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Chapter 29. 미리 알 수만 있다면 (1)
“그, 그런 거 없다. 두말 말고 퇴원시켜줘. 나는 살던 집이 좋아…….”
딩동!
[system : 이영란 환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 * *
“환자는 어떻던가요?”
면담을 마치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오자 채이진이 물었다.
“증상을 숨기는 경향이 있어요. 실제로는 우울증이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집에서 잘 생활할 수 있을지 보호자가 불안해하던데,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자살사고가 있어 보였습니다.”
“자살사고……요?”
“네. 상당히 고위험군으로 보여요. 내과적으로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정신과로 전과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채이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도 잘 못 자고 식사량도 적긴 했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최근 며칠은 표정도 훨씬 편안해 보였다.
얼른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퇴원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아… 그렇다면 아드님에게 미리 말씀드려야겠어요.”
“저 찾으셨습니까?”
채이진이 미처 부르기도 전에 보호자가 스테이션으로 다가왔다.
“저희 어머니 상태가 많이 심각한가요?”
“네. 여기 정신과 선생님 말씀으로는, 정신과 병동으로 옮겨서 치료하면 좋겠다고 하시네요.”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저는 어머니 몸 추스를 때까지 내과 병동에서 조금만 더 입원한 상태로 정신과 진료를 병행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보호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현에게 물었다.
“환자분께서 너무 퇴원에 몰두하시는 게…… 조금 수상합니다. 아드님 댁이 아니라 굳이 시골집으로 가겠다고 하시는 것도요.”
시현은 병실에서 봤던 알림창을 떠올렸다.
집에 별다른 것이 없다는 말.
그리고 살던 집이 좋다는 말.
둘 중 최소 하나 이상은 거짓이었다.
‘평소 남편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집이 마냥 편할 리는 없는데.
그럼에도 퇴원해서 집으로 가는 것에 집착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어 보였다.
구체적인 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맞아요. 저도 평소랑 어딘지 모르게 좀 다른 것 같아서 정신과 치료를 좀 받으셨으면 좋겠는데, 다 괜찮다고만 하시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의로 입원한 환자가 퇴원을 요청하면 강제로 입원을 유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오랜 치료로 지쳐있는 상태이니 충동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곁에서 잘 지켜보시는 수밖에…….”
“저도 그렇고 아버지도 요즘 농사가 바쁜 철이라…… 하루 종일 옆에 붙어서 봐줄 보호자가 없어요. 제가 아버지랑 상의 좀 해보고 올게요.”
일단 퇴원하면, 환자는 낮 동안 혼자 지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골집에 위험한 물건은 없습니까? 우울증이 심할 때는 자살 도구로 쓰일만한 것들을 다 치우도록 해야 합니다.”
설령 퇴원하더라도 환자의 자살 충동을 악화시킬만한 물건들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자살 예방에 중요했다.
“농촌에 널리고 널린 게 그런 물건인걸요. 칼에 낫에 노끈에…… 아무튼, 아버지와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런 것들 최대한 치우실 수 있도록요.”
“네. 그게 좋겠습니다.”
보호자가 통화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채이진이 몹시 궁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요. 혹시 환자가 선생님한테만 따로 이야기한 게 있나요? 저랑 면담할 때는 다 괜찮다고만 하셔서…….”
“저와 면담할 때도 비슷했습니다. 특별히 따로 말씀하신 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환자가 자살 고위험군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당장 자살사고를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자살 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건…….”
또다시 그럴듯한 설명을 꾸며내야 하는데.
이건 ‘교과서’와 ‘인강’으로 커버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일종의 감이죠. 전에…… 유사한 케이스가 있었거든요.”
시현은 짐짓 비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경험이다.’
과거에 비슷한 환자를 봤다고 하면, 제아무리 채이진이라 해도 더 따지고 들 수 없지 않겠는가.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제 담당 환자는 아니었고, 얼마 전에 응급실에 약물 과량복용으로 왔다가 협진 의뢰된 환자였습니다.”
정확히는 회귀 전 3년차 때 봤던 환자니 지금으로부터 1년 뒤에야 볼 예정이지만,
이영란 환자와 여러모로 닮은 면이 많은 환자였다.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고 응급실 통해서 입원한 중년 여자분이었는데, 깨어나서 하는 말이…… 잠이 너무 안 와서 짜증이 나서 한꺼번에 약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자살사고는 부인하고요?”
“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편안한 표정으로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불면증이 심한 분이라 평소에 외래에서 수면제를 오래 드셨거든요. 그땐…… 그저 내성이 생겨서 약이 듣지 않으니 그랬겠거니 했었습니다.”
“애매한 경우인 것 같은데…… 그래서 그 환자는 그대로 퇴원했나요?”
“네. 환자도 보호자도 입원을 원하지 않았어요. 의식 회복하고 혈액검사에 이상 소견은 없어서 바로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바로…… 돌아가셨어요.”
“혹시 사인이……?”
“자살이었습니다. Hanging(목맴)에 의한.”
시현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환자를 좀 더 면밀하게 살폈더라면.
보호자들에게 한 번 더 설명했다면.
여러모로 후회가 많이 남는 환자였다.
“선생님도 많이 놀라셨겠어요.”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다 갑자기 차분해지고 편안해 보이는 것도 자살 위험 징후 중 하나예요. 비록 감이긴 하지만……. 저 환자분, 잘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하얗게 질린 보호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방금 아버지랑 통화했는데…… 창고에서 이게 발견됐다고 하네요.”
그의 핸드폰에는 낡은 지저분한 플라스틱 통 사진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그라목손 액제 500ml]
헉.
사진을 확인한 채이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라목손(Gramoxone).
제초제의 일종으로 사람이 섭취할 경우 치명적인 농약이었다.
독성이 강한데다 마땅한 해독제도 없어서 일정량 이상 섭취하면 대부분 환자가 사망한다.
그 때문에 그라목손은 시장에서 퇴출된 지 오래였고, 그 조치만으로도 자살률까지 감소했다는 보고도 있을 정도였다.
“엄마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정신과로 옮겨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
“네. 병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현이 병동으로 전화를 거는데, 뒤늦게 나타난 환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예전에 쓰고 남은 게 창고에 있었던 거야.”
“엄마는 가만히 있어 봐요! 그거 몇 년 전에 다 수거해갔다고 했는데…… 어디서 구한 거예요?”
“옆집 주희 엄마한테 남은 거 있다길래 조금 샀어! 텃밭에 뿌리려고! 내가 그런 못된 생각을 했으면 천벌을 받지!”
모자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시현은 환자를 입원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다.
‘자의 입원이 아니면 쉽지 않아.’
자살 위험이 있어 보이지만 완강히 부인하고 있고, 현실감이 떨어진 상태도 아니었다. 강제로 입원시키기는 여러모로 까다로웠다.
“아무튼, 이대로는 퇴원 못 할 것 같아요.”
“너 요즘 형편도 안 좋다며? 괜히 입원비 드니까 짐 싸서 가자.”
“일단 살고 봐야지. 그깟 입원비가 중해요?”
‘돈 문제라면…….’
대화를 듣고 있던 시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대로 퇴원하시면 아마 돈이 더 들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현의 말에 환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라목손처럼 무허가 농약을 판매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 있는 거 알고 계십니까?”
“그, 그런가요?”
“사람 목숨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그런 ‘흉악한’ 물건을 가지고 계시니…… 의사로서 이건 마땅히 신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환자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나라에서 금한 아주 위험한 극독이니까요. 단순 사용자에게도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어요.”
시현이 보호자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이고…… 의사 선생님, 내가 잘못했어요.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500만 원이라니.
가뜩이나 걱정이 많은 환자가 이내 벌벌 떨기 시작했다.
“어휴, 선생님. 저희 환자분이 뭘 잘 모르고 실수하신 것 같은데…… 좀 봐주세요.”
이내 분위기를 파악한 채이진이 짐짓 애원하는 척을 하며 시현에게 말했다.
“안됩니다. 자칫 건강을 해칠 수 있는 물건을 그냥 둘 수 없어요! 꼭 신고해야 합니다.”
“그래도 환자분의 ‘비밀’인데 정신과 선생님이 그건 지켜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뭐, 제 환자도 아닌데 그게 어때서요? 우리 과에 ‘입원’이라도 하면 모를까…….”
두 의사의 어설픈 연기에 심각했던 보호자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혼신의 연기 -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3,000P)]
“엄마! 그러지 말고 여기 선생님 앞으로 입원하면 되잖아? 원래 의사들은 자기 환자 ‘비밀’을 지켜준다는데.”
“그, 그래? 그럼 주희 엄마 신고 안 하는 거지? 500만 원 안 내도 되고?”
“그럼! 누가 자기 환자 경찰서 보내고 싶겠어? 안 그래요? 선생님들?”
* * *
“다행이에요. 환자분이 입원하겠다고 하셔서.”
“네. 병동에서 치료 시작하면 많이 좋아질 겁니다.”
[치료 진척도 21-> 37/100 생존 확률 27%->52%]
입원을 결정한 순간, 치료 진척도와 생존 확률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선생님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진단하고 판단할 수 있는 건지…….”
전문의 수준의 지식, 과거의 경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차트’ 시스템을 통해 얻은 정보까지 활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때문에 곤란한 상황도 종종 있었다.
어려운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과정에 뭔가가 생략되어 있었기 때문.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환자가 통증을 호소해서.
열이 나고 염증 수치가 올라가 있어서.
CT에서 음영이 증가 된 소견이 있어서.
모든 의심에는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시현에게는 그게 없었다.
특히나 진단에 있어 논리와 판단 근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과 의사가 보기에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저는 그냥…… 직감을 따르는 편인 것 같아요.”
어차피 설명할 수 없는 거,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의 대답이 최선이었다.
“직감이라면…… 그건 배워서 되는 건 아니겠죠?”
“그렇겠죠? 아마도?”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본 게 좀 있는데요. 선생님의 그 ‘직감’이라는 걸 한번 연구해보고 싶어요.”
직감을 연구한다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시현을 향해.
채이진이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