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Chapter 29. 미리 알 수만 있다면 (6)
“……어쩌면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이 하나쯤 있으실 수도 있고요.”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
시현의 말에 환자모는 순간 움찔했다.
“그분께 한 번 부탁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환자모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태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테지.’
보좌관 임명권은 전적으로 의원 개인에게 있다. 차기 유력 대권 후보가 부탁하는데,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조태준이 자신의 혼외자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환자모가 부탁만 한다면, 다른 정치인 밑에서 비서로 고용될 기회 정도는 언제든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자모의 고민이 깊어졌다.
‘은희가 말했을까? 그럴 리는 없는데.’
이 젊은 정신과 의사는 꼭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생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동안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왔다.
당연히 남편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병원에서 최대한 치료하겠지만, 주변 환경 요인도 중요합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 나빠질 거예요.”
“그건 결국 은희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극복을 못 한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실망감을 표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요.”
시현이 궁금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왜 환자모는 딸에게, 정확히는 딸의 성취에 집착하는가.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나 자식의 성취가 중요하다는 사람이 왜 생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저는 보호자님 마음이 궁금합니다. 딸이 잘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서, 막상 도움을 청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네요. 충분히 가능하실 텐데요.”
환자의 직장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가족으로부터 받는 압박감은 줄여야 했다.
어떤 면에서는 환자보다 보호자와의 가족 면담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당신이 도대체 뭘 안다고…….”
환자모가 발끈했으나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둘 중에 하나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따님에 대한 기대를 조금 내려놓으시던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환자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청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을 떠난 옛 연인에게 뭔가 부탁한다는 것을 그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못하는 건 혹시 자존심 때문인가요?”
“그건…….”
환자모는 잠시 고개를 숙였고,
자신에게 딸의 성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호자님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따님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하나뿐인 딸인데…….”
“저 역시 그렇습니다. 의사에게는 환자의 생존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시현은 언젠가 시스템 관리자, 강성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다시 1년차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회귀 전에는 허무하게 죽음을 선택한 환자였기에, 이번에는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라면 뭐든 말씀해주세요. 면담내용에 대해서는 비밀을 보장하겠습니다.”
그 말에 환자모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딩동!
[system : 새로운 스킬이 생성됩니다.]
[system : 스킬 ‘뭐가 문제야 say something’을 사용했습니다.]
다음 순간, 환자모의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스킬? 이게 무슨……?’
[SORA : 사용자가 면담을 통해 보호자의 불안을 낮추고 표현을 격려하였습니다.]
[스킬 시스템 - 임상 면담 기법이 스킬의 형태로 시전됩니다. 반복 사용 시 숙련도가 올라갑니다.]
얼마 전 시스템 업그레이드 키트를 사용했을 때 본 문구가 뒤늦게 생각났다.
‘아, 그래서…….’
[SORA : 스킬 설명서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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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문제야 say something (액티브 스킬)]
- 방어적인 환자의 표현을 촉진합니다.
- 치료적 관계를 형성하면 자동 활성화됩니다.
-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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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는 진단에 필요한 정보 대부분을 환자의 말에서 얻기 때문에 시현에게 특히나 유용한 스킬이었다.
“선생님, 비밀 지켜주실 수 있죠?”
스킬 효과 탓이었을까.
한참을 망설이던 보호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까 본 남편…… 사실 은희 생부가 아니에요.”
“…….”
순간 면담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인물 관계도’를 통해 미리 알고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남편분도 알고 계신가요? 환자는요?”
“모를 거예요. 아마도.”
보호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혼 전에 오래 만나던 사람이 있었어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결혼 후에도 그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 못 했고요.”
보호자는 조태준의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야망이 큰 사람이었죠. 대학 신입생일 때 처음 만났는데요…….”
“아, 그러셨군요.”
“선배들 가운데서도 군계일학이었다고 할까요? 저희 동기 중에 그 사람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결국 저하고…….”
‘이건 회상신인가…….’
다소 지루한 이야기였지만, 왠지 흐름을 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된 줄 알아요? 당시에 가장 잘나가던 국회의원 보좌관부터 시작해서 최연소로 지역구 의원에…….”
“…….”
‘조태준 의원인 거 다 아니까…… 이제 환자 어떻게 살려놓을 건지 상의하자고요.’
한 번 자기 이야기에 빠지면 심취하는 스타일인 듯했다.
“……그런 사람인 줄 진작 알았는데 못 끊어낸 제 잘못이죠. 뭐라고 변명을 하겠어요.”
보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누가 환자고 누가 보호자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조태준은 생각보다 훨씬 출세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좋게 포장해서 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속된 말로 ‘나쁜 남자’ 스타일이었다.
연애 내내 환자모와 교제 중인 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했었고, 결국 결혼은 자신의 뒷배가 되어줄 집안의 외동딸과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조태준은 결혼 생활에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환자모를 찾아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나갔다고 했다.
이은희를 낳고 난 뒤로도 그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도리어 남편과 시댁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어 있었다.
듣다 보니 부부 클리닉 ‘사랑과 투쟁’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이야기 같았다.
“저…… 보호자님?”
시현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 제 이야기만 너무 많이 했네요.”
“그래서 그분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나요?”
묵묵히 듣고 있던 시현이 물었다.
물론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보호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뭐, 그 뒤로 승승장구해서 지금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됐죠.”
“그럼 그분 통해서 강갑수 의원에게 잘 부탁한다고 귀띔이라도 해두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최소한 환자분이 폭언에 시달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시현이 하고 싶었던 말에 도달했다.
조태준의 입장에서, 환자모의 말은 부탁보다 협박에 가깝다.
그는 이은희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릴 것이고 웬만한 요구는 다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왜 접촉조차 하지 않았을까?’
여전히 의문인 부분이었다.
당신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존심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조태준에게 마음의 빚을 갚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그 사람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 혹시라도 이런 관계가 알려지면 타격이 클 거예요.”
[system : 보호자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찐사랑이다.’
의외의 대답.
조태준에 대한 감정에서 분노나 원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불륜이기는 했으나 지순한 쪽에 가까웠다.
“따님보다…… 생부를 더 배려하고 계신 것 같네요.”
시현이 지적에 보호자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은희가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데. 참, 제가 그런 걸 따지고 있었네요.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그건 따님과 상의해서 진행하시죠. 뭘 바라는지 아직 모르시지 않습니까?”
“아, 제가 또…….”
보호자가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다면 첫 면담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딸의 성취만큼이나 중요한 게 자신의 감정이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시작이 반 - 초진 면담에서 치료 진척도가 큰 폭으로 증가 되었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이은희 환자 차트 띄워줘.’
[SORA : 차트를 출력합니다.]
[치료 진척도 24 -> 49/100 퇴원까지 3일 2시간 10분 59초]
‘일이 잘 풀릴 모양이네…….’
치료 진척도도 많이 올랐고 며칠 내로 퇴원하게 된다는 것도 좋은 소식이었다.
* * *
다음날 병동.
“선생님, 아까 오전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알아요?”
오후 회진이 끝나자 이은희가 시현을 따로 찾아와 말을 걸었다.
“누가 문병을 오셨던가요?”
“의원님이 보좌관 두 명 데리고 직접 오셨어요. 당사자한테 사과도 받았고요.”
“그러셨군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
환자모가 조태준에게 뭔가 이야기해둔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잘됐네요. 지금만 같으면 의원실에서 계속 일할 수 있으시겠어.”
“어쩌면요? 일주일간 휴가도 주셨는데 빨리 퇴원해서 좀 쉬고 싶네요.”
이은희는 약간 들떠 보였다.
며칠 전 자살 시도로 응급실을 방문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리고 엄마가 정 힘들면 그만두래요. 먹고 살면 됐지 그렇게까지 힘들게 할 필요 있냐고.”
“아, 그러셨군요.”
“우리 엄마가 그렇게 쿨한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니까요? 어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환자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으나 시현은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보호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혼자서 어렵게 키운 딸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죽어갈 동안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을 원망했을 것이고,
평생을 우울과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시현의 시야에 병동 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느 평범한 모녀와 다르지 않은 모습.
과거에는 존재할 수 없는 장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