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30화 (130/195)

130화 Chapter 30. 새로운 연구 (2)

‘와…… 아무리 원장단이라도 이건 못 참지. 이걸 가만두면 내가 사람이…….’

“심.소.현 선생님.”

시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심소현을 불렀다.

“네?”

“이 환자, 흉통이 주증상인데! 도대체 우선 순위를…….”

어리둥절한 표정의 심소현을 향해 시현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심소현 선생, 그 환자는 내과 바로 호출하세요. 심전도에서 Acute MI(급성심근경색) 의심된다고.”

누군가 다가와 심소현에게 말했다.

“아, 넵. 알겠습니다!”

‘조광필 교수님…….’

시현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천 선생, 고생이 많지?”

“아, 아닙니다.”

“잠깐 시간 되나?”

“네. 무슨 일이십니까?”

“다른 건 아니고 우리 과에서 실험을 하나 하고 있는데, 좀 도와달라고. 거기 환자 다 본 선생님들도 따라오고.”

* * *

조광필을 따라 들어간 응급의학과 회의실 테이블에는 기도삽관(호흡 곤란이 있는 환자들의 기도에 관을 삽입하는 술기) 훈련용 모형들이 여럿 놓여있었다.

“자, 여기 있는 모형들에 기도삽관을 하면 돼. 시간을 잴 테니까 최대한 빠르게들 하도록 하고.”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시현과 몇몇 레지던트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후두경을 쥐고 모형의 혀를 젖혀 기도를 확인했다.

‘별로 어렵지 않네.’

학생 때 이후론 거의 처음 잡아보는 후두경이었으나 그리 어렵지 않게 기도삽관에 성공했다.

“그래. 아주 신속하게 잘했어. 다음은 이 모형에 한 번 해봐.”

조광필이 이번에는 새로운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교수님.”

자신감이 붙은 시현은 다시 자세를 잡고 모형의 입안으로 후두경을 넣었다.

‘이거 왜 이렇게 뻣뻣해?’

전처럼 쉽게 성공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아무리 힘을 써도 기도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거린 후에야 간신히 기도삽관에 성공할 수 있었다.

“3분이 넘게 걸렸군…….”

“후우. 목도 짧고 공간이 좁아서 쉽지 않네요.”

시현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산소공급이 그 시간 동안 안 되었으면 뇌손상도 있었을 거야. 그렇지?”

“네. 실전이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모형이라서 이 정도였지 진짜 사람이었으면 애타는 마음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을 터였다.

“고생했어. 그래도 이 모형에서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야.”

조광필은 웃으며 시현에게 다른 후두경을 건넸다.

“이번에는 그걸 써서 다시 해봐.”

“이건…….”

일반적인 후두경과 달리, 작은 모니터가 달린 플라스틱 재질의 후두경이었다.

“비디오 후두경이야. 아까 삽관이 어려웠던 모형부터 다시 해봐.”

간단한 사용 설명을 들은 뒤 비디오 후두경을 작동시켰다.

모형의 입안에 후두경의 블레이드를 밀어 넣은 것만으로도 기도 입구가 선명하게 모였다.

“이거 훨씬 수월한데요?”

기도삽관 하느라 진땀을 흘렸던 것에 무색하게 이번에는 손쉽게 성공했다.

‘역시 템빨이다…….’

시현이 감탄하는 사이 조광필이 말했다.

“이번에 보건복지부 국책사업으로 예산이 내려오는데, 이 비디오 후두경을 전 병동에 보급해볼까 해. 간혹 기도 확보가 어려운 환자가 있으면 마취과 의사까지 부르는 경우도 있거든.”

응급 상황인데 기도 확보가 어렵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지경인데 확실히 비디오 후두경이 있으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 선생도 혹시 다른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언제든 건의하도록 해.”

“네, 센터장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심소현 선생은 내가 잘 타이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레지던트 때는 그저 환자 열심히 보고 좋은 주제 찾아서 연구하는 게 제일 아닐까 싶어. 그쪽으로 더 신경 써주면 좋겠어.”

“감사합니다.”

시현이 원장단의 눈 밖에 나지 않고 레지던트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그의 배려였다.

“응급실과 관련된 임상 연구도 좋고. 허주현 의원이 보건복지위 쪽에 잘 얘기해둬서 그런지 이번에는 예산이 좀 남을 것 같아.”

‘저런 모습은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응급의료센터와 넉넉한 예산.

뭔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이었지만.

회귀 전과 달리 어깨에 힘이 들어간 조광필의 모습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잠깐만, 예산이 남는다고?’

다음 순간, 최근에 받았던 퀘스트가 시현의 뇌리를 스쳤다.

* * *

며칠 뒤, 응급의료센터 회의실.

“어서들 오게.”

시현과 채이진이 조광필을 찾았다.

“그래, 무슨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응급실에 방문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예후와 생존 여부를 예측할 수 있는 AI 예측 모델을 만들고 싶습니다.”

채이진이 연구 계획서를 내밀며 말했다.

“사망 예측 모델이라…… 확실히 돈 되는 연구는 아니라 연구비 따기는 만만치 않겠군.”

조광필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AI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의무기록을 입력한 뒤, 최종적으로 환자가 생존했는지 사망했는지에 대한 결괏값을 반복적으로 학습시켜야 한다.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까지.

많은 환자 데이터가 들어갈수록 더욱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과적으로는 심정지나 급성심근경색 환자들에게 적용해볼 생각입니다. 사망 가능성이 크게 평가된 환자들에게 초기부터 적극적인 치료를 시작한다면, 생존율을 높일 수 있을 거예요.”

“확실히 그렇겠지. 초기부터 에크모를 시작할지 판단할 수도 있겠군. 수술이나 처치 방법을 결정하는 데도 유용할 것 같고.”

“네. 결정적 순간에 의사결정에 도움을 줄 겁니다.”

“그런데 천 선생이 같이 온 건…… 이 모델을 정신과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건가?”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던 조광필이 이번에는 시현에게 물었다.

“네, 동일 모델을 정신과 환자들에게 적용하면 자살 위험도를 예측할 수 있을 테니까요.”

시현이 다른 외부 일에 눈 돌리지 않고 의사 본연의 업무인 진료와 연구에만 관심을 쏟는 것.

그것은 조광필 또한 반길만한 일이었다.

“참 좋은 생각이군.”

고위험 환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입원을 권하고, 그게 여의치 않더라도 보호자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심장 혈관이 막혀 응급실을 찾은 환자의 예후.

자살 시도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의 자살 위험도.

주제는 다르지만, 이미 알려진 정보들을 입력해서 미래를 예측한다는 면에서는 일맥상통했다.

“아무래도 많은 데이터를 다뤄야 하니 동시에 진행하기는 어려울 거야. 내 생각에는 자살 예방 쪽을 먼저 시도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조광필이 시현을 보며 말했다.

“사실 이런 국책사업은 사회적으로 좀 더 이슈가 되는 주제를 선호하기 마련이거든. 우리나라 자살률이야 몇 년째 OECD 1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으니……. 예산 신청할 때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겠지.”

‘이건 좀 미안한데…….’

채이진이 계획했던 연구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조광필은 정신과 쪽 연구를 더 좋게 보는 것 같았다.

“저는 괜찮아요. 일단 자살 위험도 쪽 연구를 먼저 하고 나중에 내과 중환자 쪽으로 확장해도 되니까요. 연구 방법이야 비슷할 것 같고…… 이번 건 제가 힘껏 도울게요. 나중에 선생님도 도와주세요.”

채이진이 괘념치 말라는 듯 말했다.

“물론이죠. 그런데 AI 모델을 만들려면 프로그래밍에 능한 사람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빅데이터를 다뤄야 할 수도 있어서 통계 전문가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외주를 주는 방법도 있어요. 그건 제가 따로 알아볼게요. 병원 내에 있는 의학 통계 지원실 인력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요.”

개발자 인맥이라도 있는 것인지.

채이진의 말에 시현이 의아해하던 찰나.

딩동!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system : 퀘스트 ‘나는 연구자다(자살 예방 편)’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지난번에 미처 수락하지 못했던 퀘스트였다.

‘당연히 해야지.’

AI 모델 없이도 이미 환자의 생존 확률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런 연구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세상의 모든 차트’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없는 정보였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는, 오직 시현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

반면 AI 모델이 계산한 위험도는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동료 의료인들을 설득하는 데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아직 임상 경험이 부족한 당직 레지던트 자살 가능성이 크다고 구두로 경고하는 것과 삼아대병원에서 자체 개발한 시스템이 자살 고위험군으로 판정했다고 하는 것의 차이는 크지 않겠는가.

연구비 문제는 조광필이 도와주기로 했고, 채이진이 돕는다면 연구는 그리 힘들지 않을 터였다.

시현이 곧장 Y를 누르려는데.

딩동!

[system : 퀘스트 목록에 동시 진행이 불가능한 퀘스트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동시 진행? 그게 무슨……?’

[SORA : 퀘스트 ‘나는 연구자다’는 자살 예방과 정신 약물 분야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버려야 한다는 건가?’

외래와 병동 진료 그리고 각종 발표와 논문 작성까지.

할 일이 많은데 연구 두 개를 동시에 진행하기란 시현에게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 * *

다음날. 정신과 병동 회의실.

정세일과 김석용 그리고 시현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사회불안장애 환자에서 BDNF 유전자 다형성 연구는…….”

“SPN-1001은 비강 내 분무 형태로 투여할 계획이고 피험자 모집은…….”

진행 중인 연구 진척 상황을 점검하는 자리.

보통은 연구 담당 김석용과 정세일 둘만 따로 이야기하곤 했으나, 새로 시작하는 SPN-1001 연구는 시현이 준비해온 만큼 얼마 전부터 세 사람이 모이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순조로운 것 같고. 하반기에 새로 시작할 연구는 뭐가 좋을까?”

정세일이 물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구 실적을 내는데 열심인 그였다.

“응급의료센터 그리고 순환기내과와 함께 중환자 예측용 AI 모델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시현이 기다렸다는 듯 아이디어를 냈다.

“중환자라면…… 우리 과와는 접점이?”

“동일 모델을 우리 과 실정에 맞춰 변수를 바꾸면 자살 예측 모델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응급의료센터 조광필 교수님, 내과 채이진 선생과도 의논해본 내용입니다.”

시현의 말에 정세일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무슨 레지던트 2년차가…….’

펠로우 2년차에게도 쉽지 않을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까지 진행하기에는 너무 무리 아닌가? 지금 외래에 병동에 종종 응급실 당직도 서잖아? SPN-1001 연구도 버거울 텐데…….”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하루 24시간이라는 물리적인 한계는 있는 법.

정세일이 걱정스레 물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둘을 동시에 진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시현이 그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으니 결국 선택이 필요할 거야. 천 선생은 어느 쪽을 더 해보고 싶나?”

정세일이 물었다.

애초에 시현이 제안한 연구들이니 선택권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훨씬 유력한 건 SPN-1001쪽이니 천 선생이 담당하도록 하고 AI 모델 연구는 후배들에게 넘기는 것이…….’

묻기는 했으나, 내심 시현이 약물 연구 쪽을 선택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동안 공들인 것도 있었고, 경제적인 부분으로 보나 연구자로서의 경력으로 보나 SPN-1001이 나은 선택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어진 시현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저는 자살 위험도 예측용 AI 모델 연구를 맡아서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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