습니까?”
“네. 병동 이전 제의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일단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병동이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도 걸리고…… 그만큼 연구도 미뤄질 테니까요.”
애초에 이광섭은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크고 좋은 병동보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먼저였고, 난치성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약물 개발이 더 중요했다.
정세일에게 새로운 약물 연구에 대해 보고받은 뒤, 그는 심철호를 찾아가 병동 이전 계획을 없던 일로 하자고 못을 박았다.
“그럼…… 과장님이 너무 손해 보시는 거 아닙니까? 더 좋은 자리로 옮길 기회인데요.”
“아쉽긴 하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광섭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대신 첫 케이스를 최대한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외래에서 증상 조절이 되지 않아서 입원 대기 중인 분들이 많습니다.”
심한 자살사고에 사로잡힌 환자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우울증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할지라도.
자신이 없는 세상에 남겨질 가족들과 친구들의 슬픔을 안다고 하더라도.
당장의 고통이 그들을 쉴새 없이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이었다.
‘올해 안에만 시작할 수 있으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임상시험 약물에 불과하지만.
절박한 처지에 있는 환자에게는 써볼 수단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될 터였다.
그리고 즉각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확보한 시간 속에서 환자는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도 있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연구 대상자를 지속적으로 모집하고 치료 성적을 낼 수만 있다면.
병동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