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24화 (124/195)

124화 Chapter 29. 미리 알 수만 있다면 (3)

* * *

회귀 전 이 무렵.

김원기가 의국에서 전날 응급실에서 본 환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 응급실에서 wrist cut(손목 자해)로 온 환자가 있었는데 진짜 심하더라고요. 18cm가 넘어 보였습니다.”

“그 정도면…… 정형외과로 입원해서 수술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시현이 걱정스레 물었다.

“종방향으로 길게 난 상처이고 다행히 인대는 많이 안 다쳐서 봉합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입원은 안 하겠다고 해서 일단 외래만 예약만 잡았는데 괜찮을까요?”

자살시도를 한 환자를 돌려보낸 상황이었다.

환자와 보호자가 원했다고는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환자도 보호자도 입원을 거부하는데 무슨 수로 붙잡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황진호가 말했다.

“그렇긴 한데요…….”

법적 책임은 없을지라도.

무거운 마음은 남는다.

행여나 무슨 일이 나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그로부터 일주일 뒤.

김원기는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다.

환자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좀 더 강력하게 입원 권유를 해야 했다며 후회하던 김원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황진화의 말마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정신과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김원기에게 한동안 큰 자책으로 남은 사건이었다.

* * *

‘카이트만의 안경.’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 했다.

[이은희 여/28 인턴 임재호 / R2 천시현]

“정신과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와주신 건 고마운데 오늘은 상처 치료만 하고 가고 싶어요.”

“혹시 최근에 힘든 일이라도…….”

“별로… 없어요. 외래 진료 예약해주세요. 꼭 올게요.”

환자의 말투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딩동!

[system : 환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system : 이은희 환자의 생존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치료 진척도 11/100 생존 확률 42 -> 21%]

“은희야, 그래도 일부러 시간 내서 오셨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해봐.”

중년의 남자가 채근했으나 환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입원을 강력히 권유했으나 환자 거절함. OS(정형외과) 봉합 후 자의 퇴원함.

시스템창에 회귀 전의 김원기가 남긴 기록이 떠올랐다.

그때도 자살사고가 심한 나머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경황이 없으실 것 같은데. 혹시 보호자님만이라도 잠깐 면담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환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제 믿을 건 보호자뿐.

시현은 보호자와 함께 면담실로 향했다.

* * *

잠시 후 면담실.

시현은 ‘세상의 모든 차트’에 입력된 김원기의 기록을 읽으며 면담을 시작했다.

“따님이 최근에 힘든 일을 겪고 있었을까요?”

“은희는 엄마하고 둘이서 살고 있어요. 제가 아빠긴 하지만 아는 게 별로 없네요.”

보호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거… 아니, 이혼한 거나 다름없게 된 지 오래거든요. 평소에 정신과 진료를 보고 있다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 힘들어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일이 있을 때 보호자님을 먼저 찾았다는 건 그만큼 의지하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네…….”

시현의 말에 보호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 큰 혈관이나 인대는 비켜 갔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보호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자해나 자살시도의 경우 입원 치료가 우선입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폐쇄병동 입원이 꼭 필요합니다.”

시현이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상처 치료는 나중에 하더라도 입원은 반드시 해야 하는 환자였다.

“……꼭 그 방법뿐입니까?”

정신과 입원 이야기를 꺼냈을 때 보호자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감옥 같은 분위기의 병동을 상상하기 때문이었다.

“폐쇄병동이라고 해서 환자를 가두고 괴롭히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보호하는 곳에 가깝죠.”

“아무리 그래도…….”

보호자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시면…….’

결과는 불 보듯 훤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저리 거부하는데 어떻게?”

“자살사고가 심하면 본인이 원치 않아도 보호자 동의로 입원 가능합니다.”

시현은 메모지에 입원에 필요한 것들을 적어 보호자에게 건넸다.

“우선 최대한 설득해 보겠습니다만, 혹시 안되면 이것들을 꼭 준비해주십시오. 만일을 대비해서요.”

* * *

보호자 면담을 마치고 환자의 침상으로 가보니 정형외과에서 내려와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환자 파악을 더 해보기로 했다.

‘인물 정보.’

[system : 이은희 환자의 ‘인물 정보’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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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여/28 인턴 임재호 / R2 천시현]

국회의원 강갑수의 비서 / 별정직 공무원 / 전직 기자

칭호 : 알면 알수록 비밀이 많은 취재의 달인

주요 능력치 : 지력 31 덕력 21 체력 28 감각 32 행운 39

특기 : 취재(Lv.9), 선동(Lv.7), 회계(L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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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강갑수?’

중진 의원으로 훗날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에 올라 인사청문회를 거칠 예정인 유명 정치인이었다.

보좌관 갑질 논란부터 자녀 대학 입학 특례까지 잡음이 무척이나 많았던 사람이지만, 어찌어찌 장관이 되긴 했던 것 같다.

‘이러니 환자가 말을 아낄 수밖에.’

국회의원 측근의 자살은 가십거리가 되기 마련.

특히나 강갑수 의원 정도 되는 중진이라면, 스캔들에서 음모론까지 다양한 말들이 오고 갈 것이었다.

아무리 비밀이 보장되는 진료라고 해도, 환자 처지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의원실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있나?’

시현은 스테이션에 앉아 인터넷 기사를 검색했으나 별 내용은 없었다.

최근에 지역구 시민단체 행사에 참석했다는 정도의 홍보성 기사가 전부였다.

‘취재에 선동이라…….’

기자 출신에 국회의원 보좌진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지만, 매우 독특한 특기였다.

“수처 완료! 이제 가서 면담해봐.”

이제 정형외과 2년차가 된 정병수가 금세 봉합을 마치고 시현 옆자리에 앉았다.

“정형외과 입원할 정도는 아니죠?”

“응. 상처는 굉장히 긴데 다행히 인대 손상은 없어. 외래에서 소독하면서 보면 될 것 같아.”

정병수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차라리 정형외과에서라도 받아주면 좋을 텐데.

그의 판단은 전과 같았다.

“정신과 입원 적응증이긴 한데…… 아무래도 그냥 가실 것 같네요.”

“본인이 싫다는데 뭐. 별수 없는 거 아냐?”

그의 말이 맞지만, 퇴실 후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터라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시현은 곧장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 쪽으로 갔다.

“통증은 좀 어떠세요?”

“조금 나은 것 같아요.”

“지금은 안정이 필요합니다. 입원 치료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일단 입원만 하면 기회는 있다.

“회사일 때문에 입원은 안 돼요. 통원 치료로 할게요. 잠을 못 자는데…… 여기서 약 처방은 해주실 수 있나요?”

환자는 업무를 핑계로 입원을 거절했다.

‘회사라면 회사일 수도…….’

공무원 대우라고는 하지만 별정직이라 임기를 보장하지는 않는 회사.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고,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소문이 나쁘게 나면 다른 의원 사무실로 이직할 기회조차 없는 그런 회사.

그렇게 따지면 국회의원 비서실은 근무 여건이 꽤 가혹한 회사였다.

“수면제 처방은 가능합니다. 대신 확실히 해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걸…….”

이은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마포대교는 가지 마세요. 절대로.”

시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 환자가 마포대교에서 투신했대요. 아, 그때 퇴실시키면 안 되는 거였는데.

과거의 김원기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걸 어떻게…….’

이은희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환자들은 자살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수백 수천 번의 고민을 한다.

일주일 내로 마포대교에서 투신할 환자라면 이미 여러 차례 가봤을 가능성이 컸다.

“어휴, 설마요.”

환자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그럴 일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너무 속상한 일이 있어서 홧김에 그만…… 거긴 절대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약속할게요.”

[system : 환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후회는커녕 아직도 죽음에 대한 생각이 확고했다.

‘알아도 못 막는다는 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에 절로 답답함이 몰려왔다.

이럴 때 역시나 믿을 건 정보뿐이었다.

‘카이트만의 안경’과 더불어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비싸서 좀처럼 쓰지 못했던 아이템을 써보기로 했다.

‘인물 관계도… 사용할게.’

[SORA : 잔여 포인트 대비 상당한 지출입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잔여 포인트 – 74,000P]

‘이거 앞으로 1년차들 대신 응급실 당직이라도 서야 하나…….’

지난 일 년간 환자 열심히 보고 포인트도 많이 번 것 같은데, 일도 진짜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남는 게 없다.’

아무리 노련하다고 한들 1년차 업무량을 소화하려면 날마다 각종 포션을 들이켜야 했고,

어려운 환자를 만나면 수시로 ‘카이트만의 안경’과 같은 고가 아이템을 써대는 통에 포인트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인물 관계도’의 가격은 50,000P.

‘카이트만의 안경’ 구독권보다 무려 10배가 비싸다.

그나마 전에는 기간 한정 이벤트로 반값이었는데, 이제는 정가인 5만 포인트를 요구하고 있었다.

SORA가 사용 전 확인 메시지를 띄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속은 쓰리지만, 쓸 땐 써야 한다.

일단 사람 목숨이 달렸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리고 잔여 포인트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보면 진짜 중요한 건 말이지 누ㅈ…….’

[SORA : 정말 감탄했습니다!]

시현의 뭔가 말하려는데 메시지가 떠올랐다.

[SORA : 역시, 사용자님께는 환자의 생명이 가장 우선이었군요!]

‘…….’

누적 포인트가 중요한 거라고 말하려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새로운 기능이나 아이템을 오픈할 때도 시스템은 잔여 포인트가 아닌 지금까지 획득한 총 포인트를 기준으로 삼았다.

당장은 보상이 없을지라도 이 환자를 잘 치료해서 많이 벌면 그만큼 이득이라고 말하려 했으나,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 그래! 당연히 환자가 제일 중요하지!’

[SORA :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SORA : 인물 관계도를 활성화합니다. 50,000P를 사용합니다.]

딩동!

새로운 시스템창과 함께 환자를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이 한 장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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