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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123화 (123/195)

123화 Chapter 29. 미리 알 수만 있다면 (2)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본 게 좀 있는데요. 선생님의 그 ‘직감’이라는 걸 한번 연구해보고 싶어요.”

‘직감을 연구한다, 라.’

의학 연구의 목적과 방법론은 명확해야 하는데, 직감을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환자가 앞으로 좋아질지 나빠질지를 예측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질병의 Risk factor(위험 요인)을 찾는 연구도 하고요.”

“그렇죠. 좀 더 위험한 환자들을 조기에 발견해서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예후가 좋아지니까요. 그런데 그런 연구는 이미 많지 않나요?”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기저질환…… 알려진 모든 조건이 비슷하다고 해도 결과는 천차만별이니까요.”

이미 알려진 요인들만으로는 대략적인 위험도는 가늠할 수 있을지라도 정확한 경과를 예측하기란 어렵다.

환자별 개인차도 있고 미처 파악하지 못한 숨겨진 요인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환자를 진료할 때,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활용해서 즉각적으로 위험도를 계산해주는 ‘AI 시스템’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음… 마치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비서처럼요.”

“…….”

[SORA : …….]

뜨끔.

중요한 비밀을 들킨 사람마냥 시현이 멈칫했다.

‘위험도와 치료 경과를 계산하는 AI라면…… 하고 싶다는 게 결국은?’

사실상 ‘세상의 모든 차트’와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 시현도 늘 궁금하게 여기던 일이었다.

명확한 자살 징후가 보이지 않을 때도, ‘세상의 모든 차트’는 생존 확률이 떨어지는 상황을 즉각 감지해서 알려주곤 했다.

뛰어나다 못해 사기적인 기능이라 자신조차 그저 기연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는데, 이걸 연구 주제로 생각할 줄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났을 때,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많지만 면밀하게 분석하고 배움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드물다.

과연 채이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선생님하고 얘기하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나이 많은 교수님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교수… 님이요?”

“네. 중환자실 돌다 보면 그럴 때가 있어요. 교수님이 예후가 안 좋을 것 같다고 하시면 정말 신기하게 며칠 뒤에 환자 상태가 나빠져요. 이게 객관적인 검사 결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일이거든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뭔가라면, 경험의 차이 아닐까요?”

“그렇겠죠? 아무튼, 앞으로 꼭 다뤄보고 싶은 주제예요. 아직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하는 게 연구의 본질이니까요.”

‘그건 무의식의 영역인데…….’

타고난 감이 좋은 사람에게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물어보면, 그냥 느낌이 싸했다는 둥,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는 둥 모호한 대답밖에 들을 수 없다.

‘확실히 쉬운 주제가 아니야.’

기존에 알려진 위험 요인이야 공부하면 된다지만, 이런 종류의 직관은 오직 경험과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남에게 쉽게 가르칠 수도 없다.

“그러니까 환자의 생사를 포함해서 경과를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고 싶으신 거군요.”

“맞아요. 정확해요!”

“정말 매력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레지던트 때 진행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연구 같네요.”

“그렇죠?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어요. 선생님도 같이하실래요? 정신과 환자 진료에 적용하면 자살 예방에도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채이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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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나는 연구자다(자살 예방 편)]

난이도 S+

자살 예방은 정신의학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혁신적인 예측 모델로 환자들에게 더 많은 치료 기회를 제공하세요!

성공 조건 : 레지던트 기간 중 자살 위험도 예측 모델 개발 및 유의미한 성과 도출

성공 보상 : 50,000P + 연구자로의 전직 기회

실패시 : 패널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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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가 S+라고?’

지금껏 받은 퀘스트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뤄야 할 데이터양도 많고, 분석하는데도 시간도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패널티는 없었지만, 선뜻 ‘수락’으로 손이 가질 않았다.

진짜 어려운 점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유용할 것 같긴 하지만…… 역시 쉽지 않아 보여요.”

“선생님도 그런 말을 할 줄 아시네요. 왜죠?”

“아무래도 연구비 조달이 어려울 거예요. 그리고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기술적인 부분도 쉽지 않고요.”

신약 연구야 제약회사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만큼 인력이나 시설 활용에 어려움이 없지만,

자살 예측 모델을 개발하는 건 특별히 수익이 나는 일도 아니라 외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정식으로 연구비를 따내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경제적인 부분이 문제군요…….”

“네. 하지만 아이디어가 워낙 좋으니 언젠가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연구비 문제라면 저도 열심히 알아볼게요! 기술적인 부분도요. 그럼 그땐 같이 하시는 거죠?”

레지던트 신분으로 어떻게 알아보겠다는 건지 의아했지만, 채이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 * *

며칠 뒤.

“904호 이영란 환자, 유방암으로 치료한 과거력 있는 분으로 식욕저하와 체중감소를 주소로 내과에 입원하였고 협진 시 자살사고 보여 전과하였습니다. 환자는…….”

“그라목손이라…… 아직도 농촌에는 예전에 쓰다 남은 것들이 돌아다닌다고 하더군요.”

시현의 보고에 이광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아직도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퇴원 전에 발견해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계획은요?”

“Mirtazapine 7.5mg으로 약물치료 시작했고 수면 충분히 취한 후에는 불안감 호소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요…… 자살사고가 심한 환자인데 지난번에 이야기 한 SPN-1001을 쓸 정도는 아닌가요?”

“네. 아직 검증된 약물은 아닌 만큼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들 위주로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표준 치료에 반응이 있는 환자까지 무리하게 임상시험에 참여시킬 생각은 없었고, 이광섭도 같은 생각이었다.

“레지던트 선생님들도 외래에 적당한 대상자가 있는지 찾아보세요. 천 선생이 말한 대로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 위주로.”

“네! 과장님!”

이광섭의 지시에 3, 4년차 레지던트들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 연구 주 담당은 누가 할 건가요? 김 선생이?”

“그건…….”

이광섭의 질문에 김석용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통은 3년차 연구 담당인 자신이 맡는 게 적절하지만, 먼저 의견을 낸 건 시현이었다.

연구 결과가 시원치 않으면 모를까, 나중에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면 공을 가로채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었다.

“천시현 선생과 상의해보겠습니다.”

“그래요. 연구라는 게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단위 프로젝트니까, 1, 2년차들도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네! 과장님!”

“벌써 1학기도 절반이 넘게 지났군요. 우리 1년차 선생님들도 적응 잘하고 있죠?”

이광섭이 이번에는 김원기와 노민혜를 향해 말했다.

“넵. 치프 선생님부터 2년차 선생님까지 잘 가르쳐 주셔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다들 일과 마무리 잘하시고 내일 봅시다.”

이광섭의 오후 회진이 끝나자 레지던트들은 회의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후-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었다.

“아, 오늘도 어찌어찌 마무리되네. 요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그러게요. 어째 3년차 되더니 외래도 연구도 작년보다 더 바빠진 것 같아요. 원래 그런가?”

권진은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일거리가 늘어난 의국원들이었다.

“오늘 수요일이니까 2년차 당직이지? 1년차들 오랜만에 푹 쉬고 내일 보자.”

“네, 선생님.”

어느덧 5월 말.

다들 맡은 바 업무에 제법 익숙해지고 과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풀당직도 풀리고 오랜만에 병원을 벗어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1년차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때였다.

딩동!

[SORA : 응급실 내원 환자를 출력합니다. 현재 1명의 환자가 정신과 진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림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김원기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발신자를 확인한 김원기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신과 1년차 김원기입니다.”

- 인턴 임재호입니다. 노티드리겠습니다. 28세 여자 환자분…….

역시나 응급실 노티였다.

‘하필 이 타이밍에…….’

[5 : 50 PM]

주야 응급실 당직 교대를 10분 남긴 시각.

오랜만에 오프라 약속까지 잡아놨는데 지금 환자를 보기 시작하면 8시는 되어야 병원에서 나갈 수 있다.

김원기의 미간에 절로 주름이 깊어가는데.

“그 환자 내가 받을게.”

뜻밖에도 시현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이것까지는 제가…….”

“괜찮아. 나가봐.”

시현이 당직 폰을 건네받자 김원기는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우리 2년차는 천사라니까? - 노티를 대신 받아 후배 레지던트의 휴식 여건을 보장하였습니다. (어려움 난이도, +1,000P / 명)]

‘오, 이건 1명당 보상이!’

포인트 때문에 나선 건 아니었지만.

응급실 환자 한 명에 1천 포인트면 나쁘지 않았다.

‘응급실에 자주 가야겠어.’

인턴과 짧은 통화를 마친 시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응급실을 향했다.

* * *

“은희야, 왜 그랬어! 왜…….”

응급실에 들어서자 한 중년 남성이 환자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인가?’

[이은희 여/28 인턴 임재호 / R2 천시현]

환자는 응급실에서 주는 환자복을 가디건처럼 걸친 채 침상에 누워있었다.

유독 흰 피부톤과 곳곳에 피가 튀겨 섬뜩한 느낌을 주는 티셔츠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임재호 남/25 삼아대병원 응급실 인턴]

“무슨 환자예요? 노티 간단히 해주세요.”

“앗, 선생님 벌써 오셨어요?”

전자 차트에 타이핑을 하고 있던 인턴이 깜짝 놀라며 시현을 맞았다.

“일단 히스토리부터 이야기해줘요. 차팅은 천천히 하시고.”

“28세 여자 환자로 왼팔 전완부에 18cm가량의 자해로 방문하였습니다. 최근에 업무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하고…….”

임재호의 노티를 듣고 있던 시현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처(봉합)는 했고요?”

“정형외과에 콜은 했고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혈과 드레싱은 해둔 상태입니다.”

약물을 과량복용하여 의식이 혼미한 상태라면 모를까.

기본적인 처치는 끝났고, 면담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정형외과도 워낙 바쁜 과이다 보니 콜을 해도 내려오는 데 한참은 걸릴 터였다.

‘분명 18cm라고 했어…….’

“그럼 일단은 우리 과에서 볼게요.”

시현은 곧장 환자가 누워있는 병상을 향했다.

제법 큰 상처도 문제였지만, 정형외과 처치보다 급한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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