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Chapter 30. 새로운 연구 (3)
“저는 자살 위험도 예측용 AI 모델 연구를 맡아서 해보고 싶습니다.”
‘약물 연구를 하지 않겠다고?’
시현의 말에 정세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AI 연구가 SPN-1001 연구를 포기할 만큼 가치 있는 연구였던가.
‘그럼 여러모로 손해일 텐데…… 어째서?’
약물 연구는 리서치 센터에서 수당도 나오고 성과를 내면 연구자로 취업할 기회도 얻을 수 있지만, 자살 예측 모델 연구의 경우 경제적 보상이 없다시피 했다.
잘하면 논문 한두 편 정도는 나올 수 있겠으나 연구를 통한 보상도 불분명했고 그렇다고 연구 수행이 더 쉬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미 개발된 약물인 SPN-1001은 환자에게 투여 후 효과를 판정하면 되지만, 자살 예측 모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점을 찾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천 선생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왜 굳이 그 연구를? 이유라도 좀 들어보자.”
“환자들이 때로는 거짓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시현이 대답했다.
“환자들이…… 거짓말을?”
“네. 대부분 질병은 그 병세가 심할수록 더 일찍 병원을 찾지만, 자살사고만은 정반대입니다.”
시현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회귀 전, 바로 눈앞에서 놓쳐버린 환자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나이도 성별도 처한 상황들도 각기 달랐지만,
병원을 떠나며 했던 말들은 대체로 비슷했던 것 같다.
- 이제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다음 진료 때 봐요…….
웃으며 떠난 그들이 다음 진료 예약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고.
몇 주 혹은 몇 달이 지나 보호자들이 보험 회사 제출용 소견서와 그간의 의무기록 사본을 요청했을 때는 뒤늦은 후회가 온몸을 옥죄어왔다.
“환자들은 어떻게든 병원을 벗어나려 하는데, 응급실과 외래 진료를 담당하는 레지던트들의 판단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보완하고 싶다는 건가?”
후우.
시현의 대답에 정세일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 환자를 놓쳐본 경험은 없을 텐데…….’
하지만 방금 했던 말은 그런 경험 없이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말이었다.
“꼭 레지던트들만 그런 건 아니지…….”
정세일 또한 오래 잊고 지냈던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정신과 의사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응급실 진료를 주로 담당하는 건 주로 1, 2년차 레지던트인데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시기입니다. 조금 익숙해질 때 즈음이면 신규 레지던트가 들어오고요. 하지만 AI 모델은 끊임없이 학습하며 계속 성장합니다. 거기서 약간의 힌트라도 얻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시현이 그동안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모든 차트’가 환자의 생존 확률을 실시간으로 알려준 덕분이었다.
얼마만큼 구현해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극히 일부분만이라도 흉내 낼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연구를 제쳐놓고라도 도전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래. 천시현 선생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정세일이 그제야 시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기존 SPN-1001 연구는 김석용 선생님께 부탁드릴까 합니다.”
시현이 김석용을 향해 말했다.
“나, 나한테? 나야 고맙긴 한데. 괜찮겠어?”
김석용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돌연 좋은 기회를 넘겨받게 되어 반가우면서도 의외라는 생각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히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럴 리가.
전문의 취득 후 펠로우, 그리고 교수 임용까지 생각하는 김석용에게 연구 활동은 좋은 커리어였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기에 김석용에게 부탁한 것이었지만, 시현은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히려 좋아! 열심히 해서 꼭 성과 낼게.”
딩동!
[system : 퀘스트 ‘나는 연구자다(정신 약물 편)’이 반환되었습니다.]
[system : 퀘스트 ‘나는 연구자다(자살 예방 편)’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수락.
이번에는 특별한 경고 메시지 없이 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 * *
며칠 뒤 원장실.
“진철영 교수님 오셨습니다.”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아, 이번에 선물로 들어온 차 두 잔 준비해줘요.”
비서의 말에 원일웅은 서류를 내려놓고 진철영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원일웅의 환대에도 진철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가 이광섭 과장님한테 병동 이전 제안 드린 것 알고 계시지요?”
“네. 행정부 이전하고 나가면 17층 공간 내주시기로 하셨다고…….”
“맞습니다. 좋은 기회 아닙니까? 진 교수님이 좀 설득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이 과장님이 왜 거절을 하시는 건지…….”
“그거라면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폐쇄병동에서 수행하는 연구 때문에 진료 공백이 생기면 안 될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고요.”
“네. 압니다. 당연히 연구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결국 병원은 진료가 우선 아닙니까?”
‘진료가 우선이라니…….’
그렇게 진료가 중요하면 애초에 폐쇄병동을 없앤다는 말을 하지 말던가.
원일웅의 말에 진철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병동 공간을 늘려주겠다고 하는데도 저리 답답하게 나오니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공사를 동시에 할 수도 없고…… 진료 공간을 재배치하다 보면 잠깐 진료 차질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원장님 뜻은 이해합니다만, 제게 말씀하셔도 소용없는 거 아시잖습니까? 제가 과장도 아니고, 결정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진 교수께서 원하신다면, 당장 다음 학기부터 과장 발령 내드리지요.”
“지금… 저한테 과장 자리 줄 테니 원장님 뜻대로 움직여달라, 그 말입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텐데요. 뭐, 나중에 이광섭 과장 보기가 껄끄러울 것 같으면 분원으로 보내도록 하죠.”
‘이 정도면 거절할 리가…….’
원일웅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광섭은 진철영의 정신과 의국 1년 선배였다.
비슷한 시기에 정신과 교원으로 임용되었지만, 이광섭이 과장직을 맡는 동안 진철영은 주요 보직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불과 1년 차이인데, 지금껏 아무런 직위 없이 지내온 것에 대한 불만이 분명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광섭 대신 진철영을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좀 알겠습니다.”
진철영이 원일웅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해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그대로 진행…….”
“원장님은 애초에 병동을 내줄 생각이 없으셨군요.”
“아니, 그게 무슨…….”
“당사자가 굳이 안 받겠다는데, 이렇게까지 열심히 설득하시는 걸 보니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
“적자든 흑자든 그 핑계로 일단 병동만 없애놓으면, 그 뒤로는 다 원장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까?”
진철영의 말에 원일웅이 발끈했다.
“좋은 뜻으로 제안 드린 건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정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시겠다면, 원장 직권으로 병동 폐쇄부터 하겠습니다!”
“원장 직권이요? 언제부터 이 병원이 원장님 개인 병원이 됐습니까? 애초에 그게 됐으면 오늘 저를 따로 부를 이유도 없으셨겠지요. 실적으로 보나 의학적인 필요로 보나 이사회 설득이 힘드니 어떻게든 동의 구해서 처리하려고 하신 것 아닙니까?”
진철영의 말에 원일웅은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진 교수,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철영이 말했다.
“원장님이야말로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이광섭 과장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저한테 과장하라고 성화인 사람입니다.”
“뭐라고요?”
“제가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미루고 있었던 건데, 오늘 보니 그리하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잠깐.”
진철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원일웅이 붙잡았다.
“병동만 유지할 수 있으면 과가 제대로 돌아갈 거라 생각합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환자를 진료하는 건 병동이 아니라 의사죠. 결국, 좋은 사람을 뽑는 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진철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교원… 레지던트 선발에 개입하겠다는 건가?’
“지금껏 저희가 레지던트, 펠로우 그리고 임상교수 추천에 이의 제기한 적은 없었죠?”
“그거야 정신과에서 근무할 사람 뽑는데 당연히 정신과 의견을…….”
“당연한 게 아닙니다. 채용 면접관은 원장, 교육수련부장 그리고 해당 임상과 과장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원일웅이 진철영의 말을 정정하고 나섰다.
“그동안은 각 과 과장님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왔습니다. 저희가 데리고 일할 것도 아니고 하니 ‘배려’했던 거죠. 그런데 오늘 보니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흐음.”
진철영이 침음했다.
면접관으로서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겠다는데, 작정하고 훼방을 놓는다고 하면 이건 어떻게 말릴 수 없는 것 아닌가.
“앞으로는 지원자가 삼아대병원에서 일할 역량이 있는 친구인지 저희도 검증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못할 건 또 뭡니까? 병원 전체의 이익보다 과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태도 그게 잘못 아닙니까. 가서 과장님과 잘 상의해보세요. 긍정적인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진철영은 굳은 표정으로 원장실을 나왔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어디 한번 해보라지.’
원일웅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수화기를 들었다.
“교육수련부장하고 IRB 위원장 면담 일정 잡아주세요. 최대한 빨리.”
* * *
3주일 뒤, 정신과 의국.
“휴우. 덥다 더워. 무슨 날씨가…… 에어컨을 켜도 더운 것 같죠?”
회진을 마치고 의국으로 돌아온 황진호가 손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이제 7월인데 더운 게 당연하지.”
“와…… 벌써 1학기 끝나가네요. 올해는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것 같죠? 아, 달력 바꿔야지.”
권원주의 말에 황진호가 지난달 달력 한 장을 찢었다.
“올해 좀 바쁘긴 했지.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해준 덕분에 성과도 있었잖아?”
권원주가 시현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 녀석이 들어오고 과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
환자 진료는 물론이고 리서치 센터와 함께 하는 연구까지. 작년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일이 늘었지만, 다들 이상하리만치 불만이 없었다.
병동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치료에 반응하지 않던 환자들이 점차 회복되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큰 보상이었다.
“참, SPN-1001 약물 연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이번에 IRB에 연구 계획서 심사 넣은 거 수정 보완 완료했고 최종 승인 났습니다.”
권원주의 물음에 김석용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IRB(Institutional Review Board).
의학연구윤리심의위원회를 뜻하는 말로, 모든 의학 연구의 윤리적 측면을 심사하고 연구를 승인하는 기관이었다.
대부분의 의학 연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인 만큼, 인권과 안전을 보호하고 윤리적인 문제점은 없는지 연구 시작 전에 점검한다.
‘벌써 통과했어?’
자살 위험도가 높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이니만큼 IRB에서 환자 안전을 문제 삼아 제동을 걸지 않을지 걱정했지만, 의외로 수월하게 넘어간 모양이었다.
“확실히 리서치 센터랑 같이 일하니까 이런 건 편하네요. 워낙 노련하기도 하고…… 센터장님 입김이 있었는지 IRB에서도 자잘한 문제로 시비를 걸지 않더라고요.”
“그래. 진행이 빠르네.”
권원주가 다행이라는 듯 웃어 보이며 이번에는 시현에게 물었다.
“새로 시작한 AI 모델 연구는 어때? 자살 위험도를 예측한다고 했던가?”
“그게…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문제? 무슨 문제?”
“IRB 연구 계획서가 반려되었습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기존 의무기록을 이용한 통계 분석에 가까운 연구 아니던가.
문제라고 해봐야 절차상 가벼운 지적 정도일 가능성이 컸다.
“원래 한 번에 통과하기 쉽지 않아. 보완해서 제출하면 분명히……,”
권원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려는데,
“수정 의견 없이…… 전면 폐기 권고받았습니다.”
시현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대답을 내놓았다.