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Chapter 29. 미리 알 수만 있다면 (5)
* * *
병동 면담실.
“입원 중 외출은 보호자 동반 시에만 가능합니다.”
“온종일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요?”
이은희가 병동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신병적 증상은 없는 환자라 별다른 제한 사항은 없었지만, 자살 위험도가 높은 탓에 외출만큼은 보호자 동반으로 하기로 했다.
“뭐, 상관없어요. 내일부터 출근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살겠네요.”
잠깐이지만 이은희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응급실에서 봤을 때와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업무 스트레스가 심하셨던 모양입니다.”
“자정 전에 퇴근해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요. 의원… 아니, 대표님도 그렇고 선배들도…… 아무튼 까다로운 분들이 많아요.”
이은희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저희 ‘회사’ 분위기가 좀 그래서요.”
“여기선 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은희 님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인물 정보를 통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다.
“저, 꼭 말씀드려야 하나요?”
[system : 환자의 주된 감정은 ‘경계심’입니다.]
뭐지?
나름 편안한 면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건가.’
행여 의원실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질까 걱정하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대신 평소 불편하셨던 점들은 편하게 이야기해주세요.”
면담이 어려울 때는 단기적으로 증상을 줄여주는 것이 좋다.
“자려고 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사무실에선 숨이 답답해서 수시로 밖에 나갔다 오곤 했어요.”
‘불안에 동반되는 신체 증상. 그리고 입면 문제.’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밥이 안 넘어가요. 살도 한 5kg 정도 빠졌죠. 주변에서는 속도 모르고 예뻐졌다고 하는데 참.”
환자는 자신의 증상에 대해 한참 동안 설명했다.
‘주요우울장애 진단기준은 충족하고도 남아.’
우울증의 핵심 증상은 우울한 기분과 매사 흥미의 감소.
그 외에도 식사, 수면, 인지기능 그리고 자살사고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진단을 내린다.
환자의 증상을 살펴보면 우울증의 진단기준 중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 없었다.
“회사에서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드셨나요?”
시현이 물었다.
“저,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내일 면담해도 될까요?”
‘확실히 직장 이야기만 나오면 피하는데.’
본격적인 면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환자가 화제를 돌렸다.
“네, 그렇게 하시죠.”
“이따 회사에서 동료가 면회를 온다고 했는데 잠깐 보는 건 괜찮죠?”
“원내 산책 정도는 괜찮습니다. 보호자 오시면 외출증 작성해주세요.”
‘별다른 소득이… 없어.’
이은희와의 첫 면담은 싱겁게 끝났다.
입원으로 자살 시도만 지연시켰을 뿐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 * *
2시간 뒤.
‘옆에 앉은 사람이 아까 말한 동료인가?’
응급실 노티를 해결하고 병동으로 돌아가는 길.
주차장 건너편 벤치에서 다시 이은희와 마주쳤다.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이은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혹시… 애인?’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대화에 열중한 탓인지 두 사람은 시현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얼른 지나가자.’
혹여 환자가 민망해할까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다음 순간 시스템 알림음이 들렸다.
딩동!
[system : 이은희의 주된 감정은 ‘혐오’입니다.]
‘뭐지?’
세상 달달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혐오라니.
의외의 감정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시현은 이내 결론에 도달했다.
‘원치 않는 관계…… 인가?’
이유야 어쨌든 싫은 감정을 숨기고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여야 할 정도라면 사정은 알만했다.
“이은희 님, 여기 계셨군요.”
다음 순간, 마치 환자를 찾아 돌아다니기라도 한 듯 시현이 말을 건넸다.
“어? 선생님…….”
“혹시 누구?”
남자는 당황했는지 이은희의 손을 재빨리 내려놓고 시현에게 물었다.
“이은희 님 병동 담당의입니다. 검사 예약이 되어 있는데 병동으로 안 돌아오셔서 나와봤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은희 씨도 어서 들어가 보세요.”
갑자기 사무적인 태도로 돌변한 남자는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언뜻 보기에는 아쉬워하는 태도.
딩동!
[system : 이은희의 주된 감정은 ‘안도’입니다.]
하지만 환자는 남자가 떠나는 것을 내심 반기고 있었다.
“검사 예약이 있었나요? 전혀 못 들었는데.”
남자가 저만치 멀어지자 이은희가 시현에게 물었다.
“검사는 없습니다. 불편한 자리 같아 보여서요. 혹시 실례가 됐을까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예의상 물어봤다.
“전혀요. 근데 그렇게 티 났어요? 싫어하는 거?”
이은희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제 눈에는 그리 보였는데 상대 남자분은 전혀 모르시더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원래가 그런 인간이니까.”
“원래 그렇다는 건 어떤?”
“남의 감정에 공감 못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반사회적인 인간들.”
이은희의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방금까지 웃는 낯으로 손을 마주 잡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에게 저런 표현이라니.
연기력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제가 일하는 국회의원 사무실 선임 보좌관이에요. 나쁜 놈이죠.”
‘회사’에 대한 이야기가 환자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
“살아남으려면 자기 오피스 와이프를 해야 한다나. 애 딸린 유부남이…… 염치도 없지.”
이은희가 혀를 찼다.
“굉장히 힘드셨겠네요. 그만두고 싶으셨겠어요.”
“정말로요! 근데 그만두자니 그동안 해온 게 아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환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직장을 그만두지도 못하는 이유를 이야기했다.
“엄마가 또 실망하실 것 같아서요.”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나요?”
“네. 예전에 신문사에 일하다가 그만뒀을 때…… 엄마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여기서 이제 자리를 좀 잡나 했는데 저 인간 때문에 또 그만두면 그 표정을 또 볼 자신이 없어요.”
벤치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도 우울해 보였다.
부모의 부정적인 평가를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환자도 오랜만인 것 같다.
환자모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압박감을 많이 느끼셨겠네요.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이은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딩동!
[system :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인물 관계도’가 확장됩니다.]
새로 추가된 인물들이 창에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이은희의 어머니와 점선으로 연결된 인물이 유독 눈에 띄었다.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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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조태준 남/ 57세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통해 여민주와 알게 된 뒤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더 큰 야망이 있어 결국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여민주가 결혼한 후에도 한동안 내연 관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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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어머니가 사연이 많으신 분이었네…….’
인물 관계도를 쭉 읽어가던 시현은 마지막 문장에서 멈칫했다.
‘맙소사.’
[……현 자유민국당 당대표. 이은희의 생부.]
‘이건… 출생의 비밀?!’
환자도 주변인들도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
회귀물의 주인공에서 지나가는 정신과 의사 1로 전직한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 * *
면담실로 돌아온 시현은 녹색창에서 인물검색을 하고 있었다.
자유민국당 조태준 당대표.
평소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시현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지지율 조사에서 1, 2위를 다투는 차기 유력 대권 후보.
청렴하면서도 유능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사람이다 보니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환자도… 이걸 알까?’
응급실에 환자를 데려온 보호자가 환자의 아버지인 것을 생각해보면,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띠리리리.
면담실 책상에 유선 전화기가 울렸다.
- 선생님, 이은희 환자 보호자들 오셨습니다.
“면담실로 오시라고 하세요.”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보호자들이 들어왔다.
“은희 상태는 어떤가요?”
환자부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우선은 당장 출근을 안 해도 된다고 하니 안정이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압박감이 심했던 모양이에요.”
“은희가 너무 마음이 여려서 그래요. 직장 다니면서 그 정도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시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자모가 따지듯 물었다.
“저는 솔직히 입원 반대였어요. 아직 시집도 안 간 애가 정신과 입원이라뇨. 나중에 커리어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닌지 걱정도 되고…….”
“자살 위험도가 너무 높습니다. 커리어는 나중 문제에요. 죽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시현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보실 수 있겠는데, 진짜 죽으려면 팔에 자해하는 것 정도로 하겠어요? 진짜 그럴 용기가 있으면 그렇게는 안 했지.”
종종 만나는 보호자 유형.
공감 능력이 부족한 탓일까.
아니면 인간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유형일까.
우울감과 자살사고도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였는데, 정신과 의사 입장에서는 고구마가 따로 없었다.
이런 보호자 밑에서 성장한 환자를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그게 되면 누가 우울증에 걸리겠어요…….’
마치 불면증 환자에게 마음 편하게 먹고 잘 자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보호자에게, 할 수만 있다면 회귀 전의 기억을 꺼내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은희가 힘들어하는 거 아니냐고! 애가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데 뭐 커리어? 그게 대수야?”
의외의 사이다가 환자부에게서 나왔다.
‘인물 정보’
[SORA : 인물 정보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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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태 남/52 ]
삼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주요 능력치 : 지력 35 덕력 55 체력 45 감각 30 행운 25
특기 : 시사평론(Lv.8), 국제정치(Lv.7), 육아(Lv.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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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에 육아…….’
자신이 생부가 아닌 것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환자모에 비해 훨씬 더 지지적인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따로 면담해도 되겠습니까?”
보호자 면담을 마친 뒤 시현이 물었다.
“저요? 왜 저만 따로…….”
“당신이 자꾸 커리어 타령이나 하니까 그렇지. 선생님이 잘 이야기 좀 해주세요. 딱한 사람 같으니라고.”
환자부가 면담실을 나간 뒤, 시현은 환자모와 면담을 시작했다.
* * *
“……그러니까, 이은희 씨가 나중에 정치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러려고 유력 정치인 밑에서 비서 경력도 쌓는 거고요.”
“그렇죠. 부모 마음은 다 같은 거 아닌가요? 혼자서 어렵게 키운 아이예요. 은희가 잘되는 게 저한테는 제일 중요합니다.”
“따님 말을 들어보니 지금 사무실은 분위기도 안 좋고 너무 가혹한 환경이던데. 꼭 지금 자리여야만 하나요? 정말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
환자모가 즉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어머니께서 좀 도와주시지요. 학생운동부터 시작해서 시민단체 활동도 오래 하셨고 인맥은 충분하실 텐데요. 어쩌면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이 하나쯤 있으실 수도 있고요.”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
시현의 말에 환자모는 순간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