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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128화 (128/195)

128화 Chapter 29. 미리 알 수만 있다면 (7)

* * *

며칠 뒤 아침 회진.

“901호 이영란 환자, 우울한 기분 및 자살사고 호전되어 오늘 퇴원 예정입니다.”

“퇴원 후에는 어디로 갈 계획인가?”

시현의 보고에 진철영이 물었다.

“남편과 함께 있는 걸 힘들어해서 일단은 아들 집으로 가실 예정이고 다음 주 외래 진료 예정입니다.”

“그래, 증상이 빨리 호전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건가?”

“타목시펜을 복용하면서 안면 홍조와 두근거림 등 증상이 심했는데, 항우울제 복용 후 증상 호전되고 식사량 증가하였습니다.”

타목시펜은 유방암 치료에 핵심적인 약물이었지만, 여성호르몬을 억제하는 특성 때문에 갱년기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다.

이런 환자들에게는 유방암 때문에 여성호르몬을 투여할 수는 없으니, 항우울제로 갱년기 증상을 완화하는 것이 좋은 치료가 된다.

“알겠다. 외래에서 이어서 보도록 하지.”

진철영은 시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901호 이은희 환자도 증상 호전되고 환자와 보호자 모두 퇴원 원하여 오늘 퇴원 예정입니다.”

“애썼다. 이 환자도 생각보다 빨리 가네.”

자살사고가 심해 입원했던 환자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 퇴원하게 되었다.

이어진 다음 환자 보고에도 진철영은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보호자 하고도 이야기 좀 해봤나? 면담 때 무슨 이야기 하던가?”

“최근 스트레스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고 자살 위험도가 높으니 당분간 잘 지켜보자는 쪽으로 면담했습니다.”

진철영은 먼저 환자보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것만으로 설명이 될까?”

뭔가 흥미롭다는 반응이었다.

“별다른 것 없었습니다. 평소에 힘들었던 점 환기(Ventilation, 감정적인 문제들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하도록 하고 보호자 면담한 것 밖에는요.”

- 일단 출생의 비밀을 알아낸 뒤 모종의 루트로 국회의원을 압박해서 근무 여건을 개선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시현은 애써 태연한 척 보고를 이어갔다.

“그런가… 뭔가 이상한데…….”

진철영의 얼굴에 아주 잠깐 묘한 표정이 스쳤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분명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레지던트가 말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보호자 중에서 엄마가 수상하던데. 환자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 같으니까 잘 살펴봐야 해.”

“네, 교수님.”

“예정대로 퇴원하고 외래에서 보도록 하지.”

과거에도 느꼈지만, 진철영의 직관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환자모가 비밀을 지켜달라고 요청한 부분을 일부러 보고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 * *

“선생님, 감사합니다! 엄마가 이 정도까지 힘들어할 줄은 모르고…… 퇴원 전에 선생님 안 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영란 환자의 퇴원 수속을 위해 방문한 환자의 아들이 말했다.

“빨리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댁에 가셔서도 당분간은 잘 보셔야 합니다. 우울 증상이라는 게 좋아지다가도 다시 악화될 수 있습니다.”

“그럼요. 누나랑 번갈아 가면서 엄마 옆에 딱 붙어있으려고요.”

다소 빠른 감이 없지 않았지만, 자녀들이 옆에서 돌봐준다면 일단은 안심이었다.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기분이 바뀔 수도 있네요. 입원하기 전에는 너무 심란했는데 말이죠.”

같은 병실을 쓰고 있던 이은희 환자가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는지 보호자 오는 시간에 맞춰 벌써 옷을 다 갈아입었다.

“살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생각이라고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 그 시기만 잘 넘기면 또 기회를 얻는 거고요.”

“그런데 선생님은 제가 마포대교 가본 거 어떻게 아셨어요? 그때 진짜 소름이었는데.”

“네? 제가 어떻게 그걸 알았겠어요? 일종의 은유죠.”

그도 그럴 것이, 마포대교는 여러 한강 다리들 가운데 투신자살 1위 장소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아… 그런 거였어요? 에이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싱거운 농담도 건네는 걸 보니 기분이 정말 나아진 것 같았다.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버텼는지 참…….”

“잘하실 겁니다. 응원할게요.”

“잘 안 풀릴 때 사표 쓸 용기를 응원해주세요. 이제는 하는 데까지만 하고 아니다 싶으면 나오려고요. 뭘 해도 지금보다는 낫겠죠.”

이번 일을 겪으며 깨달은 것이 있었는지, 환자의 말투에 자신감이 넘쳤다.

“선생님 수고 많았어요. 이제는 밥도 잘 먹고 열이 안 올라오니까 살겠어요.”

이영란 환자는 아들의 손을 잡고 병동을 나섰고.

“그동안 고마웠어요. 다음에 외래에서 만나요!”

이은희도 잠시 후 도착한 환자모와 팔짱을 끼고 시현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부디 잘 지내시기를…….’

폐쇄병동 입구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시현은 두 환자를 바라보았다.

과거 이 시점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인지 다른 환자들이 퇴원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 * *

2주 뒤, 외래 진료실.

“이제야 가슴 답답하던 게 좀 내려가네요. 잠도 잘 자고요!”

“지난번에 바꾼 약물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system : 김선진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system : 500P를 획득하였습니다.]

“ADHD 치료 시작하고 세상이 달라 보였어요! 그동안 안 맞았던 초점이 좀 잡히는 느낌이랄까…… 확실히 집중이 잘 되더라고요! 이번에 지방직 시험도 잘 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결과가 좋으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면접에도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system : 최수민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system : 500P를 획득하였습니다.]

시현의 외래 진료실이 열린 지도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났다.

초반에는 2년차도 되기 전에 외래를 시작하는 데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진료 건수는 날로 늘어갔고 환자 만족도도 높은 편이었다.

“우울증 신약 임상에 참여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같이 공시 준비하던 친구 소개로 왔는데요.”

“ADHD 커뮤니티에서 여길 추천해서…….”

불과 몇 달 만에 정신과 외래에 없어서는 안 될 진료실로 자리를 잡았다.

똑똑.

점심시간을 앞두고 환자가 끊기자 누군가 시현의 진료실로 들어왔다.

“아, 치프 선생님.”

“와, 반나절에 30명 본 거야? 교수님 외래라고 해도 믿겠다. 왜 이렇게 바빠?”

4년차 권원주가 감탄하며 말했다.

“교수님 외래 대기가 길다 보니 중간에 레지던트 외래로 돌려서 Repeat(재처방) 원하시는 분들이 좀 있었습니다.”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천시현 교수님’ 외래도 대기 만만치 않아.”

권원주가 놀리듯 말했다.

몇몇 환자들이 시현을 레지던트가 아닌 교수로 알고 있다는 말과 함께.

“저, 그런데 어떤 일로……?”

“전문의 시험 준비하면서 정신치료 쪽으로 따로 공부하고 있는데, 이참에 정식으로 이석무 선생님께 정신분석을 받아볼까 해. 혹시 시현이도 관심 있나 해서.”

정신분석(Psychoanalysis).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처음 시작한 치료법으로 정신분석가와의 대화를 통하여 마음을 이해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다.

정신과 레지던트의 경우, 별다른 증상이 없어도 교육을 목적으로 정신분석을 받기도 한다.

이석무 교수라면 국내에 딱 5명만 존재하는 국제정신분석가 중 한 명.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정신과 의사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가겠다는 뜻이었다.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원래는 없었는데…… 뭔가 새롭고 깊이 있는 분야를 공부해보고 싶어서.”

권원주를 오래 봐왔음에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system : 정신과 치프 권원주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인물 정보.’

[SORA : 레지던트 권원주의 인물 정보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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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주 여/29 삼아대병원 정신과 레지던트 4년차]

삼아대병원 정신과 치프

칭호 : 삼아대병원 정신과의 기대주

주요 능력치 : 지력 65 덕력 55 체력 59 감각 69 행운 52

특기 : 문예 창작(Lv.9) 요리(Lv.7) 킥복싱(Lv.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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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치 합이 이래도 돼?’

지금까지 본 사람들의 능력치 합은 대체로 200 내외.

권원주는 이를 크게 상회하고 있을뿐더러 특기 구성도 다양했다.

의과대학 시절부터 따지면 시현이 만난 의사들만 해도 수백 명은 족히 넘을 것인데, 환자 진료로 보나 연구 실적으로 보나 권원주는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편에 속했다.

그녀가 지금 쓰고 있는 논문만 하더라도 내년에 탑티어 국외 학술지에 실리게 될 예정이기도 하고.

‘선생님 축캐(축복 받은 캐릭터)셨군요…….’

하마터면 육성으로 뱉을 뻔했다.

시현은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권원주를 바라보았다.

타고난 것인지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을 잘하고 교수님들의 신임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정신분석 분야에 관심이 없더라도……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해야 환자도 잘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시간이 상당히 걸리니까 2년차 때부터 준비하면 어떨까?”

스스로에 대한 이해.

정신과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

“네. 감사합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외래를 일찍 시작하게 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전에는 없던 조언이었다.

똑똑.

“천시현 선생님, 환자분이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권원주와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외래 간호사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오늘 예약 환자는 다 본 것 같은데요?”

“진료는 교수님한테 받고 나오셨는데,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나 봐요…… 그냥 잠깐만 보고 간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 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진료 후 다른 용무라는 게 뭘까 궁금해질 무렵.

익숙한 실루엣이 진료실 문을 빼꼼 열고 시현을 들여다보았다.

“아, 김영화 님!”

시현이 진료실 문을 마저 열며 환자를 반겼다.

“잘 지내셨어요?”

“네! 선생님 덕분에요! 요즘에는 일주일에 한 번 병원에 오고 있어요.”

환자는 퇴원 후에도 주기적으로 외래에 방문해서 TMS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증상 악화 없이 잘 유지가 되고 있었다.

“벌써 임신 중반에 접어들었네요. 예정일이 11월 초였던가요?”

“네! 맞아요. 선생님은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환자가 놀랍다는 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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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여/36 담당 교수 Prof. 정세일]

치료 진척도 99/100

상태 – 임신부

출산 예정일 –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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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다른 불편한 점은 없으시고요?”

“네,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인사드리러 왔어요!”

“이거 병동 선생님들하고 나눠 드세요.”

환자의 옆에 서 있던 보호자가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건넸다.

“아… 무거우셨을 텐데…….”

“무겁긴요! 병동에 있을 때 간호사님들도 너무 잘해주셨는데…… 경황이 없어서 그냥 나왔네요.”

더는 우울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환자.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세상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

거기에 곧 세상에 나올 아기까지.

화목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병동 식구들하고 잘 먹을게요. 두 분…… 그리고 아이도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빌겠습니다.”

시현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꾸벅 인사하자 새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 : 세상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 난이도, 보상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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