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Chapter 28. 위기를 기회로 (5)
“놀랍네요. SPN-1001을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회의가 끝나자, 강서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센터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주제라는 거… 알고 있죠? 환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약물일지 몰라도요.”
“잘 알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연구인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이해해준 게 아니고…… 뭐랄까 강제로 이해당한 느낌인데요? 오늘 같은 분위기면 앞으로 진행에 무리는 없을 거 같네요.”
강서현이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덕분입니다. 주신 자료, 워낙 정리가 잘 돼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자료만 본다고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닐 텐데…… 아무튼, 볼 때마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폐쇄병동 문제로 리서치 센터를 찾은 불과 2달 전이었다.
‘Portable TMS 시제품 활용하는 것도 그렇고…… 이번 SPN-1001도 그렇고…….’
그 시점부터 정신과 매출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했고.
이제는 새로운 약물에 관한 연구 계획서를 들고 나타났다.
‘거기에 굳이 병동이 있어야만 수행할 수 있는 연구를 골랐다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폐쇄병동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온전히 시현의 의도라는 것을 강서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다 선생님 작품인 거죠?”
“제 작품…… 이요?”
“얼마 전에 선생님이 1년차 선생님 둘 데리고 날마다 센터에 왔던 거 다 알고 있어요.”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을 미리 가르쳐준 것뿐입니다.”
“시치미떼지 말아요. 오늘 연구 주제만 해도…… 이렇게 될 거 처음부터 예상하고 고른 거 아닌가요?”
시현이 즉답을 피하자 강서현은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왕이면 병동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한 건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더 중요한 거라면 무슨……?”
“환자죠. 결국, 폐쇄병동도 임상 연구도 환자 치료를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하하. 역시! 선생님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참 잘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저한테까지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
연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정치적인 감각까지 좋을 줄이야.
강서현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환자를 보다 보면 경과가 좋은 아홉보다 잘 낫지 않는 환자 한 명이 더 힘든 게 사실이에요.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죠.”
‘잘 낫지 않는 환자에 초점을……?’
연구의 성공 가능성과 실패에 따른 비용 손실을 저울질하는 것 보다,
당장 눈앞의 환자에게 도움이 될 치료법을 찾는 것이 시현에게는 더 중요했다.
따지고 보면 ASP-9022도 TMS도 다른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지 고민하다 찾아낸 방법이었고.
폐쇄병동이라는 이슈가 있긴 했지만, SPN-1001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뜻이었군요. 중요한 게 따로 있다는 말이…….”
강서현은 무언가 깨달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싸워본 사람은 전장에 필요한 무기가 무엇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다.
애초에 의사인 시현과 연구자인 강서현의 환자를 보는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신세를 많이 지네요. 매번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도움은 제가 받는걸요.”
시현의 말에 강서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데.
위이이잉- 위이이잉-
별안간 시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과 채이진]
“어서 받으세요. 급한 전화 같은데.”
“네, 감사합니다.”
시현이 목례한 뒤 곧장 수신 버튼을 눌렀고.
-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 환자분 때문에요. 오늘 퇴원하실 것 같은데…… 보호자들이 퇴원 전에 정신과 진료를 원하셔서요. 혹시 잠깐 봐주실 수 있을까요?
정식 협진을 보려면 시간이 걸리고, 급한 대로 정신과 외래에 연락을 해봤으나 요즘 예약 환자가 많아 당일 접수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마침 근처인데 바로 가서 봐 드릴게요.”
-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 강서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참 친절하신 것 같네요. 다짜고짜 환자 봐 달라고 하는 부탁도 잘 들어주시고…….”
“레지던트 동기라서요. 급할 때 서로 도움 주고받고 하는 거죠.”
“그게…… 다른 학교 다른 병원 출신인데도 동기인가요?”
“네? 그걸 어떻게……?”
채이진이 삼아대 출신이 아닌 걸 어떻게 아는 건지 의아할 무렵.
“아, 아니에요. 아무튼, 아까 말씀하신 연구는 최대한 빨리 시작할 수 있게 서둘러볼게요.”
강서현은 말까지 더듬으며 화제를 돌렸다.
“네, 오늘은 협진 때문에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다음에 뵈어요.”
그렇게 시현은 곧바로 회의실을 떠났고.
‘동기… 동기라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서현은 뭔가 신경 쓰인다는 듯 턱 끝을 매만졌다.
* * *
“일찍 오셨네요.”
“마침 리서치 센터 미팅 때문에 나와 있었어요. 어떤 환자인가요?”
“유방암으로 입원하신 56세 여자환자시고, 기저질환으로 당뇨가 있는데 최근에 혈당 조절이 안 돼서 내분비내과로 입원하셨어요.”
‘유방암 환자인데 저혈당…….’
[SORA : 내분비내과 입원환자 리스트를 출력합니다.]
‘이분인가?’
[이영란 여 / 66 담당의 R2 채이진 / 담당 교수 Prof. 이은정]
채이진이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환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이영란 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저혈당이 있고 최근에 몸무게도 많이 빠져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해봤는데, 대부분 정상이었어요. 정신과적 원인을 평가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보이는데 퇴원을 요청하신 건가요? 유방암은 좀 어떤가요?”
“사실 유방암 자체는 타목시펜(tamoxifen, 에스트로겐을 차단하는 항암제의 일종)에 반응도 좋고 예후도 나쁠 것 같지 않은데, 환자분이 유독 비관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잠도 잘 못 주무시고요.”
“그렇다면 우울 증상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내과적 원인과 상관없이 반복되는 저혈당.
담당의가 다른 사람도 아닌 채이진이었다.
신체 질환을 놓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
우울증에 동반되는 식욕 저하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네. 그래서 보호자들도 퇴원 전에 정신과 진료를 원하는 것 같고요.”
시현은 ‘세상의 모든 차트’로 환자 상태를 리뷰한 뒤 곧장 병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이영란 님. 협진 의뢰받고 온 정신과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소박한 시골 할머니 같은 인상의 환자가 시현을 맞았다.
정신과 의사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엄마, 요즘 좀 우울해 보여서 협진 신청했어. 가서 속에 있는 말 다 하고 와요.”
보호자 침상에 걸터앉은 환자의 아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 어머니 좀 잘 부탁드려요. 자꾸 집에만 가고 싶다고 하시고…….”
“아니…… 나는 괜찮다고 해도 자꾸 그러네.”
“이영란 님, 멀리서 올라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외래 예약 맞춰서 다시 오시려면 번거로우니 오늘 면담하고 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 그럴까요?”
환자는 정신과 면담이 썩 내키지 않는 듯했으나,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면담실을 향했다.
“담당의 선생님에게 듣기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잘 못 주무신다던데, 어제는 좀 어떠셨어요?”
시현은 환자 정보를 불러온 뒤 면담을 시작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잘 잤어요.”
“그러셨군요…….”
[밤새 뒤척이며 수면 이루지 못함]
간호기록과 전혀 다른 내용에 시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퇴원해서 집에 갈 생각을 하니까 그런지 마음도 편하고 두근거리는 것도 없어요. 저는 괜찮은데…… 애들이 괜히 걱정이 많은 것 같아요.”
[혈압 측정 시 두근거림 호소. 담당의 보고 후 인턴 김영호 EKG 촬영함. PRN으로 항불안제 투여함]
혹시 다른 환자의 기록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으나 분명 이영란의 차트였다.
‘증상을 감출 이유가…….’
하지만 체중감소에 저혈당이 동반될 정도로 심한 우울증 환자로 보이냐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암 환자 특유의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었고, 표정도 전반적으로 평온해 보였다.
“산 좋고 물 좋은 동네서 들판 보며 살다가 여기 오면 얼마나 답답하다고요. 집에 가서 농사일도 거들어야 하고……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병원에서 답답하게…….”
환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저 집에 가고 싶으신 건가.’
환자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마당이 있는 넓은 집에서 살다가 비좁은 병실에서 생활하는 건 건강한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다.
하물며 환자들이야.
투병이 길어질수록 병원 생활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퇴원 처방에 수면제와 안정제를 추가해드리도록 하고 퇴원 후에 정신과 외래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간호기록이 마음에 걸렸지만, 환자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요.”
“네. 담당의 선생님께도 그렇게 전해…….”
그러나 시현이 퇴원 처방을 입력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환자의 생존 확률이 급격하게 저하됩니다.]
[치료 진척도 21/100 생존 확률 52->27%]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시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새로 떠오른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내과적으로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생존 확률이 떨어진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하나였다.
‘카이트만의 안경.’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이영란 님, 이어서 아드님 이야기도 좀 들어볼게요.”
일단은 면담을 좀 더 해보는 것으로.
자살 위험도를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도록 단서를 찾아야 했다.
철컥.
시현이 내선 전화로 보호자를 부르기가 무섭게 면담실 문이 열렸다.
“선생님, 어머니는 좀 어떠신가요?”
“말씀은 괜찮다고 하시는데…….”
퇴원 결정과 동시에 생존 확률이 떨어졌다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쵸? 뭔가 좀 이상하죠? 역시 정신과 선생님이라 다르시네!”
시현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보호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농사가 바쁠 때라 집에 가야 해. 너희 아부지 밥도 차려줘야 하고.”
“밥은 무슨! 젊어서부터 술에 노름에 고생만 시켰다고 맨날 타박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그리고 병원비가 한두 푼도 아니고…….”
“건강보험 적용돼서 별로 안 나오던데……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 답답하면 우리 집으로 와요. 시골집 가면 일밖에 더하겠어요?”
“지금은 거기도 싫어. 난 집으로 갈란다.”
“전엔 우리 집 편하다고만 하시더니 갑자기? 아니, 집에 몰래 맛있는 거라도 숨겨 놨어요? 왜 그렇게 집에 못 가서 난리세요?”
흠칫.
아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 아주 잠깐 환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펴졌다.
“그, 그런 거 없다. 두말 말고 퇴원시켜줘. 나는 살던 집이 좋아…….”
그리고 다음 순간,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이영란 환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